오피니언 사설

민주선거 망치는 흑색선전, 표로 심판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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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불과 나흘 남겨둔 18대 대통령 선거가 흑색선전과 저질 비방으로 물들며 목불인견의 난장판이 되고 있다. 대선 레이스가 보수·진보의 양자 구도로 전개된 데다 판세가 초박빙 양상을 보이면서 양 진영 간의 묻지마 폭로와 인신공격이 도를 넘어섰다. 최근 이용자가 부쩍 늘어난 트위터·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괴담과 욕설을 실시간으로 확산시키면서 선거판이 흑색선전으로 뒤덮이는 양상이다.

 요 며칠 새 터져나온 사례들은 우리 정치의 후진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자극적이고 황당한 폭로가 그럴듯하게 포장돼 퍼져나간다. 민주당 서울 노원갑 지역위원장인 김용민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박근혜(새누리당 후보), 충격이네요…사이비종교 교주와 20년 가까이 협력관계를 맺고, 신천지와도 우호적인 관계…’라는 글을 올렸다. 개신교 신자를 자극해 표심을 돌려놓으려는 의도가 담긴 글이다. 인터넷방송인 ‘나꼼수’ 관계자들은 ‘박 후보가 장수장학회 문제 해결을 위해 1억5000만원을 들여 굿판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 측은 즉각 사실무근이라며 검찰에 고발했지만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관련 글은 빠르게 확산됐다.

 비방의 표적이 된 박 후보는 어제 기자회견을 열어 흑색선전과의 전면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묻지마 폭로의 피해자는 박 후보만이 아니다. 온라인과 SNS에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겨냥해 ‘청와대의 80%를 주사파로 채웠다’ ‘아버지가 북한 인민군 출신’ 등의 비방이 넘쳐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서울시 선관위는 “새누리당 연루자가 사무실을 차려놓고 SNS에 문 후보에게 불리한 글을 올린 혐의를 확인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흑색선전은 민주 선거의 근간을 흔드는 범법행위다. 출처·실체를 밝히지 않고 잘못된 정보를 흘려 특정 후보와 유권자 사이를 이간하는 반칙이자 선진 정치의 적이다. 선동가들은 검증할 시간 여유를 주지 않고 막판에 폭로전을 펼쳐 표심을 바꾸려 한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역대 선거 중 가장 흑색 비방전이 심했던 것은 이회창-노무현 후보가 치열하게 격돌한 16대 선거였다. 비방·흑색선전으로 49건이 선관위에 적발됐다. 17대 선거 때는 크게 줄어들어 선거풍토가 개선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 대선이 16대 대선 이상으로 마타도어로 선거판이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12일까지 선관위에 적발된 비방·흑색선전 건수는 20건으로, 지난 대선(11건)에 비해 크게 늘었다.

 공직선거법에 따라 13일 이후 실시되는 여론조사의 공표가 금지됨으로써 유권자는 여론의 흐름조차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를 틈타 ‘얼굴 없는’ 여론조사까지 판치는 상황이다. 인터넷 사이트에선 ‘언론 조사는 믿지 마라, 다 조작된 것이다. 이게 맞다’는 등의 글과 함께 정체불명의 여론조사 수치를 올리는 일이 횡행한다. 선거 당국은 막판 선거 관리에 있어 치밀함과 신속성을 보여줘야 한다. 선전물, SNS 게재물 등을 촘촘하게 점검한 뒤 허위라고 판단되면 즉시 관련 내용을 공지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두 후보 진영은 선거에 임하면서 각자 “무책임한 의혹 공세를 중단하겠다” “국민에게 불편함을 주는 검증은 자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적어도 지금 양상만 보면 말만 하고 실천에는 인색했다. 3차 TV토론 등을 통해 ‘묻지마 폭로 중단’을 재차 밝히고 실천 의지도 천명해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열쇠는 유권자가 쥐고 있다. 막판에 기습적으로 불거져나온 근거 없는 주장은 선택의 잣대에서 제외해야 한다. 더 나아가 흑색선전을 많이 벌인 후보 측을 표로 심판해야 한다. 새 정치는 정치인의 구호가 아니라 유권자의 선진의식에서 시작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