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8)제80화 한일회담(97)김대사, 일수상면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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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대사로 내정된 김유택경제고문이 5윌1일 부임하자 3년여이상 동결됐던 한일관계는 한층 타결점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고문은 부임하자마자 석정국무상·석전내각관방장관등을 부지런히 만나 새로운 한일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의욕이 어느정도였는지는 부임 5일만에 내게 보낸 사신에서 잘 나타난다.
『지난 3일 차관으로 승임하게됐다는소식을 듣고 예정됐던 일이지만 막상 결정이되니 무한히 기뻤읍니다.(중략) 내일후 유태하참사관과 협력하여 관계방면과 절충하고 있읍니다.
김용식공사와 유참사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하고 그들의 노력을 계승해갈 경우 상당한 성과가 있을것으로 기대되나 요는 본국정부의 방침이 문제일것입니다. (대사)발령이되면 공식으로 절충해 어느정도의 진전을 가지고 본국으로 갈까하는데 대체 어느정도의 시일이 소요될는지는 발령일자에 달렸으나 20일경이 될까하오며 6월15일까지는 꼭(대사정식발령에 대한)결론을 내도록하는 방면으로 추진해주시기 바랍니다』 김고문이 5월20일께는 회담에 관한 상당한 진전을 가져갈 터이니 6월15일까지는 꼭 대사발령이 나도록 추진해달라고 부탁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첫째 「기시」정권 등장이후 한일실무자들은 한일회담 재개를 위한 상당한 정지작업을 끝낸 상태였고, 둘째 「기시」수상이 6월16일 방미에 나서기때문에「기시」수상으로서도대미관계상 방미전에 한일간의 분규를 타개하겠다는 결의를 피력한 바 있어 김고문은 그 점을 최대한 이용하려 했던것이다.
5월3일 차관승진 발령을 받았던 나는 김고문의 요망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조장관과 경무대 박찬일비서관등에게 조속한 시일내에 김고문의 대사임명필요성을 역설, 그들이 이대통령에게 진언토록했다.
김고문의 대사방령은 5월중순에 이뤄져 20일에는 「기시」수삼을 예방했다. 김대사는 『수상께서 미국에가신다고 들었는데 수상의입장으로 보아 한일관계에대해서도 어떤 결과를 가지고 가야할게아닙니까. 내가 솔직하게 말하오만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양국간의 장래를 좌지우지할수야 있읍니까』하고 한일현안의 조속한 타결에 성의를 보이라고 촉구했다고 한다. 당시까지 외상을 겸직하고 있던 「기시」수상도 『그것 참 옳은 얘기입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기전에 모든것이 타결되도록 협조하라고 외무차관에게 지시하겠소』하고 흔쾌히수락했다고 들었다.
이래서 교섭은 급속도로 진전됐는데, 그때까지의 진척된 교섭상황을 짚고 넘어가야 되겠다.
「기시」정권 발족후 양자간의 교섭은 상호억류자 교섭문제는 물론이려니와 억류자 문제해결과 동시에 제4차 한일회담을 열기 위한 예비교섭의 성격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쌍방은 제4차회담이 열리면 또 번거롭게 원칙문제를 두고 지리한 논전을 벌일게아니라 아예 예비교섭에서 양측간의 팽팽한 이견을 보이고 있는△일본의 대한사유재산 청구권주장△「구보따」망언△평화선문제등에 대해 어떤 해결을 짓자는데 합의했다.
본부의 훈령, 다시 말하면 이대통령의 지시는 일본이 그 세가지 문제에 대해 모두 양보토록 해야한다는것이었다.
그러니 이 교섭의 책임자인 김용식공사와 막후협상자인 유참사관의 고생은 이루 말할수없었고 본부 또한 이대통령의 예봉과 질책을 듣기일쑤였다.
이대통령은 동경에서 갖은 애를다써 「구보따」망언을 취소한다는 일본의 방침을 받아오면 대한재산청구권포기를 얻어내라고 불호령을 내리고 그것이 어느정도 합의되면 또 평화선을 인정토록 하라고 요구하기 일쑤였다.
일본측은 우리측의 주장이 하나씩하나씩 늘어나는것을 보고는 이미 합의해 주었던 쟁점에 대해서마저 오리발을 내미는 교섭기술을 구사해 우리측의 의도를 견제했다.
말하자면 양측간에는 회담재개를 위한 합의선을 줄타기 하듯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그런 상황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사가 「기시」수상을 예방해 단숨에 돌파구를 뚫으려는 자세를 보인것이고 「기시」수상 역시 그에 동의했던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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