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문학상 어떻게 심사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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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문학상은 소설집 한권 이상을 펴낸 소설가가 지난 1년간 새로 발표한 중.단편소설 중 최고의 작품 한편에 주어진다.

심사대상에 오른 소설가 2백30명의 작품 3백71편 중 중견 이상 소설가.문학평론가 50명의 추천, 5명의 예심, 5명의 본심 등 3심을 통해 수상작을 선정했다.

*** 3단계 심사로 수상작 선정

본심에 오른 작품은 총 10편의 중.단편이다. 작품을 정독한 후 9월 8일 회동한 본심위원회는 먼저 심사기준을 토의하였다.

창작집 한권 이상을 출간한 경력을 가진 작가라면 문단 나이를 불문한다는 것, 다른 문학상(들) 의 수상자 또는 수상작일지라도 제한을 두지 않는 한편 다른 문학상(들) 의 심사위원 여부도 황순원 문학상 수상에 결코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도 합의하였다.

오직 작품에 충실함으로써 우리 소설의 미지의 영역을 개척한다는 황순원 문학상 제정의 의의를 드높인다는 명분을 심사위원 전원이 새로이 다짐하였던 것이다.

다음 심사절차에 관해 논의하였다. 선정의 객관성과 토론의 효율성을 위해 먼저 심사위원 각자가 무기명으로 3편씩 추천하는 방법을 채택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다수표를 얻은 4편의 중.단편을 놓고 자유롭고 기탄없는 의견을 개진하여 박완서씨의 단편 '그리움을 위하여' 를 제1회 수상작으로 삼는 데 만장일치로 합의하였다.

이 단편의 미덕은 무엇보다 서사가 살아있다는 점이다. 서사의 죽음을 촉진하는 조건들이 미만한 우리들의 시대, 그 시대에 순응하여 해체의 회로에 즐겨 투신하는 최근 작단의 경향에 거슬러 작가는 경험을 공유하고 지혜를 나누는 이야기의 본성에 충실하다. 그렇다고 박완서씨가 낡은 이야기꾼이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작품에서 뛰어난 이야기꾼인 작가 자신도 이야기의 소멸이라는 현대적 질병을 앓고 있다. 작중 화자 '나' 는 "그릴 것 없이" 유복한 노년을 살아간다. 자식들은 잘 장성하였고, 친정어머니의 죽음이 암시하듯이 모실 어른들도 세상을 떠났고, 무엇보다 입.퇴원을 되풀이하던 남편, 그 '일생의 상전' 마저 사라졌다.

그런데 그 유복한 자유의 공간이란, "그동안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고 자신의 최근 삶을 스스로 요약하고 있듯이 그리움, 즉 서사가 죽은 잿빛 장소인 것이다.

이야기가 가난한 '나' 의 생활 속으로 이야기의 무진장한 보고를 거느린 가난한 수다쟁이 사촌동생이 틈입한다.

아니, 틈입이 아니라 편입이다. '나' 는 그녀를 파출부격으로 거느리고 있으니 죽음의 서사가 생활의 서사를 자매애로 위장한 상전.하인의 관계 속에 움켜잡고 있는 형국이다.

*** 他문학상 수상 제한 안둬

이 불편한 위계적 현실관계는 사촌동생이 남해의 작은 섬 사량도로 이탈하면서 균열한다. 사촌은 사량도에서 '사랑' 에 빠진다. 배 부리는 늙은 어부, "꼭 교장선생님 같이" 점잖은 선주와 살림을 차린 것이다.

'나' 의 생활을 받쳐주던 '하인' 의 탈주에 노여워하던 그녀는 마침내 깨달음 속에 사촌의 재혼과 화해한다.

"칠십에도 섹시한 어부가 방금 청정해역에서 잡아 올린 분홍빛 도미를 자랑스럽게 들고 요리 잘하는 어여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이 있는 섬. 그런 섬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그리움이 샘물처럼 고인다. "

그리움이야말로 서사가 탄생하는 그윽한 장소가 아닌?? '나' 가 사촌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의 서사에서 해방되었듯이 작가는 그리움의 생성을 거쳐 서사의 죽음이라는 현대적 질병으로부터 치유되었다. 우리 모두 서사의 귀환을 축복하자.

〈심사위원 : 김윤식.이문구.김치수.전상국.최원식, 대표집필 : 최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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