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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입맛대로’ 친일 인명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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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소위 민간 유지들이 경찰의 지휘로 팔에 누런 완장을 두르고 고함지르며 싸대고 있었다…(몽양 여운형도) 누런 완장을 두르고 거리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방공훈련 같은 때는 좀 피해서 숨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는 한심스러이 그의 활보하는 뒷모양을 바라보았다’(‘신천지’ 1949년 7월호).

민족문제연구소가 모레 4300여 명의 이름이 실린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다고 한다.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 맛보기로 발표된 명단에 따르면 친일파의 아들인 사위를 철저히 외면했던 인촌 김성수는 ‘친일파’로 낙인찍히게 된다. 일제 말 친일 강연을 했대서다. 여운형의 행각을 비판한 위의 글은 작가 김동인이 썼다. 여운형은 ‘반도학생출진보’ ‘경성일보’ 등에 징병권유문을 싣는 등 친일 증거가 뚜렷하다. “대동아는 우리 일본을 중심으로 건립되고 있다. 일대 결전은 동아 10억의 생존권 획득전이다. 피가 난무하는 중에 반도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고 외쳤던 여운형은 그러나 친일사전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일제 앞잡이 짓을 비판했던 김동인은 포함된다.

모레 발표될 명단에 이름이 오를지 궁금한 사람들이 더 있다. 북한의 친일인사들이다. 일본 관동군 통역으로 활동했던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 만주국 검사장 출신으로 검찰총장·김일성대 교수를 지낸 한낙규, 일제하 함흥철도국장이었다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이 된 한희진, 일본군 파일럿 출신으로 알려진 인민군공군사령관 이활 등이 그들이다(『쓸모있는 바보들의 거짓말』).

발목 잡고 물타기나 하려는 게 아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은 장장 8년에 걸쳐 진행됐다. 국민 세금도 적지 않게 투입됐다. 그렇다면 선정 기준부터가 국민 대다수의 공감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군인은 소위, 경찰은 경부 이상이라는 식으로 직위 위주로 따지다 보니 일제시대의 실상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명단에 포함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만군에 배속돼 1944년 7월 만리장성 너머 열하성 반벽산의 보병 제8단에 배치됐다. 주적은 중국 팔로군이었다. 그는 부관으로서 작전명령을 전달하고 부대 깃발을 관리했다. 여러 자료·증언을 종합하면 실제 전투에는 참가한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광복 직후의 반민법(反民法)은 ‘악질적 친일행위’를 단죄의 기준으로 삼았다.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각 부문에서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하기 위해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 지도한 자’를 처벌대상으로 명시했다. 광복 직후 온갖 증인과 자료가 넘쳐나던 그 시절, 선인들은 바보이거나 반일의식이 부족해서 기준을 직위 아닌 ‘악질성’으로 정한 것일까. 아니다. 일제시대의 생생한 실상과 내막을 몸으로 겪어 너무 잘 알고 있어서였다. 주익종(낙성대경제연구소) 박사에 따르면 일제 시절 한국인들은 한국인 관리가 더 늘어나고 고위직에 오르길 원했다. 일본인보다는 나았기 때문이었다. 일제 말 한국인의 체제내화(體制內化) 현상도 감안해야 한다고 주 박사는 지적한다. 만약 인도가 ‘친일사전’의 기준으로 ‘친영인명사전’을 만든다면 식민지 종주국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딴 간디와 네루도 영락없이 걸려들 수밖에 없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미래의 경계로 삼자는 게 친일사전의 취지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의 이데올로기 다툼과 정쟁(政爭)에 이바지한 꼴이 되고 말았다. 작업의 편향성, 자의성 때문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