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j Global] 이해경…고종의 손녀, 의친왕의 다섯째 딸 ‘왕가의 아련한 추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2면

아버지는 일제에 의해 황태자 자리를 빼앗긴 친왕(親王)이었다. 그의 아내 친왕비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녀를 낳은 건 아버지 눈에 들었던 첩. 생모와 세 살 때 떨어져 친왕비 손에 자란 그녀는 숨막히는 궁중 법도에 신경쇠약에 걸렸다. 뜻을 펼 수 없던 아버지 곁에는 대신 늘 여인들이 있었다. 그 여인들은 어디서나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배 다른 형제만 스물한 명. 아버지가 싫고, 그의 여자들이 싫고, 감옥 같은 궁중이 싫어 55년 전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80달러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웨이트리스 일도 했고, 불법체류자 신분인 적도 있었다. 이해경(82) 여사. 조선왕조 고종 황제의 둘째 아들 의친왕의 다섯째 딸이다.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 근처 자택에서 그녀를 만났다. 이 여사는 “방이 지저분하지만 여자니까 괜찮겠지”라면서 원룸 아파트 문을 열었다.

글=조진화 프리랜서 사진=뉴욕중앙일보 신동찬 기자


길러준 어머니 의친왕비

●사동궁(寺洞宮·서울 관훈동에 있던 의친왕의 사저) 생활을 오래하셨는데요.

 “아버지는 사동궁에는 거의 있지 않고, 후실이 생길 때마다 궁 밖에 집을 지어주고, 그 집들을 돌면서 생활했어요. 의친왕비가 사동궁을 지켰고 제가 그곳에서 20년 가까이 의친왕비와 지냈지요.”

●의친왕비는 어떠셨나요.

 “자식이 없으셨던 의친왕비는 제게 어머니 노릇이 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예법을 챙기는 게 너무 싫었어요. 어머니 앞에선 늘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하니 매번 도망 다녔죠. 어머니가 하루는 “내가 싫어서 도망가는구나” 섭섭해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니에요” 하면서 어머니 무릎에 팍 누워버리면서 “이런 것도 좀 하고 싶어요”라고 어리광을 부린 적이 있어요.”

●그 후로는 살갑게 대해지던가요.

 “하루는 어머니가 딱딱한 엿을 입에서 녹인 뒤 제 입에 넣어주신 적이 있어요. 어찌나 메슥거리면서 토할 것 같던지요. 눈물이 다 났지만 억지로 받아먹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그런 어머니 노릇을 하고 싶으셨겠다’ 싶어요.”

①이해경 여사, 도미 직전 의친왕비가 입던 옷과 화관을 선물로 받고 기념촬영. (1956)

●사동궁 생활은 어땠나요.

 “내 처소에서 ‘애기손님(유모)’하고 생활했습니다. 아침에 씻고 옷 입고 어머니께 문안 절 하고, 겸상을 한 뒤 학교에 갔지요. 아버지가 궁에 계시면 아버지가 드시던 수라상이 그대로 물려 나와 어머니와 제가 먹었어요.”

●궁중음식 맛있지 않나요.

 “항상 아주 깔끔한 음식만 올라와 오히려 맛이 없었어요. 어머니도 가끔 상궁들에게 ‘나도 두메에서 자라 시래기 같은 거 좋아한다. 너희들 먹는 것 좀 가져와라’ 하시곤 했어요. 저도 일부러 식사 시간에 늦게 가서 상궁들과 함께 구수한 시래기국을 같이 먹기도 했지요.”

 소녀 이해경은 경성유치원을 나와, 경성여자사범부속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했다. 경성유치원은 덕혜 옹주를 위해 고종 황제가 덕수궁 안에 세웠던 유치원으로, 해경은 이완용의 손녀딸 등과 함께 그곳을 다녔다.

●학교생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께서 학교에 특별 대우를 하지 말라고 청을 넣었어요. 저도 친구들과 똑같이 놀려고 애썼어요. 그래도 안 되는 게 있더라고요. 도시락 찬밥을 못 먹었어요. 그래서 유모가 목판에 따뜻한 밥을 국과 함께 가져오면 숙직실에서 혼자 앉아서 먹었지요. 잠깐 그렇게 하다 다시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녔는데, 찬밥이 안 넘어가서 매일 그냥 가지고 갔죠. 들키면 어머니한테 혼나니까, 유모가 몰래 궁 안으로 자장면을 시켜줘서 먹곤 했어요.(웃음)”

●친구들이 부럽지는 않던가요.

 “하루는 하교 후 유모가 오기 전에 몰래 친구네 집에 간 적이 있어요. 저녁에 궁에서 사람이 와 저를 데려갔는데, 어머님이 모른 척하고 ‘어디 갔다 왔니?’ 하시더라고요. 당시 중일전쟁 때문에 상이군인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상이군 위문을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했죠. ‘그래? 뭐했어’ 물으시기에 ‘노래했어요’라고 했더니 ‘해봐’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노래를 했죠. ‘그리고 또 뭐했어?’ ‘춤 췄어요.’ ‘그래? 춰봐.’ 이렇게 몇 번을 거짓말했더니 어머니 눈꼬리가 올라가시면서 “이년!” 호통을 치시더라고요. 그러시면서 얼마나 꼬집으시던지··· 그래도 전 잘못했다고 안 했어요. 다른 아이들은 다 하는데 왜 나만 못하느냐는 반항심 때문이었죠.”

②고종황제 장례식에서 의친왕비와 이해경의 큰오빠 이건. (1919)

낳아준 어머니 신여성 김금덕

●생모는 그립지 않던가요.

 “열세 살 때 처음 만났어요. 화신상회에서 만났는데, 저를 딱 붙들고는 ‘잘 있었냐?’ 그러는데 저는 속으로 ‘이 사람, 나한테 왜 반말을 하지?’ 그랬어요. 궁에서는 의친왕비 빼놓고는 모두 제게 존대를 했거든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미안하더라고요.”

 이해경이 대학을 졸업한 지 한 달 만인 20세 되던 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의친왕은 부인과 후실들, 자녀들, 고종 황제의 후궁들까지 이끌고 부산으로 피란을 내려갔다. 이 여사는 혼자 미군 트럭을 타고 대구로 내려갔고, 거기서 또 히치하이킹을 해서 부산에서 피란을 하고 있는 가족을 찾았다. 가서 보니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피란터에서도 후실들의 알력 다툼은 계속되고 있었어요. 방 하나에 의친왕과 의친왕비, 후궁과 아이들이 잠을 잤지요. 방 가운데에는 빨랫줄이 걸려 있던 게 기억나요.”

 해경은 붙드는 의친왕비의 손길을 뿌리치고 친구가 하는 다방에서 의자 4개를 붙여 잠을 자며 지냈다. 그러다 자신을 찾아온 생모를 따라 수복 후 서울로 올라왔다.

●생모와 함께 사는 것이 적응이 되던가요.

 “어색했지요. 항상 거리감이 있었죠. 생모는 여걸이었는데 그것도 항상 불만이었어요.”

 생모 김금덕 여사는 신여성이었다. 경성보육학교를 나와 신식 파마 머리와 뾰족구두를 신은 보험회사 직원으로 의친왕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그 후 의친왕의 배려로 궁 안의 보육교사로 취직했다가 이해경을 낳았다. 의친왕에게 대들다 쫓겨났지만, 재혼해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특히 여성으로 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말을 타고 장터를 돌며 선거활동을 하다 동네 노인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지만, ‘내가 지금 이렇게 해야 나중에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다’고 했던 페미니스트였다. 선거는 모두 낙방했다. 이렇게 생모와 지내던 이해경이 오랜만에 문안을 갔을 때, 의친왕은 이미 의식이 희미해진 상태였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누구예요?” 물으시더군요. 어머니가 ‘누구긴 누구예요, 다섯째 따님 해경이죠.’ 그랬더니 버럭 화를 내세요. ‘해경이가 누구예요!’ 당신이 지어주신 아명은 길상이었거든요. 어머니가 다시 ‘길상이에요, 길상이’ 그랬더니 그제야 ‘아, 길상이오~’ 그러시더라고요.”

 의친왕의 장례를 치른 지 1년 후인 1956년 해경은 미국으로 떠났다. 왕가와 생모 쪽 모두 연을 끊으려는 결단이었다. 의친왕비는 “이제는 못 보겠구나”라면서 당신이 입던 원삼과 치마, 저고리를 내놓았다. 이해경은 이 옷들을 간직하다가 최근 경기여고에 모두 기증했다. 그녀는 꼬박 사흘이 걸려 미국에 도착했다. 손에는 의친왕비가 사준 야마하 피아노를 팔아 비행기 값 650달러를 치르고 남은 80달러가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성악을 공부했다.

③성북동 의친왕 별장에서 열린 이영(의친왕의 첫째 딸)의 결혼식. 앞줄 왼쪽 넷째가 의친왕, 앞줄 오른쪽 넷째가 의친왕비, 다섯째가 네 살 된 소녀 이해경. 그 옆이 신부 이영. (1934)


●미국 생활이 어렵지 않으셨나요.

 “떠나오면서 어머니께 ‘4년만 있다 온다’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게 마지막’이라는 결심이 굳었었죠. 미국 주소도 안 가르쳐줬고, 편지도 답장을 안 했습니다. 어찌 보면 미국에 와서 제가 살았는지도 몰라요. 남아 있었다면 자살을 했든지, 미쳤든지 타락을 해서 몹쓸 사람이 됐을 거예요. 미국 생활이 오히려 좋았어요. 재미있었죠.”

●무엇을 하셨어요.

 “대학을 3년 만에 졸업하고, 뉴욕으로 와서 음대 대학원 진학을 계획했어요. 하지만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를 할 엄두가 안 났어요. 그래서 일본 백화점에 취직해 매니저 비서로 일했습니다.”

④큰오빠 이건이 타고 다니던 롤스로이스 자동차. ⑤7세 때 순정효황후가 선물로 주신 프랑스 인형과 함께. (1937)

미국서 재발견한 아버지 의친왕
●의친왕비가 그립지 않으셨나요.

 “당시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형님 되시는 김동한 신부님이 뉴욕을 방문하셨었어요. 모아놓은 돈 50달러를 어머니께 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나중에 들었는데, 어머니가 정말 좋아하셨대요. 그 돈으로 1963년 한국을 처음 찾은 이방자 여사를 만나실 때 한복을 지어 입으셨대요.”

 이해경은 학생 비자를 받고 온 신분으로 일을 하던 불법체류자였다. 그때 린든 존슨 대통령이 외국인이라도 대졸 이상 학력이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켰고, 그녀는 그 법을 통해 영주권을 받았다. 때마침 컬럼비아대 동양학 도서관에 새로 생긴 한국학 부서에 직원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해 27년간 일하다가 1996년에 과장으로 정년 퇴직했다.

●의친왕과의 관계가 어떠셨어요.

 “아버지와는 별 관계가 없었어요. 진지 드실 때 수라상 앞에 있었던 것 말고는. 아버지는 거의 대부분 궁 밖 후실들 집에서 지내시다 병환이 나시면 후실과 자녀들 모두를 데리고 사동궁 지밀에 들어오셨죠. 아버지께서 아침 수라상을 받으실 때 어머니와 제가 자리를 지켰는데, 또 다른 상 하나가 뒷방으로 들어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어머니께 여쭸어요. ‘어머니도 안 드셨는데 왜 밥상이 저기에 들어가요?’ 그랬더니 어머니는 ‘네 아버지가 귀여운 아이들이 밥도 안 먹고 있는데 밥이 들어가시겠니?’ 그러시고 말더라고요. 제가 화가 나서 ‘어머니는 목석이세요?’라고 대든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나야 인간하고 결혼했니, 법하고 결혼했지’ 그러셨어요. 그러면서도 ‘그래도 죽으면 네 아버지랑 함께 묻힐 것은 나여’ 하셨죠.”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러우셨겠어요.

 “그냥 ‘내 아버지는 저런 사람이구나” 그랬어요. 후회도, 부러운 것도 없었어요.“

●사서로 근무하시면서 아버지 의친왕을 재발견하셨죠.

 “그전에는 조선 후기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어요. 일하면서 도서관의 고서를 읽고 배웠죠. 아버지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시려고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사동궁에 연금되기도 했어요. 아버님이 가장 오래 함께한 후실이 수인당입니다. 그 자손이 해준 얘기인데, 아버지가 궁에 기생들을 들일 때, 기생들이 타고 오는 인력거꾼이 독립투사였대요. 그리고 뒷방에서 그들과 독립 투쟁 논의를 하셨다고 해요.”

 의친왕은 1899년, 오하이오주 웨슬리언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가 당시 백인 학생들에게 중국인으로 오해를 받아 집단 구타를 당했다. 그 후 버지니아주 로어노크 대학으로 옮겼는데, 당시 그 학교를 다니던 김규식 선생과 교류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여사는 로어노크대를 방문, 의친왕과 김규식 선생이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의친왕은 또 1919년 11월 ‘대한민족대표 의친왕 등의 독립선언서’를 공표했다가 용산 조선군사령부로 끌려가 취조를 받기도 했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에는 고종·순종 황제가 모셔져 있는데,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능의 부속림 안에 의친왕과 의친왕비가 합장된 묘가 있다. 바로 옆에는 덕혜 옹주의 묘가 있다. 의친왕과 의친왕비의 합장은 쉽지 않았다. 원래 서삼릉에 버려져 있다시피 한 의친왕의 묘를 금곡릉(현 홍유릉)에 있던 의친왕비의 묘와 합장해 모신 것은 1996년. 이해경 여사가 당시 문화관광부에 탄원서를 넣고, 가족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이장을 마무리했다.

 이해경 여사는 무덤까지 함께 갈 동지가 없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린 것도 아닌데 돌아보니 독신으로 남고 말았다. 아주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6세 때 집안끼리 약속한 정혼자가 있었지만, “결혼은 내가 해서 사는 것”이라는 당돌한 주장으로 약혼을 파기시키는 데 ‘성공’했다.

●외롭지는 않으세요.

 “외로울 것도 없어요. 40년간 남자친구로 지내던 분이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한국에 영구 귀국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예전엔 그런 생각도 있었어요. 하지만 한국에 적응해 살기 힘들 것 같아요. 미국식으로 너무 오래 살아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