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자 암투… 서리맞은 윤필용(청와대비서실: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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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이후락과 “후계자 운운”하다 철창행/박정희 눈밖에 나… 박종규에 KO패
독재권력자가 권력을 쥐고 있는 동안 2인자를 키워 권력을 나누어주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통해 별로 없다. 집권자의 가슴에는 항상 한번 쥔 권력을 어떻게 하면 영원히 가질 수 있느냐는 궁리와 이에 도전하는 세력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속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마력을 갖고 있음을 여러 사람이 말한 바 있다. 김종필씨는 10·26 직후 왜 유신을 막지 못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이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겪었던 핍박과 한계를 회상하며 『왜 조선조에 뒤주대왕(사도세자)이 생겼는지는 권력자 가까이에 있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때문에 절대권력자가 후계자의 손을 들어주기 전에 스스로 일어서려는 2인자는 가차없는 응징을 당하거니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사례가 무수히 많다.
박정희 집권 18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정희는 권력을 유지,경영함에 있어 2인자그룹에 한정된 범위의 힘을 주긴 했으나 그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했다. 직접 당근과 매질을 무수히 구사했을 뿐 아니라 2인자그룹내의 상호견제를 교묘히 활용했다. 그는 권력유지에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모두 31명 옷벗어
이 때문에 박정희의 그늘 아래 2인자그룹으로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김종필·이후락·김형욱은 박정희가 풀었다,당겼다 하는 데 따라 부침을 거듭했고 이 밖에도 윤필용(전 수경사령관) 강창성(전 보안사령관) 김성곤(전 공화당 의원) 등 권력주변 사람들 역시 영화와 나락 사이를 헤맨 바 있다.
박정희의 충견으로 자타가 알아주던 박종규·차지철·김재규 등도 결국 권력무상 속에 권력의 포로가 되어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권력의 이같은 생리 때문에 대통령과 청와대를 둘러싸고는 끊임없이 암투와 대결이 벌어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73년에 일어난 이른바 윤필용사건이었다.
박정희 정권 18년 통치사에 있었던 수많은 권력충돌 중 가장 드러매틱하고 파장이 엄청났던 것이 윤 장군 사건이었다. 윤 장군 사건은 73년 4월28일 돌연 육군보통군법회의가 윤 장군과 일단의 군장교들에 대한 수뢰사건 선고공판을 한 기사가 사진과 함께 도하 신문의 1면 머리기사를 장식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보통군법회의는 수경사령관 윤필용 소장·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준장·육본 진급인사실 보좌관 김성배 준장 등 장성 3명과 육군범죄수사단장 지성한 대령·26사단 76연대장 권익현 대령(육사 11기·전 민정당 대표위원)·육본 진급인사실 요원 신재기 대령(육사 13기·민자당 의원) 등 장교 10명에게 횡령·수뢰·직권남용·군무이탈죄를 적용,각각 최고 징역 15년(윤·손 장군)에서 2년까지를 선고했다.
이같은 판결내용은 많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윤 장군은 당시 삼척동자도 알아주는 군의 실력자였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군인사를 유일하게 의논했고 그 때문에 육군참모총장이 임명되면 찾아가 인사하는가 하면,선배 장성들이 세배갈 정도로 위세가 당당했던 윤 장군이었다.
군내부뿐 아니라 일류재벌·정계의 핵심인사들이 그와 연을 맺으려 안달했고 그런만큼 그의 권세는 당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보통군법회의 선고에 이어 군내에서 윤 장군을 따랐던 안교덕(육사 11기·1군사령부 작전과장·전 민정의원),정동철(12기·506보안대장),배명국(14기·청와대민정비서관실 파견·전 민정의원),박정기(14기·사단포병대대장·전 한전 사장),김상구(15기·수경사 포병대장·전 민정의원·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서),정봉화(18기·수경사령관 비서실장) 등 31명이 옷을 벗었다.
또 중정에서는 윤 장군의 배후세력으로 의심받았던 이후락 부장의 고향후배인 이재걸 감찰실장 등 「울산사단」 30여 명이 구속되거나 쫓겨났다.
윤 장군과 가까웠던 김연준 한양대 총장 겸 대한일보 사장은 수재의연금 횡령의 죄목으로 구속되고 신문은 폐간당했다.
이 밖에 윤 장군과 술좌석에서 어울렸던 김시진 청와대민원수석비서관의 동생 김시종씨가 윤 장군의 사채를 빌려쓰고 신고하지 않았다하여 구속됐으며 윤 장군을 따르던 대구 출신의 육사 11기들과 막역했던 이원조 제일은행 차장(민자의원)이 해직됐다.
이들에 대해 적용된 죄목이 모두 파렴치범이고,혐의사실이 지저분해 일반국민은 단순히 독직사건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으나 당시 권력주변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알던 사람들은 이 사건이 박정희 절대권력을 둘러싼 파워게임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선배장성도 세배
이 사건은 특정인이 2인자로 불쑥 솟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권력유지 본능과 박정희 다음을 노리는 2인자그룹간의 이해가 격렬하게 대립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즉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후광 아래 나름대로 권력을 구축,야심과 충성을 경쟁하던 이후락 중정부장·박종규 청와대경호실장·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간에 치고받는 한판승부였다.
71년 4월 대통령선거의 승리,72년 5월 평양 밀행과 7·4공동성명,그리고 10월유신 연출 등으로 한껏 지위가 부풀어 있던 이후락 중정부장과 박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 아래 군내부 파워라인을 쥐고 인맥을 형성했던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박정희의 사주를 받은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KO패 당했으며 이 권력게임에서 수사책임자인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나름대로 역할을 하게 된다.
사건의 발단은 이후락과 윤필용의 밀착이 박 대통령의 경계심을 자극한 데서 비롯됐다. 당시 두 사람은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박 대통령의 신경을 건드릴 만한 행동을 했고 박 대통령은 이들이 자기 자리를 넘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다. HR(이후락)­윤 유착에 대해 강창성씨는 수사결과를 토대로 이렇게 증언했다.
『궁정동의 한 식당에서 HR와 윤 장군이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윤 장군이 「각하가 노쇠하니 건강이 더 약해지기 전에 물러나시게 해 우리가 모시고 후계자를 내세워야 한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하자 HR가 「각하가 물러나면 다음엔 누가 되느냐」고 물었다는 거예요.
그러자 윤 장군은 「형님이 있지 않습니까」라며 HR가 평양에 가 김일성을 만나고 온 사실을 은근히 치켜세우며 「삼국시대에도 김춘추가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나라와 고구려를 다녀온 일이 있으며 그 후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형님도 비슷하죠」라고 말했다는 거죠. 당시 첩보로는 이에 대해 HR가 사뭇 흐뭇해하면서 「윤 장군도 만년 수경사령관만 하란 법이 있소. 총리도 할 수 있는 것 아니오」라고 맞장구쳤다는 겁니다.
내가 직접 HR에게 진술을 들으니 「그때 윤 장군이 각하 노쇠 운운해서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라고 일축했다」고 딱 잡아떼어요. 그러고는 「윤 장군,그 ××,세상에서도 이야기가 많다. 당장 잡아넣어야 한다」고 오히려 선수를 치더군요. 여하튼 HR 주장은 자신은 윤 장군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박 대통령의 핵심참모라면 그런 일이 있으면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어야지요.』
○HR와 급격 밀착
윤 장군 사건으로 구속됐던 10인 중 한 사람인 K씨의 증언. 『10월유신 이후 HR와 윤 장군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특히 참모들의 교량역할이 컸어요. 이 정보부장의 고향후배인 이재걸 중정감찰실장(구속)과 역시 울산 출신인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준장이 두 보스를 밀착시키려고 노력했죠.
더군다나 이 부장이 손 준장을 데려다 중정차장보로 쓰겠다고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가 퇴짜맞은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HR­윤 관계를 더욱 의심케 했을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 당사자인 윤필용씨는 『상당부분이 박 대통령의 오해』라면서도 HR와 가까워진 사실은 인정했다. 그의 증언.
『나는 원래 HR와 관계가 가깝지 않았어요. 나는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입장에서 박 대통령이 경계하던 JP(김종필)나 HR 중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서는 안 되었거든요. 게다가 저 자신 HR의 행동거지를 좋게 보지 않았어요. 처음엔 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박 대통령에게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 부장은 각하를 해칠 인물이라는 등 세평이 좋지 않습니다. 그를 잘라야 합니다」라고 건의했죠.
그런데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을 박 대통령은 고스란히 HR에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HR가 나한테 거꾸로 전화를 걸어 「왜 각하에게 나를 자르라고 하느냐. 내가 그렇게 못마땅하냐」고 항의하곤 했죠. 72년 5월쯤일 겁니다. HR가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7·4남북공동성명이란 걸 내놓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보통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을 고쳤지요.
아,내가 그렇게 건의했는데도 박 대통령이 HR를 신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박 대통령은 부하의 장단점을 잘 파악해서 쓰고 있구나. 박 대통령이 필요해서 쓰는 사람을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된거죠. 사실 한편으로 HR를 견제하는 데 역부족이란 생각도 들었었고요.』
그는 증언을 계속했다.
『내가 이 부장을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하고 달라요.
그러나 이런 일 정도는 있었죠. 유신선포 후 계엄 때 HR가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해 갔더나 박종규 경호실장·서종철 참모총장·신진자동차 사장 김창원씨,대농의 박용학 회장 등이 있더군요. 내가 농담으로 「계엄하이니 두 사람 이상 모이면 내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왜 불법집회를 하느냐」고 했더니 이 부장이 「그래서 윤 장군을 모신 것 아니냐. 계엄하느라 수고하는데 우리가 격려금이라도 내놓아야겠다」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지갑을 꺼내라고 하더니 수백만 원을 몽땅 털어 거둬주더군요.
그래서 그날 분위기도 좋고 해서 술이 취한 김에 나보다 군선배인 이 부장을 「형님」이라고 불렀던 적은 있었죠.』
HR·윤 사이의 밀착과 함께 박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윤 장군의 세도에 대한 소문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윤 장군은 군생활 20년 중 5사단 군수참모 때부터 시작해 15년간을 박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주변을 맴돌던 심복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런 심복에 대해서도 권력유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단호히 매를 들었다.
강창성씨의 증언.
『당시 윤 장군을 가리켜 「청와대 밖에 있는 대통령」이라는 말까지 나돌았죠.
○“청와대 밖 대통령”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 대통령은 군부의 동향에 대해서는 늘 신경썼고 군관리를 심복인 윤 장군에게 상당부분 맡겼어요. 윤 장군은 방첩부대장(후에 보안사령관)을 거쳐 대통령의 외곽경호를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사시 동원대상 1호인 수경사령관까지 올랐죠. 박 대통령은 군 주요보직·장성인사를 윤 장군과 깊숙히 상의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세도가 안 붙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종철 대장 같은 이는 참모총장이 되고 나서 윤 장군을 찾아가 신고할 정도였고 문형태 대장 등 중장·대장급들이 설날 윤 소장 집으로 세배를 갔습니다. 장성 부인들이 윤 장군 집에 가서 부엌일을 도와주는 일도 비일비재했고요. 주요 보직·진급인사가 있을 때마다 윤 장군은 정규육사 출신들의 핵심조직인 「하나회」 멤버들을 챙겼지요. 특히 육사 11기와 윤 장군간에는 끈끈한 인간관계가 맺어졌고 윤 장군은 하나회의 대부 역할을 했습니다.』
윤 장군의 권세에 대해서는 당시 박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H씨(전 의원)도 강씨와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윤 장군은 결국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팠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사건 초기에 주장했던 것처럼 윤 장군이 어떤 쿠데타나 모반의 계획까지 세우지는 않았더라도 그가 군내의 지지와 자신의 권세를 과신한 나머지 안하무인의 행동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기라성같은 선배장성들이 자기의 눈치를 보고 대통령이 힘을 준 데다 장래성있는 후배들이 따랐으니 붕 뜰 만도 했지요. 그렇게 되니 자연히 자기도 모르게 방자한 행동이 여러 모로 드러나게 된 겁니다. 예를 들면 윤 장군은 사석에서 「영감(박 대통령을 지칭)이 혁명할 때 나이가 몇이었지」라는 말을 가끔 했어요. 자신은 그때의 박 대통령 나이(44세)보다 많으니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을 것 아닙니까. 윤 장군은 또 「장관들도 잘하고 있을 때 물러나게 했다가 다시 써야지,사고내서 쫓겨나가게 하면 재기가 힘든 것 아니냐. 영감도 잘하고 계실 때 물러나야 역사에 길이 추앙받는다.
잘못해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시기라도 한다면…」이라는 말까지 했어요. 사실 그 정도 말은 순수하게 봐주면 별것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권에 뜻을 두고 했다면 사정이 다르죠. 충신과 역적의 갈림길이 바로 이런 데서 생깁니다. 더구나 그 무렵 윤 장군은 박 대통령을 흉내내어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점도 오해를 샀을 겁니다. 벌써 휘호 쓰는 연습하는 것 아니냐고요. 또 세간에는 윤 장군 심복인 손영길 참모장이 거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벌들을 만나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는 소문도 파다했어요.
윤 장군은 그의 죄목이 무엇이었던간에 결국 반역죄로 처벌받은 겁니다. 내용이야 차이가 있겠지만 전두환 대통령 때 박세직 수경사령관이 옷을 벗은 것도 아랫사람의 세도에 대한 집권자의 견제심리가 작용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윤필용씨는 이 부분에 대해 「오해」라며 『권세란 주변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반박한다.
『어떤 이가 권력자로부터 무한신임을 받고 있다고 하면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내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죠. 선배장성들이 설날에 우리 집에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일부이기도 했거니와 오는 사람을 어떻게 막습니까. 군선배뿐인가요.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내로라하는 정치인들도 내 사무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어요.』 윤씨는 증언을 계속했다.
『이런 일도 있었지요. 모 부처장·차관과 술집에서 한잔하는데 당연히 육군 소장이었던 제가 말석에 앉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자꾸 상석에 앉으라는 거예요. 「당치 않습니다」고 거절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자리 때문에 밤새도록 싸울 수도 없고 마지못해 앉았지요. 이런게 나중에 보면 「윤 모가 위계질서를 무시했다」는 말을 만들어내더군요. 서울시 향토예비군기념식 때는 일이 있어 손 참모장을 대신 보냈는데 나중에 이야길 들어보니 서울시장과 수경사령관 자리가 맨 앞좌석에 준비돼 있고 한참 선배인 6관구사령관이 뒷줄에 앉도록 되어 있더랍니다.』<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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