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8)제79화 육사졸업생들|최고위원들의 반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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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최고회의 내부에서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의 독주에 대한 불만이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은 정치활동허용을 1주일 앞둔 62년 12월23일 워커힐 모임이었다.
당시 새로 지은 워커힐을 최고위원에게 선보일겸 만찬을 겸한 모임에서 김종필 중정부장과 이영근중정차장은 그동안 비밀리에 사전조직해온 신당(후에민주공화당)창당계획안을 브리핑했다.
최고위원들은 일찍부터 김종필팀이 이런 조직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철저하게 소외당한데 대한 참았던 불만이 이 자리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 불만은 김종필씨가 최고회의와 아무 상의없이 당사무조직 우위의 2원조직을 꾀했다는 대목을 물고 늘어지면서 터진 것이다.
2원조직이란 당사무국과 원내대의기구를 별개의 기구로 만들어 2원화시키고 당사무국이 원내기구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선거도 당사무국조직에 의해서 치르고 국회의원은 철저하게 당의 규제를 받도록하는 한편 권력구조도 행정부와 국회에 대해 당우위를 견지토록 짜놓았다. 그런데 이것이 최고위원들의 이해와 엇갈리는 대목이었다.
민정으로 이양하게 되면 최고위원들은 모두 옷을 벗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해야 하는데 이제도가 국회의원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김종필씨를 중심으로 이미 당의 사전조직이 되어 있어 그 조직이 모든 권한을 가지면 후에 참여하는 최고위원들은 허수아비가 되는 꼴이 아니냐는 불만이었다.
즉, 민정이양후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이냐를 놓고 벌이는 권력싸움의 시발이었다고 볼수 있다.
『이 기상천외의 조직을 도대체 누구 마음대로 구상, 추진해 왔느냐』는 질문이 나오면서 제2, 제3의 질문과 울분이 쏟아져 나왔다.
『목숨을 걸고 한강을 넘었는데 행동을 같이해야지 동지들 몰래 혼자 당을 하겠다는 것이냐』『결국 너희들끼리 독차지하겠다는 뜻 아니냐』는 공격에 『비밀리에 하자니 어쩔수 없는 준비작업이었다』 『독차지가 아니라 모두 같이 신당을 하자는 것』이라는 반론이 맞섰다.
마침내 분을 참지 못한 혈기왕성한 최고위원들중 몇몇은 탁상을 치며 고함을 지르는가하면 유리컵을 던지고 접시를 날리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혁명주체세력간에 되돌릴 수 없는 균열이 이미 깊숙이 파이고 있었으나 그때까지 기회가 없어 표면화되지만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신당의 2원조직으로 인한 주체세력간의 내홍이 해결되지 않은채 해를 넘기게 됐다.
63년 1월1일 많은 기성 정치인들이 정정법에 묶인 채 드디어 정치활동이 재개되었다.
신당의 사전조직을 주도했던 김종필 중정부장도 정당의 울타리로 들어올 때가 된 것이다.
김씨는 1월6일 민주공화당 창당을 위해 중앙정보부장직을 사퇴하고 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됐다.
중앙정보부장 후임에는 김용순최고위원이 임명됐다.
김용순씨가 중정부장으로 임명된데는 김씨가 원만한 인품에 친김종필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김동하·김재춘씨를 중심으로 하는 반김종필계도 아닌 중도파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김씨는 그후 약 40일동안이라는 최단기간의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다 반김종필계의 김재춘씨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당시 세력간의 갈등이 중정부장이라는 핵심적인 자리를 중립적인 인사에게 맡기도록 허용치 않았으리라 보여진다.
김종필씨의 예편후에도 최고회의 내부에서는 김동하씨를 중심으로 한 반발이 멈추질 않았다.
이런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는 반김종필계도 민주공화당창당에 직접 뛰어들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의장은 김동하최고위원에게 『종필이를 아우처럼 여기고 잘 협조해 나가도록 하라』는 당부와 함께 반김종필계인 김동하·김재춘·강상욱·오정량최고위원과 김종필계의 이석제최고위원을 예편시켜 민주공화당발기에 참여토록 했다.
63년 l월15일 김동하씨는 해병소장에서 중장으로, 김재춘씨는 준장에서 소장으로, 이석제씨는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편됐다.
창당 발기인이 된 반김씨계 인사들은 민주공화당을 김종필씨측 플랜대로 내버려둔다면 자유민주주의를 희구하는 국민을 배반하는 결과를 가져올뿐 아니라 김종필씨 사당화가 된다고 주장, 정면으로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계속><장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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