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소니 운명 가른 건 13쪽짜리 이 보고서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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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후쿠다 교수가 1993년 작성한 보고서 ‘경영과 디자인’ 한글 번역본을 들고 있다.

후쿠다 다미오(64) 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건희 회장은 취임 이후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피력했다. 그 목표를 실현하려면 디자인 강화는 필수였다”고 말했다. 또 “디자인 혁신은 종합적인 개혁이 뒤따르는 일이어서 회사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물줄기를 강하게 해야 변화가 생겨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가 ‘후쿠다 보고서’를 이 회장에게 제출한 이유다.

 후쿠다 교수는 삼성을 보는 일본 기업들의 시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 전자업계는 여전히 삼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삼성에 대해 잘 모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도약의 배경을 분석하고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 이 회장과 언제 처음 만났나.

 “1993년 6월, 도쿄에서 열리는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라고 삼성 일본법인에서 연락이 왔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 사장단 회의가 끝난 뒤 일본 디자인 고문들만 따로 불렀다는데.

 “당시는 일본은 물론 전 세계 기업들이 디자인에 눈을 뜨던 시기였다. 이 회장은 앞서가는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를 몹시 듣고 싶어 했다.”

 - 무슨 대화를 나눴나.

 “디자인부터 경영 전반에 걸친 폭넓고 깊은 대화였다. 이 회장은 예리한 질문을 쏟아냈다. 일본 디자이너들은 필사적으로 답변했다. 얘기로 밤을 샜다.”

 - 이 회장의 반응은.

 “회의가 끝날 무렵 이 회장이 ‘내일 독일행 비행기 안에서 보고서를 꼼꼼히 읽겠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당시 이 회장에겐 디자인이 낯선 분야였을 텐데 경청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용히 나지막하게 말했지만 질문 내용이 날카로웠다. 생각의 넓이와 깊이에서 큰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 왜 보고서를 만들 생각을 했나.

 “제조업에서 디자인은 기획이나 설계와 관련이 깊다. 기업은 혁신을 창조해 경쟁회사를 이길 상품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곳이다. 경영진과 디자인 부서가 서로를 모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봤다. 당시만 해도 삼성 내부에는 업무 비효율, 정보 공유 부족, 타 부서에 대한 이해 부족, 명확하지 않은 역할 분담 같은 문제가 있었다.”

 - 보고서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디자인에 관한 프로세스 개선과 사고방식의 혁신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회사 전체에 대한 개선과 제안이었다.”

 - 삼성 신경영에 얼마나 반영됐나.

 “삼성이 일류가 되기 위해선 디자인이 일류가 돼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90년대 이후 삼성 경영진과 삼성 디자이너들은 혁신 노력과 의지를 보여줬다.”

 - 삼성의 성장을 어떻게 보나.

 “1990년대 초부터 10년간의 개혁이 현재 도약의 기반이 됐다. 많은 개혁 전략들이 놀랍게도 대부분 성공을 거뒀다. 이 10년의 기간에 대해 최고의 평가를 내리고 싶다.”

 - 일본 전자업체들이 어렵다.

 “80년대 성공체험을 잊고 새로운 개혁을 추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일본 내 1억 명에 달하는 견고한 국내시장이 있다 보니 해외 시장 개척에 대한 갈망도 생겨나지 않았다. 디자인의 경영 자원화에도 실패했다.”

 -삼성에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일류기업이 됐지만 진정한 승부는 이제부터다. 시장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능동적인 변화, 강력한 독창성으로 좀처럼 추월을 허용하지 않는 체질을 갖추기 바란다.”

박태희 기자

후쿠다 다미오는

-1948년 출생

-73년 교토공예섬유대 디자인공예과 졸업

-75년 교토공예섬유대 공예학 석사 수료

-75~83년 일본전기디자인센터 디자인부

-83~89년 교세라 연구소 디자인실

-89~99년 삼성전자 고문

-99년~현재 교토공예섬유대학원 교수

-97년 제8회 국제디자인공모전 그랑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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