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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엄마가 강남엄마를 따라잡아 보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6호 15면

“애를 왜 이렇게 방치해 두셨어요.” 학원 선생의 이 한마디면, 아무리 강철 심장을 가진 학부모라도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다. 나도 그랬다. 아이가 어렸을 땐 직장생활 때문에, 저학년 시절 땐 미국에서 지내 현실을 몰랐다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초등학교 내내 학원은커녕 문제집 한 권 제대로 사주지 않았던 나는 ‘간 큰 엄마’를 떠난 구제불능 엄마였다.
그러다 우연히 어머니회를 나가봤다. 이 ‘어머니회의 포스’, 엄청 셌다. 각종 소문의 공론화, 아파트 평수와 시세의 공개화, 왕따 학생과 선생님 지명화 등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 문화 충격 중에서도 아이들의 학원리스트 정보에 나는 거의 실신 직전의 쇼크를 받았다. 아이의 손을 붙잡고 처음 학원의 문을 두드렸던 이 엄마, ‘선행학습’이니 ‘7-가, 8-나’ 같은 용어 하나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며 엄마 자격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특목고 준비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며 입학의 선처를 내려주시는 학원에 그저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했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블로거들이 ‘인생 막장 드라마’라면서 하도 비난을 해대기에 찾아본 SBS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는 딱 어머니회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아빠는 경제력, 엄마는 정보력” 같은 상식적인 대화는 물론 “10억도 없이 강남 사는 미친X” 같은 유행어에 “그러다 우리애 실업계라도 가면 어떡할려고 그래”처럼 상대방의 입장이라고는 염두에 두지 않는, ‘올바르지 않음’에 대한 노골적인 당당함. ‘개천에서 절대 용 안 난다’며 대통령이나 교육부 공무원이 보면 펄쩍 뛸 만큼 강남과 강북의 학교 실력 차를 전제로 인정하는 용감함.

일러스트 강일구

‘강남 애들은 전부 명품 가방에 신발을 휘감고 다닌다’, 혹은 ‘강남 선생님들은 전부 촌지를 밝힌다’ 같은 다소 전형적이고 획일적인 묘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드라마 속의 여러 살풍경은 엄연한 현실이긴 현실이다. ‘말도 안 된다’고 욕하는 젊은 누리꾼에게 “너희들은 중ㆍ고생 애들이 없어서 몰라”라고 말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불륜이니, 사채니 하는 현실을 옥죄는 잠재의식 속의 불안감을 까발린 드라마가 속출하는 가운데 오랫동안 학부모의 머리를 짓눌러 왔던 교육문제에 대해 내놓고 이야기해 보자는 이 드라마의 시의적절함이 반갑기도 하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머리를 쥐어짜내도 도무지 실마리를 못 잡는 교육정책이나 입시정책처럼, 이 드라마 역시 노골적으로 드러낼 현실은 널려있다 해도 만족할 만한 결론이나 성찰은 내리기 힘들지 않을까 . 교육문제에 대해선 불륜문제나 돈문제처럼 어떤 방향이 좋다 나쁘다에 대한 사회적인 동의가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아예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같은 70년대식 모토로 키우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한.
그러니 이 드라마, 다녀오면 욕하게 되지만 또 궁금해서 다시 가게 되는 어머니회처럼, 보기엔 찝찝해도 남들은 어떻게 사나 싶어 힐끔힐끔 보게 될 것 같다. 나처럼 강남 근처에도 못 가는 시청자는 억대 빚을 내서 강남으로 달려간 주인공 하희라가 결국 다시 강북으로 와서 소박하게 아들 공부시켜 좋은 대학 보낸다는 결론이 나왔으면 싶지만, 그렇게 되면 드라마는 현실성이라고는 없는 판타지가 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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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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