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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80화 한일회담(128)|김동조|조병옥의원 발언 파문

    조총련이 일본좌익계열과 손을 꽉 잡고 북송음모를 격렬하게 획책하고 있을때 우리 재일거류민단은 10월 9일 조총련의 공작을 저지키 위한 대책으로 「북한강제노동자모집방지대책위」를 구성

    중앙일보

    1984.01.31 00:00

  • (3924) 제80화 한일회담(123) 어업협정 난항

    「다울링」 주한미대사는 9월11일 내방으로 찾아와 조총련의 움직임에 관해 중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맥아더」 주일미대사가 보낸 전문을 먼저 읽어주었다. 『조총련은 한일회담을

    중앙일보

    1984.01.25 00:00

  • (3923) 제80화 한일회담(122) 미대사의 고자세

    58년 9월11일 하오 나는 「다울링」주한미대사와 2시간여에 걸쳐 한일회담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다울리」대사도 「맥아더」2세 주일미대사와 비슷한 견해였는데 그에 앞서 50년대

    중앙일보

    1984.01.24 00:00

  • (3922) 제80화 한일회담(121) 친공계교포 가석방

    북송희망의 친공계교포 가석방문제로 한일회담은 재개된지 3개월만인 7월 하순부터 사실상 중단상태에 빠졌다. 정부는 그러나 8월초 가석방 절대반대 입장에서 일보 후퇴,「기시」수상의 어

    중앙일보

    1984.01.23 00:00

  • (3921) 제80화 한일회담(120) 재일교포 국적·처우|김동조

    회담은 재개됐는데도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예컨대 1, 2, 3차 한일회담을 통해 상당한 쟁점이 해소됐던 재일교포의 국적 및 처우에 관한 문제만 해도 원점에서만 맴돌뿐이었다. 일본

    중앙일보

    1984.01.21 00:00

  • (3919) 제80화 한일회담(118) 한일의 「자중지란」

    제4차 한일회담이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던 58년 6월중순과 7월초에 걸쳐 한일양측이 다같이 곤욕을 치르는 자중지난의 소동이 벌어졌다. 일본측의 「사와다」수석대표는 6월16일 은

    중앙일보

    1984.01.19 00:00

  • (3918) 제80화 한일회담(117) 회담 진행 부진

    제4차 한일회담은「기시」수상의 적극적인 대한관계개선 의향에 따라 실로 4년반 동안의 결렬끝에 재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진척이 안되는 지지부진한 양상을 면치 못했다. 산 넘어

    중앙일보

    1984.01.18 00:00

  • (3913)회담의 지연-제80화 한일회담(112)

    나는 58년4월말 우리측 대표단과의 협의를 위해 동경에 갔다. 한 열흘 머무르며 회담결과를 지켜보는데 이야말로 느림보 회의운영이 아닐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기시」수상의 적극자세로

    중앙일보

    1984.01.12 00:00

  • (3912) - 제80화 한일회담(111) 4차회담 개막

    「기시」일본수상의 친서로 한결 누그러진 한일양측은 4월15일 제4차한일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나는 4월13일 임병직수석대표등 대표단에게 다시한번 우리측 입장과 일본측 주장을 상세

    중앙일보

    1984.01.11 00:00

  • (3908) 제80화 한일회담(107)-합의문서 조인

    제4차 한일회담을 열기 위한 정지작업은 57년12월31일 자정을 넘길 무렵 겨우 마무리됐다. 김유택주일대사는 이날 초저녁「후지야마」(등산애일랑) 일본외상이 합의문서 조인에 앞선 협

    중앙일보

    1984.01.06 00:00

  • (3900)제80화 한일회담 (99)-일의 평화선 인정

    한일예비회담이 본격적으로 가동한 56년5월 이후 양측 사이에 첨예한 대립을 보인 문제는 이미 지적했듯 일본의 평화선 인정과 대한재산청구권철회 문제였다. 이미 억류자 상호석방에 관해

    중앙일보

    1983.12.23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80화 한일회담 (98)|일의 대한교섭 태도

    한일예비교섭은「기시」일본수상의 적극적 자세로 종래의 실무자급에서 각각 김유택 대사와「오오노」(大野)일본외무성차관을 수석으로 하는 회담으로 격상되어 진행됐다. 「기시」수상은 5윌14

    중앙일보

    1983.12.22 00:00

  • (3898)제80화 한일회담(97)김대사, 일수상면담

    대사로 내정된 김유택경제고문이 5윌1일 부임하자 3년여이상 동결됐던 한일관계는 한층 타결점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고문은 부임하자마자 석정국무상·석전내각관방장관등을 부지런히

    중앙일보

    1983.12.21 00:00

  • (3893)제80화 한일회송(92)

    한일회담이 교착된 55, 56년 2년간 나는 이대통령의 엄명에 따라 주한미대사관측과 한미우호통상및 항해조약체결에 진력해 56년 가을에는 그 서명절차만 남겨두었다. 이대통령은 그 조

    중앙일보

    1983.12.15 00:00

  • (3890) 제80화 한일회담(89) 상호석방교섭

    한일회담이 중단된 53년부터 56년까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어선의 나포수가 가장 많았다. 53년 47척 5백85명 54년 34척 4백54명 55년 30척 4백98명, 56년 19척

    중앙일보

    1983.12.12 00:00

  • (3889) 제80화 한일회담-인질외교

    한일회담이 중단된 50년대 중반의 4년동안 양국간을 숨가쁘게 긴장시킨 것은 이른바 인질외교였다.우리가 평화선을 침범하는 어선과어부를 나포하고 일본은 한국인 밀입국자단속을 강화한 것

    중앙일보

    1983.12.10 00:00

  • (3888)|제80화 한일회담(87)-가천씨와 서신교환

    이대통령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어민들의 체포를 대한 악선전에 이용하는 일본의 계략을 분쇄하기 의해55년말과 56년초 외신회견에 열정을쏟았다. 특히 「가가와· 도요히꼬」 (가천풍언)

    중앙일보

    1983.12.09 00:00

  • (3887) 제80화 한일회담 대일 경제단교

    정부가 「하또야마」 수수정권의 극렬한 반한정책에 맞서 지난 회에서 언급한바와 같은 보복책을 고육지책으로 내놓긴 했으나 그것은 근본적인 보복책이 될수 없었다. 당시의 언론들은 정부가

    중앙일보

    1983.12.08 00:00

  • (3884)독도 학술조사-제80화 한일회법(83)

    우리가 해방이후 독도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된 것은 47년께부터였다. 당시 군정청 민정장관이었던 민세 안재홍선생은 한국산악회에 독도에 대한 학술조사를 하도록했다. 제1차학술조사단에

    중앙일보

    1983.12.05 00:00

  • (3882), 제80화 한일회담-독도분쟁

    일본은 52년 1월28일 우리의 평화선선포에 항의해 독도문제를 제기한 이래 지금까지 총 53회에 걸쳐 우리 정부에 이의를 제기해왔다. 해마다 평균 두번이상 항의해 온 셈이다. 이같

    중앙일보

    1983.12.02 00:00

  • (3880)제80화 한일회담(79)-김동조

    최근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가요가 널리 애창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나도 방송을 통해 이 노래를 몇번들었는데 그때마다 나로서는 남다른 감회에 젖게된다. 지금

    중앙일보

    1983.11.30 00:00

  • 제80화 한일회담 일의 무력시위

    한일회담이 일본측의 무성의와 고압적 자세로 표류하고 있는동안 평화선 안의 어로문제는 한층 합일양국의관심의 초점으로 부각됐다. 우리 정부는 53년9월9일 수산업의 기본법인 수산업법을

    중앙일보

    1983.11.28 00:00

  • (3876) 제80화 한일회담(75)-일본의 양면성

    일본측은 미국의 활발한 회담재개노력에 맞장구를 치는 듯 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그 특유의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내 우리측을 격분시켰다. 지금은 한일관계를 역대의 어떤 시기보다 좋게

    중앙일보

    1983.11.25 00:00

  • (3875)일본의 속셈-제80화 한일회담(74)

    회담은 결렬됐다. 그러나 어느 쪽도 끝내기만은 상대방에게 미루고 짐짓 언제든지 회담은 재개될 수 있다는 듯 뒷짐을 지고 있었다. 『상대방이 성의를 보인다면 회담재개에 응할 수 있다

    중앙일보

    1983.11.2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