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0) 제79화 육사졸업생들|8기주체들의 분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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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공화당 창당파동을 겪으면서 박정희의장은 63년 3월16일 군정을 앞으로 4년 더 연장할 것이며 그 가부를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선언했다.
이무렵 최고회의 안에는 김형욱·홍종철·길재호씨를 중심으로 하는 강경파와 유양수·박태준·유병현씨 등 온건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강경파들은 김종필씨의 외유, 4대의혹사건에 대한 김재춘중정부장의 추적 등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을 즈음이어서 이들은 김동하·박림환사건 등을 예로 들며 군내부의 동요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박병권국방장관이 계엄선포를 반대하자 3월15일에는 현역장교 60명과 사병 30여명이 최고회의 청사 앞에서 『국방장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이밖에 『비상계엄 선포하라』 『군정을 연장하라』 『박의장을 민정에 참여시켜라』는 등 군인 신분으로서는 격에 맞지 않는 구호를 외치다 김진장수도경비사령관의 저지를 받고 해산됐다.
이 데모 다음날 박의장의 군정 4년연장 선언이 나온 것이다.
이 선언은 재야정치인과 미국측의 반발을 사 결국 그 내용을 다시 번복하는 「4·8」조치를 발표했다.
즉, 군정연장에 대한 국민투표를 9월말까지 일단 보류하고 정치활동도 재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와함께 박의장은 『자유민주세력이 뭉친 범국민적 정당이 필요하다』는 구상을 밝혔고, 이 구상을 실현시킬 정책소위원회를 최고회의 안에 구성했다.
박의장은 소위원장에 유양수최고위원을 임명하고 위원에 길재호·홍종철씨 등 강경파와 유병현·박태준씨 등 온건파를 골고루 기용했다.
박의장은 출발부터 문제가 많은 공화당대신 김재춘중정부장의 지원하에 새정당을 만들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같다.
박의장의 「범국민적정당」 발상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자민당.
그러나 자민당이 기대했던 것만큼 참신하지도, 구성인원도 시원치않자 박의장은 공화당에 의해 선거를 치르기로 마음을 굳히게 된다.
자민당을 만든 김재춘씨는 7월12일 중정부장을 물러났고, 그 후임에 김형욱최고위원이 임명되었다.
김재춘씨는 무임소장관에 임명됐으나 곧 사퇴하고 자기가 만든 자민당최고위원이 됐다.
그러나 4일만인 9월7일 『정치와 일절 손을 끊겠다』고 선언하고 김종필씨와 비슷한 케이스의 외유에 올랐다.
이런 소용돌이에 앞서 8기 주체들간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최고회의 안에서 강경파였던 김형욱·홍종철·길재호씨 등 소위 「김홍길」라인은 공화당안의 8기생인 김동환사무총장·신윤창사무차장·오학진씨 등과 연결되어 소위 공화당을 지지하는 친김종필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반면 8기 주체가운데 오치성·박원빈·조창대·이종량·장동운씨와 9기생 강상욱씨가 중심이 되는 반김종필계는 그들대로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이들은 「오월동지회」라는 정치색 짙은 친목단체를 중심으로 집결되었다.
이 오월동지회는 최고회의 안의 온건파인 유양수·박태준씨 등 장성급들과 손을 잡고 박의장이 김종필씨에 대해 갖고있는 애정을 돌려놓으려고 애썼다.
반김종필계인 이들은 63년 6월13일 오월동지회 창립대회를 열고 정치단체가 아님을 천명하고 회장에 박정희의장을 추대했다. 이들은 본격적인 정당조직을 위해 재건국민운동본부에 손을 뻗었다.
당시 재건국민운동본부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은 애당초 정치에 뜻이 있었으나 공화당 쪽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때여서 공화당의 김종필계에 대한 반감이 컸다.
오월동지회의 정당구성 제의가 있자 일부 재건국민운동 시·도지부장급 인사들이 오월동지회에 대거 가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충남지부장이었던 최명혜중령(현 국회의원), 경기지부장 이명춘중령(전 국회의원), 충남지부장 정내창씨, 전북지부장 김유성씨 등이 오월동지회에 가입했고 군·읍·면의 운동원도 함께 가입했다.
그러나 박의장이 『재건국민운동 요원은 오월동지회에 가입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음으로써 그들의 뜻은 또한번 좌절됐다.
후에 오치성·이종근·조창대씨 등은 공화당의 비례대표로 6대국회에 들어갔으나 박원빈·장동운씨 등은 계속남아 오월동지회를 지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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