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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4)제79화 육사졸업생들(167)|8기생들의 부침|장창국
「육사8기」라 하면 군인으로서 8기보다 정치인으로서 8기가 더 잘 알려져 있고 으례 8기하면 다 「정치와 관련이 깊은 인물」들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8기들 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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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1) 제79화 육사졸업생들|8기들의 민정참여
육사8기생 명부를 보면 62년말부터 63년말까지 준장으로 전역한 사람이 유난히 많다. 당시 정상적으로 진급한 8기생이면 최고가 대령까지 올라갈 정도였다. 그러나 이시기에 준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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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0) 제79화 육사졸업생들|8기주체들의 분열
공화당 창당파동을 겪으면서 박정희의장은 63년 3월16일 군정을 앞으로 4년 더 연장할 것이며 그 가부를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선언했다. 이무렵 최고회의 안에는 김형욱·홍종철·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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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9) 제79화 육사졸업생들(162) 친김·반김계의 싸움
63년 1월18일, 김종필씨를 중심으로 한 친김세력과 김동하씨를 중심으로한 반김세력, 그리고 민간세력이 합친 총 78명의 발기인으로 조선호텔에서 민주공화당 발기위원회가 열렸다.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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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8)제79화 육사졸업생들|최고위원들의 반발
최고회의 내부에서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의 독주에 대한 불만이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은 정치활동허용을 1주일 앞둔 62년 12월23일 워커힐 모임이었다. 당시 새로 지은 워커힐을 최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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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7)제79화 육사졸업생들|한·일관계 개선추진
민정이양 계획을 밝힌 소위 「8·12성명」 이후 김종필씨는 한일간의 관계개선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과거 자유당정권때나 민주당정권때도 일본과 관계개선의 필요성을 누구나 인정했으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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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육사 졸업생들(159)
장도영총장의 반혁명 사건으로 일단 5기생들이 물러나자 박의장과 김종필씨를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당시 논란이 되어 오던 군정기간문제를 일단 매듭지었다. 소위 박의장의 「8·12」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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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5) 제79화 육사 졸업생들(158)
5·16혁명 후 혁명 주도세력간의 균열이 처음으로 국민들에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장도영 등 44명의 반혁명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혁명주도세력으로서 5기생은 몰락하고 8기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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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육사 졸업생들(157)장창국-장 의장 권한 축소
김종필씨를 중심으로한 8기생의 독주에 대한 5기생들의 불만은 6월 3일 국가재건 비상조치법 등이 제안됐을 때 폭발됐다. 그동안 최고회의는 법적 뒷받침 없어 「최고회의령」에 의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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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육사 졸업생들(156)장창국-혁명주체간 불화
혁명 10일만에 최고회의에서 첫 소동이 벌어졌다. 5월 16일 발동했던 비상계엄령을 장도영 의장의 독자적 판단에 의해 27일 경비계엄으로 바꾼데 대한 최고 회의안의 내분이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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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9화 육사 졸업생들(155)장창국-혁명 성공 후의 8기
최고 위원 선출이 끝나자 최고 위원에 들어가지 못한 혁명 주체들에 대한 보직 인사가 단행됐다. 주요 시장은 장성급에서 맡았다. 서울시장에 윤태일 준장, 대구시장에 강?채 준장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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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들(3701) 제79화 육사졸업생들(154) 중앙정보부 조직
김종필씨가 5월19일 최고회의 첫 브리핑때 최고회의 밑에 중앙정보부란 직속기관을 두기로 했다는 보고를 하기 전에 김씨는 이미 중석조직을 서두르고 있었다. 혁명직후 당시 육본 정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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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9화 육사졸업생들|1군내 혁명세력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빠졌었는데 다시 1군사령부의 사정, 특히 8기생들의 활약을 중심으로 얘기하겠다. 군은 어디까지나 계급과 직위에 따라 명령·복종관계의 엄격한 조직체재하에 움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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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2)제79화 육사졸업생들(145)후방조직의 활약
서울이 6군단 포병과 해병대에 의해 장악될 동안 후방부대의 활약은 어떠했나를 샅펴보자. 후방조직은 박소장이 부사령관으로 있던 2군사령부가 중심이 되어 참모장 이주일소장(65·함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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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0)제79화 육사 졸업생들(143)공륜단 출동 지연
박 소장이 출동독려를 위해 김포 공수단으로 떠나자 길재호(60· 평북 영변· 6, 7, 8대 의원·8기) 유승원(62·인천· 8특· 전 국회의원· 인천시장) 강상욱(55· 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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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9)제79화 육사 졸업생들(142)-박정희 소장의 결단
박정희 소장은 김재춘 대령으로부터 출동가능부대가 공수단과 해병대뿐이라는 보고를 받고도 『그럼 되었어』라며 미동도 않은 채 작전변경에 몰두했다고 한다. 바로 이때 방첩대에서 혁명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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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7)제79화 육사졸업생들(140)-6관구 사령부의 혼란
30사단의 기밀누설로 출동 예정부대가 좌초위기에 놓인데다 6관구사령부와 33사단마저 혼미에 빠져들어 간다는 김재춘 6관구참모장(5기)의 다급한 보고를 받은 박정희소장은 예정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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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686)|제79화 육사졸업생들(139)|혁명전사
박정희소장의 신당동사택은 5월15일 아침부터 여러 장교들의 출입이 찾았다. 출동시간인 15일 밤 12시를 불과 몇시간 앞두고 최종협의와 출동전검결과 보고등을 위해서였다. 16일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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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제79화 육사졸업생들(138) 거사일 최종확정
「4·19계획」과「5·12계획」이 차례로 유산됐으나 거사추진에는 큰 동요 없이 박정희소장의 일정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당시 2군 부사령관이면 그는 2군참모장 이주일장군(7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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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79화 육사졸업생들(137)「5·12계획」실패
5·16직후에 나온 5·16관계 출판물의 내용에 대해 5기쪽에서는 불신이 대단하다. 거사를 성공으로 이끈 주요부분이 과소평가 되거나 생략되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강조됐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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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79화 육사졸업생들(136)거사추진
60년11윌 박정희 소장 자택에서의 모임인「신당동밀회」이후 8기 핵심멤버에 의해「혁명동지」로 포섭된 8기생들은 20명 가까이됐다. 6관구(서울)작전참모이던 박원빈중령 (61·함북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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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2)제79화육사졸업생들(135)-충무장 결의-장창국
「16인 하극상사건」이 일단락된 후 군내의 소강상태가 곧 이어 다가올 거대한 태풍전야의 고요라는 사실을 당시의 군 상층부에서는 모르고 있었다. 사건에 관련했던 영관장교들은 이번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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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79화 육사졸업생들(134)16인 하극상사건
송요찬 참모총장이 정군을 주도하다 구속된「8·8그룹」 (8기생 주동자8명)을 전원 석방함으로써 육본안에 술렁거리던 분위기는 일단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나 군 고위층에서는 육본의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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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79화 육사졸업생들(133)8기생의 정군 운동
4·19혁명후 육본안의 임관급 장교들 사이에 정군무드가 무르익어갈 무렵 가장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이 8기생들이었다. 1백20여명의 동기생이 육본이라는 같은 건물안에 근무했던 관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