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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하무인 차지철(청와대비서실:13)

    ◎사설정보팀 두고 2인자 행세/중정 김재규와 마찰 대통령 직접보고/매주 열병식 열어 요인들 초청 기죽여 73년 3월 윤필용사건과 그해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겪으면서 윤필용 수경사

    중앙일보

    1991.02.08 00:00

  • 윤필용 비밀요정서 『박대통령 노쇠… 』(청와대비서실:8)

    ◎골프장서 듣고는 박정희 “누구냐”노기/육여사,잦은 남편외박에 박종규 질책 박종규가 여자문제로 인한 박정희·육영수 부부간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중앙정보부장이

    중앙일보

    1991.01.04 00:00

  • 2인자 암투… 서리맞은 윤필용(청와대비서실:6)

    ◎이후락과 “후계자 운운”하다 철창행/박정희 눈밖에 나… 박종규에 KO패 독재권력자가 권력을 쥐고 있는 동안 2인자를 키워 권력을 나누어주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통해 별로 없다. 집

    중앙일보

    1990.12.21 00:00

  • (5)박종규, 경호 방해되면 장관도 구타

    박정희 대통령 집권 18년 동안 그의 개인적 신임과 총애가 변치 않았던 부하 셋을 고른다면 박종규·차지철, 그리고 김정렴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박대통령은 이후락에 대해 지모

    중앙일보

    1990.12.14 00:00

  • 박정권 고비 때마다 이후락 활약(청와대비서실:4)

    ◎71년 대선 앞두고 정보부장에 컴백/「윤필용사건」 이후 급격히 내리막길 절대권력자 박정희 대통령을 보위했던 3공의 실력자들은 각기 다른 스타일로 최대한의 충성경쟁을 벌였다. 최고

    중앙일보

    1990.12.07 00:00

  • 정치자금 25% 「떡고물」 챙긴 이후락(청와대비서실:3)

    ◎군납·외자도입때마다 거액 커미션/72년 중정부장때 재산 2백억 넘어/이후락 실장/“여비서 구속했다” 김형욱에 총 겨눠/경남대와 마산MBC 헐값 매입도/박종규 실장 박정희 정권의

    중앙일보

    1990.11.30 00:00

  • 이후락,「피스톨 박」과 잦은 티격태격(청와대비서실:2)

    ◎직선적인 박종규 사사건건 시샘/제갈조조 별명… 「박정희 심복」 경쟁/한때 5·16 주체들이 음해… 정치적으론 고독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청와대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은 업

    중앙일보

    1990.11.23 00:00

  • 연재를 시작하며… (청와대비서실:1)

    ◎“내각속 내각” 정치명암 재조명 제3공화국 이래 대통령중심제를 하면서 우리나라를 움직여온 중요기관을 꼽으라면 여당·내각·중앙정보부(안기부)·대통령비서실·경호실 등을 들 수 있다.

    중앙일보

    1990.11.19 00:00

  • (8)권력형 축재 12·12 후 본격 내사

    권력형 부정축재자 「처벌」문제는 10·26 직후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에 의해 제기돼 12·12로 힘을 장악한 뒤인 79년 말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됐다. 이때는 공화당 정풍

    중앙일보

    1988.05.12 00:00

  • (4)

    12·12사태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5·18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 광주사태, 국보위발족을 거쳐 제5공화국을 출범시킬 때까지의 주역은 3장군과 대령들이었다. 모든 일이 치밀한

    중앙일보

    1988.04.21 00:00

  • 정구영회고록(18)-「실패한 도전」2부

    65년 12월의 국회의장단 선거는 무려 일곱차례 표결을 했다. 공화당 총재인 박대통령은 이효상의장을 재선출토록 지시했으나 구주류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초 박대통령은 2년전의

    중앙일보

    1986.08.08 00:00

  • (6)「실패한도전」2부

    『저도해수욕장에서 대통령과의 모처럼의 간담이 있었다. 그날 저녁 이후락실장과 기자 둘은 진해에서 저녁식사를 같이했다. 그 무렵은 정구영의장등 공화당 일부에서 뚜렷한 이유도 없이-기

    중앙일보

    1986.04.23 00:00

  • 정구영 회고록 「실패한 도전」2부

    6·3계엄사태를 극복하는 정치협상은 정당간의 정상채널이 아닌 은밀한 막후 접촉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내는 정치파동의 원인이 되었다. 계엄해제의 전제가 된 이른바 보장입법의 하나인

    중앙일보

    1986.04.17 00:00

  • 정구영 회고록 「실패한 도전」2부

    다시 청와대와 공화당 사이의 문제-이후락 비서실장의 퇴진 압력으로 돌아가자. 청와대 비서실장의 교체문제는 특정인의 거취문제로 보면 작은 문제다. 그러나 그 무렵 이 문제는 한사람의

    중앙일보

    1986.04.15 00:00

  • 정구영 회고록(2)|「실패한 도전」2부

    공화당의 정구영 당의장 체제 때는 정부 여당의 밀월이기보다는 공화당의 정부 견제가 두드러 진다. 정당의장이 청와대 비서실을 개편하고 그 역할을 사무적 기능의 틀 속에 묶으려 한 노

    중앙일보

    1986.04.12 00:00

  • 실패한 도전정구영비망록|〃각하, 정치자금엔 개입마십시오〃

    군정주체 몇사람들만의 집권체제 편성-이것은 공화당 정부가 국정은 물론 당운영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지 못하는 불행한 출발이 되었다고 정구영은 회고했다. 제3공화국 초대내각은 정구영의

    중앙일보

    1984.07.07 00:00

  • 청와대 빈소에 애도의 행열|유족오열속 오늘 새벽 입관

    청와대는 28일 본관 대 접견실에 마련한 빈소에서 조객을 받았다. 상오 9시20분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 부처를 선두로 신두영 감사원장 등 감사원간부, 백두진 국희의장과 국회사무처

    중앙일보

    1979.10.28 00:00

  • 총선 조감(4)|주목받는 지구(상)

    10대 총선에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여권인사들이 총출동하는 「올스타」전-. 경남을 예로 들더라도 『동부(울산-울주)의 이후락, 남부의 김택수 (김해-양산) , 중부의 박종규(마산-창

    중앙일보

    1978.11.18 00:00

  • (6)경남

    한때 권부와 정계를 주름잡던 많은 거물을 배출한 경남-. 김택수 (공화 원내 총무 역임·대한 체육 회장·김해), 구태회 (국회부의장·진주), 최치환(국회건설위원장 역임·남해)씨 등

    중앙일보

    1978.06.21 00:00

  • 나더러 1억불 가져왔다는데…김형욱씨 증언내용

    「프레이저」=박동선 씨를 아는가. 김형욱=알고있다. 「프레이저」=언제 그리고 어떤 경위로 그를 처음으로 만났는가. 김=당시의 김현철 주미대사로부터 박동선 씨가 대사 및 대통령의 친

    중앙일보

    1977.06.23 00:00

  • 박대통령 평양측 조절위단 접견

    박정희 대통령은 1일하오6시부터 청와대에서 35분간 김영주 평양측 공동위원장을 대리하여 조절위원회 제1차 회의에 참가한 박성철 부수상 및 평양측 조절위원들의 예방을 받고 환담을 나

    중앙일보

    1972.12.02 00:00

  • 선거 구호에 머리 짜는 양당

    내년 양대 선거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공화-신민 양당은 벌써부터 선거 구호 품을 짜고 있다. 신민당은 56년 선거 때의「못살겠다 갈아 보자」는 야당 구호가 유권자들에게「어필」했던

    중앙일보

    1970.12.22 00:00

  • 이후락씨에 주일대사 임명장

    정부는 26일자로 전 청와대비서실장 이후락씨를 주일대사로 정식 발령, 정일권총리가 27일상오 박대통령을 대리하여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씨는 2월초순깨 부임할 예정이다.

    중앙일보

    1970.01.27 00:00

  • 60년대 정치주역(8)-이후락|정치경험 살려 원내 진출설

    이후락씨가 박정희대통령 곁에 있는 동안 그는 비서실장이상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정치무대의 전면은 아니었지만 그는 특이한 무게로 60년대의 정치적 강자였다. 이씨는

    중앙일보

    1969.12.2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