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53. 도끼사건 (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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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 1960년대 중반 덕수궁을 찾은 필자.

파출소 정문 앞에 결정적인 증거물을 '헌납'하고 돌아온 다음날 신문들은 '충정로 도끼사건'을 1면 머리기사로 뽑았다. 날이 시퍼렇게 선 손도끼 사진과 함께. 서울시경국장이 "반드시 색출하겠다" "엄벌하겠다"는 말을 써가며 강력한 수사 의지를 내비쳤다. 순찰 중인 경찰관에게 흉기를 던졌으니 묵과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당시 이정재는 집권당인 자유당의 감찰부장이었다.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이 앉힌 자리였다. 이정재가 경기도 이천에서 국회의원이 되려고 돈을 뿌려가며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를 탐낸 이기붕이 지역구를 빼앗는 대신 감투를 씌워준 것이다.

대대적인 검거 선풍 끝에 이화룡.신 상사.김 대위 등 네 명이 구속됐다. 그러나 이들이 '살인지령'을 내렸거나 행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리 없었다. 갖은 수를 써도 입을 열지 않자 검찰은 회유책을 썼다. 도끼사건 현장을 지휘했던 김 대위의 아버지는 경찰 간부 출신이었다. 검사는 그를 찾아갔다. "당신 아들에게 이화룡이 시켰다는 말만 하도록 하시오. 그러면 형을 면해 주겠소." 결국 아버지의 설득에 넘어간 김 대위가 실토하는 바람에 네 사람은 기소되고 말았다.

당시 이 사건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변호사 30여명이 이화룡의 무료변론을 자청한 것이다. 변호사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자유당의 횡포에 대한 저항'이라고 규정했다. 4.19를 앞두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팽배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교통부 차관을 지낸 문모씨는 이화룡이 대동청년단 등에서 활약하며 대한민국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증언해주기도 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화룡과 신 상사는 폭력교사 혐의로 각각 3년6월과 3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김 대위는 약속대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세상사는 정말 새옹지마(塞翁之馬)였다. 1961년 5.16 쿠데타 세력은 사회를 정화한다며 깡패.건달을 일소하겠다고 공언했다. 각지에서 끌려온 깡패들은 덕수궁 마당에 모여 공수부대원으로부터 호된 기합을 받으며 '갱생훈련'을 했다. 건달의 수뇌 격인 이정재와 임화수는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형무소에서 나온 이화룡도 덕수궁 마당으로 끌려갔으나 '정치깡패'가 아니었던 데다 당시 군대엔 월남한 사람이 많아 이북 출신인 그를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충정로 도끼사건 당시 지프에 탔던 나는 한동안 정보를 누설한 배신자를 찾으려고 혈안이 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하늘이 나를 도왔다. 그때 만약 정보가 새나가지 않아 계획대로 실행됐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모골이 송연해진다. 곧바로 4.19가 나고 5.16을 거치면서 타의와 강제에 의해서나마 손을 털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천운(天運)인지 모른다.

이화룡.이정재로 대표되던 건달 1세대의 퇴장과 함께 나의 명동 시절도 막을 내렸다. 20년대 미국 마피아였던 알 카포네를 다룬 영화 '알 카포네'의 마지막 장면에 이런 자막이 뜬다. '알 카포네는 사라졌지만 새로운 알 카포네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 사회에 어두운 구석이 있는 한 이를 먹고 사는 사람들도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리라. 안타깝게 한국도 마찬가지여서 반세기 전의 건달은 오늘날 '조폭'으로 새로 태어났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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