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4)제79화 육사졸업생들(167)|8기생들의 부침|장창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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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육사8기」라 하면 군인으로서 8기보다 정치인으로서 8기가 더 잘 알려져 있고 으례 8기하면 다 「정치와 관련이 깊은 인물」들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8기들 중에는 군인으로 출세한 사람들이 많다.
군인의 최고봉인 대장까지 오른 사람만도 4명, 중장은 7명에 이른다.
이 같은 분포는 육사의 다른 어느 기에도 없는 파격적인 일들이다.
내 경험으로 보면 군인이 대령까지 오르는 것은 자기하기에 달린 것 같고 대령에서 별을 단다는 것은 운도 뒤따라야한다고 본다.
더구나 중장이상이 되는 것은 정치적인 힘도 작용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8기의 대장을 보면 우연인지는 몰라도 모두 79, 80년의 변혁기를 거치는 가운데 탄생했다는데 특징이 있다.
본인들이 들으면 약간 섭섭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이 분들은 변혁기 덕을 봤다고도 할 수 있다.
중장출신만도 7명이 되는 것을 보면 8기생의 숫자가 타기에 비해 엄청나게 많았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으나 8기들이 주름을 잡던 제3공화국시대에 그 덕을 전혀 보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유능」이라는 개념이 보는 측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유능=장군이라는 도식이 그대로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른바 유능한 인물들이 대령 혹은 그 이하 계급에서 전역을 한 경우도 없지 않다.
혁명직전 육본에서 동기생 중 가장 먼저 대령으로 진급했던 최준명씨(56·평북희천·농장경영)의 경우 혁명 후 대령으로 예편했는데 이밖에도 무한히 뻗어날 수 있었던 분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히 장도영씨 반혁명사건이나 박림항계 반혁명사건을 통해 나타났듯이 지방색도 승진과 관련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당시 「알래스카작전」이라는 낱말이 나올 정도로 서북세력이 퇴조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8기생 중 별을 단 사람은 모두 1백10명이었다.
대장과 중장 등 11명을 빼고는 모두 소장·준장 출신이다.
장성급에 한해 얘기하자면 아까운 분들이 많지만 더 클 수 있었는데 정치적 상황 때문에 좌절된 사람은 윤필용장군과 이재전 장군을 꼽을 수 있다.
윤 장군은 61년 육군대학시절 혁명사전계획에 참여해 혁명직후 최고회의의장비서실장을 잠시 하다 군으로 복귀, 62년 연대장을 시작으로 방첩부대장을 거쳐 주월 맹호사단장을 지냈고 주요 요직이라는 수도경비사령관(70년)을 지냈다.
그는 8기생 중 가장 먼저 소장에 진급함으로써 당시는 장차 참모총장감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73년 3윌 당시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독직 등 죄목으로 15년을 선고받아 복역하다 75년 출감했다.
당시 이사건의 반대입장에 서 있던 인물이 동기생이며 그때 보안사령관인 강창성 소장(56·포천)이었다.
강 소장은 그후 3관구 사령관을 지내다 중장으로 예편, 10·26전까지 항만청장을 지냈으나 그후 영어의 몸이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윤장군은 80년 도로공사 사장으로 취임, 현재에 이르고 있어 인연의 묘함을 느끼게 한다.
또 한사람은 이재전장군(56·천안·예비역중장)이다. 이 장군은 제3공화국 말기 유능한 장군이 거쳐야 한다는 청화대 경호실 차장으로 있다가 10·26사태가 나는 바람에 옷을 벗은 사람이다.
이장군도 당시 참모총장까지 올라갈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했었는데 중도하차를 한 것이다.
영어가 유창한 이장군은 옷을 벗은 후 현재까지 집에서 쉬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말년에 빛을 본 사람도 있다.
김종호 현 건설장관(57·전남광양)이 그런 케이스라 본다.
김장관은 국방부군수국장·군수차관보 등을 거쳐 74년 소장으로 예편, 호남재벌인 금호산업사장을 맡았다가 80년 변혁기 이후 전남 도백으로 발탁돼 장관까지 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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