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출판] '그래, 난 못된 여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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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못된 여자다/캐시 하나워 엮음, 번역집단 유리 옮김/도서출판 소소,1만2천원

제목만 보면 피해의식에 젖어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여자들이 앙칼지게 대드는 모습이 먼저 떠오를 지 모르겠다. '더 이상 다소곳이 당하진 않겠어.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겠어!'라며.

원제 '집안의 암캐(Bitch in the House)'는 버지니아 울프가 20세기초의 수동적인 여성상을 꼬집기 위해 썼던 '집안의 천사'를 비튼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한국판 제목은 다소 경박하고 선정적으로 흐른 듯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현대 여성, 특히 일과 가정(결혼) 사이에 끼여 갈등하는 중산층 여성들의 노곤한 삶이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작가이자 컬럼니스트인 캐시 하나워는 한적한 교외의 큰 집으로 이사하고 소득이 늘었는데도, 자신이 온종일 분노에 차 있다는 걸 깨닫고 몸서리친다. 해도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 아이들 뒤치다꺼리, 그런데도 남편은 한갓지고 빈둥빈둥 노는 것 같은 박탈감,식어가는 성생활….

이런 심경을 친구들에게 털어놨더니 자기들도 그렇다며 맞장구를 치는 게 아닌가. 아, 그렇담 경험을 공유하자. 그렇게 해서 스물네살에서 예순 여섯살까지의 여성 26명이 고독.섹스.결혼.모성 등에 관해 털어놓은 솔직한 이야기들을 모은 에세이집이 탄생했다.

아이를 낳은 뒤 결혼 생활의 소원함과 성욕 상실을 고백하는 이, 유부남의 아이를 낳아 혼자 기르는 이의 당당한 자기 선언, 서로의 외도를 눈감아 주는 부부의 빛과 어두움….

'내가 사랑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였다. 사랑이 시작될 무렵의 그 떨림, 그 달뜸, 드라마틱한 순간들. 사랑이라는 욕망의 그 격렬함을 사랑했다'(케리 헐리)며 반추하는가하면 '성인들의 합의된 섹스를 병리학적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문화가 꽃피기 위해서는 섹스를 도덕 교과서에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거기서는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한나 파인)는 과격한(?) 주장도 보인다.

열정과 욕망과 성공 사이에서 흔들리는 필자들의 글을 읽노라면 요즘 여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그것을 막는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러나 해법은 여전히 묘연하다.

에필로그에서 엘렌 길크리스트라는 68세 노작가는 이렇게 당부한다."나는 행복하다. 타인에게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행복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스스로 창출하는 것이다."

역시 65세로 황혼기에 접어든 여성운동가 비비안 고닉도 '여성의 자기 자각이야말로 행복의 요건'이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위험사회'로 유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 부부는 '사랑은 지독한 혼란: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새물결)에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개인화 경향이 현대인의 애정관계에 적색경보를 울렸다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여성들이 다시 '집안의 천사'로 다소곳이 다시 물러나지 않는 한 혼돈은 불가피하다는 울적한 결론이 나온다. 여성에게 세계는 아직 반쯤만 변했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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