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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2)제79화 육사졸업생들(145)후방조직의 활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서울이 6군단 포병과 해병대에 의해 장악될 동안 후방부대의 활약은 어떠했나를 샅펴보자.
후방조직은 박소장이 부사령관으로 있던 2군사령부가 중심이 되어 참모장 이주일소장(65·함북경성·대장예편·전감사원장)의 지휘로 움직였다. 박소장보다 만주군관학교 1기 선배인 이소장은 이미 7특에 소개한바 있다.
이소장의 참모역할을 맡았던 인물은 2군 공법참모 박기석대령(55·평남 5기)과 통신참모 박승규대령(3기·작고)이었다.
2군사령부는 서울 중앙지휘부가 정보 누설로 우왕좌왕하던 때 예정대로 16일 새벽3시 정시에 출동했다.
우선 박통신참모 지휘로 육군본부와 기타사령부로 통하는 통신망을 절단하고 대구전화국·도경통신시실 기능을 정지시키고 각 교환대를 감시했다.
이어 공병대대를 중심으로 한 행동대가 출동 새벽3시40분에 경북도청·도경·대구경찰서등을 점령했다.
아무런 방비도 없었던 때라 쉽게 점령됐다는 것이다.
경북도청에서는 당직간부가 당황하자 『우리는 적색게릴라부대가 아니고 비상훈련중인 국군이니 걱정말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접수부대지휘관의 지휘를 받으라』고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어 동대구 남대구경찰서와 도지사 관사등을 차례로 점령 대구지구는 단한번의 충돌없이 평온하게 점령이 끝났다.
모든 전화선을 절단시켜 놓고 이주일소장집과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을 연결하는 1회선만 살려놓아 대구수뇌전들은 서울의 소식을 시시각각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구지구의 접수가 이미 끝난 시간에 서울에서는 제1한강교에서 진압군과 교전중이라는 소식이 들어와 암담한 분위기에 휩싸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구지구 행동대 지휘관으론 공병대대장급에 8기생이 많았다.
직접 대대를 이끌고 출동했던 핵심멤버가 장동운중령 서상린중령 임광섭중령 등으로 모두 8기생이었다. 당시통신대대장 성도환중령(통신교출신·작고) 김진국중령등도 역할이 컸다.
대구시내를 완전히 점령한 다음 핵심멤버 몇사람이 2군사령관인 최경록중장(63·음성·군영·현주일대사)의 침실을 찾았다 군사령관에게 먼저 알리지 앉고 행동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혁명을 지지해 줄것을 호소했다.
최중장은『군인으로서 정치에 가담하는 것은 가능한한 피해야 하는데 』라며 승낙도 반대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였다는 것이다.
최중장은 16일 상오와 하오에 걸쳐 자신의 지휘권에 속해 있던 후방사단들 가운데 혁명군으로 출동한 부대들에 철수할 것을 수차례 지시하다 대세가 기울자 하오5시가 넘어서야 혁명지지로 돌아섰다고 한다.
공병참모였던 박기석대령은 혁명후최고위원을 거쳐 공병출신답게 건설장관 (61년) 을 거쳐 주공사장 (63년)을 역임한뒤 65년 준장으로 예편, 원호처장과 도공사장등을 지냈다.
박승규통신참모는 혁명후 조폐공사사장을 맡았다가 63년 소장으로 예편, 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으로 6대국회의윈(장성-담양)에 당선됐으나 7대때 공천에서 탈락,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되기도 했다.
8기생인 장동운중령(56·황해재령)은 63년 8기생이 많이 예편할때 준장으로 예편해 주공총재를 거쳐 공화당 초대사무차장이 됐다. 그러나 반김종필계로 공화당을 떠나 반대세력인5월동지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후 원양어업협회이사장 원호처장등을 지냈다.
서상린중령(57·안성)은 62년 준장으로 예편, 외자청 부산사무소장 강생회회장을 거쳐 6대의원(용인-안성)으로 당선, 5공화국전까지 줄곧 의원직을 가졌던 5선의원이다.
그는 개인전을 열 정도로 그림실력도 수준급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임광섭중령 (55·황해황주)은 대한해운공사사장을 맡았다가 63년 준장으로 예편했다. 그후 동아선박 원양수산사장등을 맡았고, 그후 사회봉사활동에 관심을 보여 보이스카우트사무총장 부총재 등을 지냈고 혁명직후에는 적십자 최고위윈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동화작가로 동화집 「단물샘」을 냈는가 하면 『인간개발과 조화』『약동하는 새길』등을 출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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