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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보다 더 놀라워' 외국인이 반한 한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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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뉴질랜드 경찰관 로저 앨런 셰퍼드가 2007년 가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만난 시골 아낙들.
2. 미국인 여행 작가 로버트 쾰러는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가 정겨운 서울 청파동 옛 골목에서 명동보다 멋진 정취를 발견했다.
3. 산행 중 이따금 찾아드는 고요 역시 로저 앨런 셰퍼드가 한국의 산에 반한 이유다.
4. ‘론리플래닛’ 토니 휠러 회장은 남과 북 양쪽에서 판문점을 방문하는 드문 기회를 누렸다.
5. 오직 K팝이 좋아 한국으로 날아온 미국인 알리아 레이첼 존스(24)의 방은 한국 연예인과 K팝 가수 사진으로 도배돼 있다.
6. 미슐랭 3스타 셰프 피에르 가니에르는 경기도 성남 모란시장에서 건강하고 넉넉한 한식의 이미지를 건져냈다.

2010년 4월 ‘외국인이 반한 한국’ 연재를 시작한 이래 외국인이 손수 쓴 한국 여행기는 2주일에 한 번꼴로 week&에 실렸다. 연재 초반만 해도 지인 방문차, 업무상 왔다가 한국에 빠진 필자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최근엔 한국 드라마, K팝을 좇아 한국에 눌러앉은 한류 팬의 투고가 그 수를 앞질렀다. 순수한 여행 목적으로 한국을 찾는 이도 부쩍 늘었다. 동기야 어떻건 모두 긴 글을 써내려 갈 만큼 한국을 넓게 보고 깊게 느낀 이들이다. 그들의 발길은 서울의 화려한 쇼핑가보다 도심 속에 불쑥 들어앉은 북한산이며 질박한 삶이 깃든 옛 골목에서 더 오래 머물렀다.

나원정 기자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 지난 3년간 외국인이 쓴 여행기에서 확인한 한국 관광의 대명제다.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음식 여행이었다. 한식이 주제로 등장한 여행기가 10편이 넘었다. 문화와 역사가 깃든 음식일수록 깊은 인상을 남겼다. ‘홍콩 식신’으로 통하는 홍콩의 음식평론가 추아람(71)은 갈빗살을 발라 노인도 먹기 좋게 잔칼질로 부드럽게 만든 남도식 소갈비를 맛보며 “한국인은 요리 하나에도 ‘효심’을 담는다”고 감복했다.

  외국인이 꺼릴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한국의 식문화도 재조명됐다. 여름 삼복더위를 삼계탕으로 이겨낸 미국 청년 호텔리어도 있었고, 한 그릇에 담긴 국물을 여러 명이 거리낌없이 퍼먹는 한국인에게서 한국 문화의 소탈함을 발견한 미국 청년도 있었다. 화려한 궁중요리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은 건 “매 끼니 알록달록 예쁘게 차려진 밑반찬”(영국인 채식주의자)이었다.

  한식뿐이 아니다. 여전히 많은 외국인이 서울과 수도권에 머무르지만 가슴에 담아간 장소는 모두 달랐다. 이방인은 붐비는 쇼핑가와 빌딩 숲에 가린 한국의 진짜 모습을 찾아냈다. 미국인 여행작가는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가 정겨운 서울 청파동 옛 골목에서, 일본인 주부는 이화동의 오래된 벽화마을에서 한국인의 일상을 발견했다.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는 미국인 만화가는 이순신 장군의 혼이 서린 곳을 찾아 전국을 유랑했고, 이탈리아 청년은 오로지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 성지 순례하는 마음으로 태권도 종주국인 우리나라를 찾았다. 『춘향전』에 빠진 프랑스 새색시 에바 시나피(28)에게 한국은 “프랑스보다 더 로맨틱한 나라”였다. 배낭여행족의 바이블 『론리 플래닛』을 쓴 세계적인 여행가 토니 휠러(66)는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판문점을 방문해 세계 분단 역사의 종식을 낙관하는 글을 썼다.

  한류는 한국 여행의 가장 강력한 동기였다. 전 홍콩관광청장 에이미 챈(63)은 배용준에게 반해 10년이 넘도록 한국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K팝에 빠져 무작정 서울에 온 여성 팬도 여러 명이었다. “외교는 한 곡의 노래에서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어서 오마르 알 나하르(43) 주한 요르단 대사는 추가열·심수봉이 부른 트로트를 애청하며 한국의 정서를 이해했다.

명동보다 북한산

외국인이 한국에서 가장 즐긴 활동 1위는 쇼핑이고,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 1위는 서울 명동이다. 해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진행하는 외래 관광객 실태조사 결과다. 매년 바뀌지도 않는 확고부동한 순위다.

  그런데 이 조사의 응답자는 과반수가 한국 초행자다. 한국을 속속들이 들여다본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흔한 도심 투어보다 생태관광이 훨씬 반응이 좋았다. 외국인에게는 명동보다 북한산이 더 놀라운 장소였다. 서울에 처음 온 외국인은 백이면 백 “이렇게 큰 도시에 이렇게 많은 산이 있다”(독일인 산악자전거 매니어)는 데 놀랐다. 특히 지하철을 타고 국립공원을 갈 수 있는 도시는 세계에서 서울이 유일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미국인 영어강사 윌리엄 스튜어트(30)는 집에서 15분 거리인 북한산 인수봉(804m)에서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상인 양 암벽 등반을 했다. 스웨덴 청년 다비드 아놀드손(34)은 서울대 재학시절 매일 아침 지하철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까지 이어지는 관악산(632m) 등산로를 뛰어다녔다. 도시에서 한참 자동차로 다녀야 겨우 산에 닿는 해외 등산 매니어에게 서울의 자연환경은 유쾌한 충격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산길이 아니어도 오르락내리락 굴곡진 한국의 길은 하이킹에도 제격이다. 미국인 영어교사 마이크 에센바크(46)는 거제도에 직접 하이킹 코스를 만들기도 했다. 성곽과 사찰, 옛 한국전쟁 포로수용소를 지나 야생 동물을 벗하노라면 어느새 일몰을 맞는 30여 ㎞의 ‘거제도 산마루길’이다. “하이킹이 가져다 주는 순전한 즐거움을 오직 한국에서만 만끽하고 있다”고 그는 소탈하게 고백했다.

  겨울 철새를 좇아 충남 서산 천수만에서 전남 해남까지 광활한 갯벌을 종횡무진 누빈 영국인 조류학자, 산과 바다와 55개의 동굴이 있고 늘 무지개가 뜨는 강원도 삼척을 제2의 고향으로 삼은 캐나다인 사진작가도 있었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생태환경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그들은 하나같이 “한국에서 생태관광이 활성화되기를” 염원했다.

백두대간 종주도 거뜬

한국인도 주저하는 오지에서 죽을 고생을 자처한 외국인의 사연은 유난히 반응이 뜨거웠다. 고생담을 달게 추억한 그들의 에세이는 한국인 독자의 마음도 녹였다.

  가장 폭발적인 호응을 얻은 필자라면 백두대간을 종주한 뉴질랜드 경찰관 로저 앨런 셰퍼드(47)다. 그는 2007년 9월부터 3개월간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지리산(1915m) 자락부터 설악산(1708m) 자락까지 750㎞를 걷고 또 걸었다. 성수기엔 하룻밤에 200명 가까이 몰려드는 지리산국립공원대피소에서 낯선 한국인과 어깨를 맞대고 누웠고, 피로에 찌든 등산객의 코 고는 소음 때문에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그저 “한국의 산이 좋아서”였다.

  백 번 넘게 한국을 찾은 일본인도 있었다. 치과의사 다카토 마코토(56)는 90년대 말부터 20년이 넘도록 두 달에 한 번꼴로 한국을 여행했다. 걸어서 다닌 길만 표시해도 전국 지도를 가득 메울 정도다. 서울의 한 공원에서 우연히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기도 한 그는 전북 남원에서는 왜구에 맞선 조선인의 무덤 ‘만인의총’과 일제에 의해 폭파된 ‘황산대첩비 파비각’ 앞에서 “일본인으로서 참으로 면목이 없다”고 고개를 숙였다.

  최근 화제가 된 주인공은 지난달 23일자에 소개된 미국인 교수 트릭 카일(44)이었다. 그는 2009년부터 부산 토박이 아내와 함께 제주올레 전 코스를 완주했다. 그는 한겨울 이른 아침 제주올레 1코스에서 물질 나가는 65세 해녀를 보고 한국인의 강인한 삶을 배웠다고 털어놨다.

글 올린 외국인들 “나 유명해졌어요”

‘외국인이 반한 한국’에는 해외 저명인사도 여럿 참여했다. 전문가들은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매력을 찾아내 전문가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미슐랭 3스타 셰프 피에르 가니에르는 경기도 성남 모란시장에서 한식의 이미지를 건져냈다. 가니에르는 “사람에 비유하자면 음식을 더 얹어주는 시장 아저씨 같은, 모란시장의 이미지 그대로가 한국 음식에 대한 내 생각이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고급 한식당에서 한정식 코스 요리를 맛보면서 한식도 프랑스 코스 요리처럼 우아할 수 있음을 깨우쳤다.

 ‘론리플래닛’ 회장 토니 휠러는 전 세계 배낭여행족의 황제답게 판문점을 남북한 양쪽에서 찾아본 뒤 세계에서 유일한 ‘안보관광’의 현장으로 소개했다. 영국인 축구 전문기자 존 듀어든은 FA컵 우승팀이 팬에게 트로피를 건네준 장면을 묘사한 뒤 한국 특유의 축구 문화를 예찬했다.

 모든 저명인사가 자신의 전공 분야만 눈여겨본 건 아니었다. 롯데 자이언츠 전 감독 제리 로이스터, 스위스의 세계적인 건축가 다비데 마쿨로, 김연아 선수의 코치였던 브라이언 오서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제주도의 그림 같은 자연 풍광이었다.

 전북 남원 광한루에 올라 성춘향의 러브스토리에 흠뻑 젖어든 프랑스인 새색시 에바 시나피는 week&에 사연이 소개된 뒤 KBS ‘인간극장’에 출연해 한국인 남편과의 신혼일기를 공개하기도 했다. 한국의 초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던 미국인 크리스티나 리트(28)는 찜질방·노래방·클럽 등 한국의 ‘밤 문화’에 빠진 사연을 들려줘 열띤 반응을 받았다. 교사라는 직업 때문에 “마음고생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캐나다에서 온 사진작가 리 맥아더(38)는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강원도 삼척 이야기로 여러 방송국으로부터 출연 섭외를 받았다. 그는 week&에 등장한 뒤 “한국뿐 아니라 캐나다에서도 사진 촬영지나 여행지를 문의하는 e-메일과 전화가 쇄도했다”고 전했다.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태권 청년 마르코 이엔나(28)는 “오히려 내게 태권도에 대해 물어보는 한국인도 있었다”며 놀라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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