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권 고비 때마다 이후락 활약(청와대비서실: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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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71년 대선 앞두고 정보부장에 컴백/「윤필용사건」 이후 급격히 내리막길
절대권력자 박정희 대통령을 보위했던 3공의 실력자들은 각기 다른 스타일로 최대한의 충성경쟁을 벌였다.
최고회의 공보실장 2년은 빼더라도 비서실장 6년,정보부장 3년 동안 이후락씨는 「박정희교」의 교도를 자처하며 오로지 박 대통령의 입장에서 정권을 다듬고 가꾸며 지켜 나갔다.
그는 주위의 표현대로 박 대통령의 머리와 가슴 속에 앉아 박 대통령의 심중과 의도를 귀신같이 읽어내 3선 개헌,7·4남북공동성명,유신을 기획해 집행했다.
박 대통령은 권력유지의 고비마다 이후락의 지모를 십분 활용했고 이후락은 반대급부로 대통령에게 올라오는 떡의 상당부분을 고물로 챙기는 등 권력과 부를 향유할 수 있었다.
이후락은 박정희의 가려운 데를 잘 긁어 주었을 뿐 아니라 박정희가 원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항상 앞질러 파악,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해주는 타고난 모사였다. 그는 꾀가 많고 항상 박정희에게 대안을 내는 사람이었다.
○꾀많은 타고난 모사
HR(이후락) 밑에서 중정고위간부를 지낸 C씨(전 국회의원)는 HR의 유능한 일면을 이렇게 표현했다.
『권력을 지닌 사람은 항상 정치·사회현상 중 자기 권력에 위태로운 요소를 열심히 찾고 거기에 민감한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때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잘못 화를 내면 그 여파가 어디까지 갈지 모릅니다. 때문에 권력을 보좌하는 사람은 때론 거짓말도 해야 하고 사건을 축소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크게 보아 권력자가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HR는 발군의 참모이고 그는 나름대로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인식 때문인지 HR는 참모의 위치라기보다는 정책집행자의 입장에서 무수히 많은 월권을 하기도 했다. 비서실장·중정부장으로서의 이후락을 가까이서 지켜본 K씨(전 국회의원)는 김형욱·김재규·이후락의 박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 스타일을 통해 3자의 유능도를 비교했다.
『김재규는 어디에서 데모가 있었습니다,누가 양심선언을 했고 누가 유신반대를 했습니다 등등 단순 나열식 보고를 합니다. 보고만 끝나면 박 대통령이 짜증을 냅니다. 사실 이런 틈을 차지철이 파고들었는지 모릅니다.
반면 김형욱은 서울대에서 데모가 있었습니다,서울대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 번만 더 데모하면 탱크로 밀어버리겠다고 통고했습니다는 식이었죠. 무식한 것 같지만 박 대통령은 이런 보고에 흐뭇해하면서 잘했어라고 칭찬해준 적이 많았지요.
HR은 이들 두 사람과 달라요. 65년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6·3사태 때일겁니다.
계엄령을 펼 것이냐로 고위당·정·군관계자회의가 열렸죠. 민기식 사령관은 반대,김계원 부사령관은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나머지는 박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HR가 나서더군요. 「각하 계엄은 힘이 있을 때 펴야 합니다. 조금 지나면 학생·시민들이 계엄을 펴도 듣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HR의 견해를 채택했죠. 그는 매사 이런 저런 일이 있는데 요렇게 대처했으면 좋겠다는 대안을 갖고 박 대통령 앞에 나섰습니다.』
박정희는 이런 이후락을 고비고비마다 유효적절하게 써먹었다. 박 대통령이 HR의 지략을 얼마나 잘 요리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 한 토막.
69년 10월 3선 개헌의 여파로 같이 물러난 김형욱 정보부장이 자신의 해임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고 다니다가 망명으로 빠져들고 끝내 실종으로 생을 끝낸 것과 달리 조용히 주일 대사로 가있던 HR는 1년2개월 후인 70년 12월 다시 박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정보부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한다.
박 대통령은 언젠가 학계·언론계 인사 수 명과 청와대에서 술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HR를 다시 부르게 된 비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당시 술좌석에 있었던 K씨의 전언.
『내가 어떻게 「조조」(박정희는 자주 이렇게 불렀다)를 정보부장을 시켰는지 알아.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리기 전에는 김영삼이가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된다고 보고가 올라오더니 막상 대회에서 김대중이가 후보가 되더군.
나자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참모들은 하나같이 큰일났다는 소리만 하고 있잖아. 모두 김대중이가 더 센 데 큰일났다는 거지. 밤에 잠이 안 오더군. 그런데 말이야,새벽에 불현듯 주일 대사로 가 있는 조조가 생각났어. 다음날 조조를 급히 불렀더니 조조는 「각하,어차피 호남표는 야당거니까 일부만 꽉 챙기고 영남표를 똘똘 뭉치게 하면 김영삼보다 김대중이가 상대하기 더 쉽습니다」라고 하는거야.
○「7·4」도 HR작품
그 당시 그런 확신있는 얘기를 하기 어려웠지. 그래서 조조더러 「정보부장 맡아서 선거를 치러보겠느냐」고 했더니 하겠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전에 김형욱 정보부장을 김계원이로 바꾸려고 했을 때 김형욱이가 이 사실을 미리 눈치채고 김계원이를 조사해 허물을 까발기는 바람에 난처했던 적이 있으니 이번에는 이 사실이 새지 않게 비밀을 지키라고 했어. 이 조조란 친구가 얼마나 부장이 하고 싶었던지 서너 주일을 아무 말 않고 버티더군.』
K씨는 『당시 오히려 HR가 여자관계로 주일 대사직도 날아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이것도 HR의 연막작전이었던 것 같았다』고 말했다. HR는 영화배우 K씨를 정릉에 집을 사주어 소실로 거느리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때부터 HR는 지역감정의 메커니즘을 꿰뚫고 있었고 71년 4월 선거의 결과는 그의 장담을 확인시켜 주었다.
박정희는 호남에서는 김대중에게 78만 대 1백41만표로 뒤졌지만 영남에선 2백22만 대 72만표로 압도해 결국 95만표차로 당선되었다.
HR는 이런 식으로 일을 만들 줄 안다. 거기에는 항상 박정희의 구미를 겨냥한 점수따기의 치밀한 계산이 따랐다. 자신의 웃저고리에 청산가리 캡슐을 넣고 평양에 가 성사시켰던 7·4남북공동성명도 주일 대사시절 HR의 머리에서 최초로 아이디어가 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당시 모 일보 주일 특파원이었던 L씨(전 국회의원)의 증언.
『동경에 부임했지만 HR의 안테나는 거의 서울 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오가는 인편을 통해 끊임없이 청와대의 동정을 살폈고 자신을 몰아낸 공화당내의 기류를 시시각각 체크하더군요.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인가 그의 관심이 소련 쪽에 쏠리는 거예요.
주일 소련대사관의 모 참사관과 접촉을 한다는 얘기가 은밀히 들리더군요. 노련한 정보장교 출신에다 영어가 능통한 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련을 통해 자신의 평양행을 추진했던 겁니다. 박 대통령의 명을 받아 그가 소련 쪽 창구를 두드린 것인지,독자적으로 소련 쪽을 뚫어 박 대통령의 재가를 추후받은 것인지는 아직 확실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소 통해 평양행 추진
그러나 탄탄대로를 걷던 이후락에게도 위기는 왔다. 박정희는 기본적으로 HR의 능력을 활용했을 뿐이지 인간 HR를 전적으로 신뢰한 것 같지는 않았다.
분할통치에 천부적인 감각을 가졌던 박정희는 HR를 부리면서도 끊임없이 감시하고 의심했다. HR가 박정희의 절대권력이란 핵우산 아래 저지른 비리 역시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박정희는 HR의 부패에 관해 많은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 단적인 예가 71년 대통령선거의 실질적인 선거대책본부장을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맡겨 놓고도 가장 핵심적인 돈주머니인 선거자금모금은 김학렬 부총리에게 맡긴 것이다.
박 대통령은 정치자금 수금대상 리스트와 할당액을 김 부총리에게 주었다.
이 어마어마한 서류에 HR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HR는 청와대비서실장시절 바로 직속 수석비서관이었던 김 부총리가 자신에게 그 내용을 알려주도록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김 부총리 자신이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닌 데다 박 대통령의 각 기관간 「견제와 균형」정책이 워낙 철저해 감히 흘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HR 특유의 무리수가 나왔다.
당시 김 부총리와 가까웠던 언론인 C씨의 증언.
『어느날 밤 갑자기 김 부총리의 혜화동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없어진 물건이 하나도 없고 도둑이 서류가 있을 만한 곳만 뒤지고 갔다는 거예요. 김 부총리는 직감으로 「정치적인 도둑」이 들었다고 판단했죠. 다음날 직선적인 김 부총리는 즉각 청와대로 쫓아가 「각하가 시켰습니까」고 물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아니라고 하자 그는 대뜸 정부종합청사 21층에 있던 정보부장실로 찾아가 자신이 비서실장으로 모셨던 HR에게 「미스터 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며 따졌지요. 그는 그렇게 당돌한 데가 있었습니다.
물론 HR는 그런 일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죠. 그날 당장 김 부총리는 자택에 전기철조망을 쳐버리더군요.』
이때 이미 이후락에게는 방자한 구석이 생겼고 스스로 묘혈을 파는 그에게는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친다. 바로 윤필용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 장군이 73년 이후락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 비판과 후계문제를 논의 모의를 했다가 발각되어 윤과 가까운 군장교들이 대거 투옥되거나 군을 떠난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과 관계되었던 K씨가 지켜본 사건의 전말은 대충 이렇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을 어렵게 이기고 지역감정에 의한 직선제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때였죠. 김종필씨는 훗날 박 대통령이 이때 이미 유신을 착안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만 사실여부는 모르겠어요. 박 대통령은 심정적으로 김대중과 자신이 싸워 그런 시소를 하는 게임의 비생산성을 측근들에게 불평한 적은 여러 번 있었죠.
하루는 박 대통령이 박종규 경호실장·신범식 서울신문 사장과 뉴코리아 컨트리에서 골프를 쳤어요. 운동을 마치고 특실에서 반주를 곁들여 저녁식사를 할 때입니다. 주기가 약간 돌았을 때인데 신 사장이 느닷없이 「각하,이젠 주변사람을 좀 조심해야겠습니다」고 말을 한겁니다.
박 대통령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술이나 마셔」라고 일축했다는 거예요.
○“거사 때 돈줄” 보고
그러나 박 대통령도 그 말이 찜찜했던지 다음날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신이 한 얘기가 무슨 뜻인지 알아보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박 실장이 신을 경호실장 방으로 불러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어마어마한 얘기였습니다.
윤필용이 ▲무리한 대통령선거로 민심이 박 대통령으로부터 떠났고 ▲박 대통령이 간이 나빠 통합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신경질이 잦아 국정의 판단을 잘못하고 있고 ▲이 시점에서 그가 퇴진하는 것이 그를 조지 워싱턴으로 만드는 명예로운 길이며 ▲만약 퇴진에 불응하면 강제로라도 내보내야 한다는 모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윤은 이런 모의를 그를 따르는 정규육사 출신 후배들 및 이후락과 함께하고 있으며 HR가 거사자금을 대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죠.
박 대통령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김정렴 비서실장·박종규 경호실장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육영수 여사까지 흥분했습니다. 윤 장군은 군에서 박 대통령의 부관·비서실장을 지내 육 여사도 잘 알았거든요. 박 실장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사건수사를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윤필용사건은 이렇게 시작됐고 이후락의 운은 이때부터 서서히 가기 시작했다. 당시 이 어마어마한 특명수사를 지휘했던 강씨의 증언.
『날짜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만 73년 2월초 어느날 오후 2시쯤 박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로 갔습니다. 대통령의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대뜸 「윤필용과 동기(육사 8기)지」라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했더니 친하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문제는 동기생이니 뭐니를 떠나 생사를 걸고 해내야 하는 절대절명의 일이라면서 첩보개요를 설명했습니다.
나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철저히 조사할 것을 다짐하고 나왔습니다.』
○“주의주었다” 발뺌
강씨는 즉각 윤필용을 연행하고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가장 고민스러운 대목이 이후락을 조사하는 문제였다. 강씨는 그때의 사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했다.
『HR에게 「점심 한 번 주십시오」라고 전화를 했죠. 그러나 실제는 내가 조사를 하러 궁정동 안가엘 간겁니다. 내가 정색을 하고 앉았더니 HR도 긴장하더군요. 윤 장군으로부터 거사계획을 듣고 「만약 각하가 물러나면 누가 되느냐」고 묻고는 윤이 「형님(HR)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는 데 사실이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HR는 「그 친구 당장 잡아넣어야 한다. 어떻게 겁없이 각하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느냐」고 선수를 치더군요.
내가 「윤과 식사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HR는 「윤이 각하가 노쇠하다고 운운해서 내가 말같지 않은 얘기는 하지도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발뺌을 했어요. 수사결과를 종합한 후 나는 박 대통령에게 「사건이 너무 커지면 불필요한 잡음이 많이 생깁니다.
윤은 잡아넣고 HR는 혐의가 없는 걸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건의했고 박 대통령도 이를 받아들였죠. 박 대통령을 만나 무사를 확인한 HR는 이후 박 대통령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어요.』
한칼에 갈 뻔했던 위기국면을 탈출한 HR는 박 대통령의 신임을 다시 얻어내기 위해 쇼크요법을 구사했다.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한 73년 8월 김대중씨 납치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희망과는 달리 이 사건으로 그는 급격한 내리막길로 빠져든다. 비장의 평양밀행으로 움켜쥐었던 북한카드마저 잃고 말았다. 북한의 김영주는 이 사건을 문제삼아 일방적으로 남북조절위 중단을 선언했던 것이다(윤필용·김대중 납치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추후에 상세히 다룰 것이다). 결국 그는 사건의 책임을 지고 그해 12월 정보부장에서 물러나 박정희와 권력으로부터 영원히 떠나고 만다.<김진 기자>PN JAD
PD 19901208
PG 01
PQ 01
CP JH
SA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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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 01
CS A11
BL 1398
GI 김경희
TI 「평양민족음악단」 서울에/송년통일음악회 참가 33명
TX ◎9·10일 남측과 합동공연
【판문점=김경희 기자】 북한 음악가와 기자단 33명으로 구성된 「평양민족음악단」(단장 성동춘 조선음악가동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일행이 8일 오전 10시 판문점을 통해 서울에 왔다.
「90송년통일전통음악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날 분단의 장벽을 넘어온 평양민족음악단은 남한측 평화의 집 앞에서 지난 10월 평양에서 열렸던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했던 서울전통음악연주단(단장 황병기 이대 교수) 등 46명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관계기사 18면>
남북 음악인과 기자들은 범민족통일음악회 이후 두 달 만에 다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으며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단장 겸 「90송년통일전통음악회」 집행위원장인 황 교수는 『남북 음악인들의 잇단 왕래야말로 그렇게도 두껍게만 느껴졌던 분단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전주곡』이라는 내용의 환영사를 발표했다.
황 교수는 이 환영사에서 『민족의 숙원인 통일의 대과업이 동포애에 입각,평화롭고 문화적인 방법으로 이뤄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평양민족음악단 일행은 이날 낮 12시쯤 숙소인 쉐라톤워커힐호텔에 도착,이번 음악회 추진위원장인 원로 국악인 성경린씨 일행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으며 오후에는 두 공연장 시설을 둘러보고 7시 하얏트호텔에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주최하는 환영만찬에 참석한다.
성 단장은 도착성명에서 『우리는 이곳에 도착하면서 북과 남의 동포들이 민족분열의 비극을 안고 갈라져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가슴뜨겁게 느끼게 된다』며 『평양민족음악단은 남녘의 동포 음악예술인들과 함께 90송년통일전통음악회가 또 하나의 통일을 위한 민족의 음악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측 연주단은 9,10일 오후 7시 각각 서울 예술의 전당·국립극장에서 우리측 전통예술인들과 함께 「90송년통일전통음악회」에 참가,전통음악을 연주하고 13일까지 머무르며 관광할 예정이다.
남북한 음악인이 나란히 한 무대에 서는 음악회가 서울에서 열리기는 분단 후 처음이다.
북측 연주단은 이번 공연에서 「평북영변가」 「배따라기」 「영천아리랑」 「통일의 길」 「신고산 타령」 「도라지」 「자진난봉가」 「옹헤야」 「박연폭포」 등 전통민요 20곡을 50분 동안 연주하며 우리측 국악인들은 아악 「표성만방지곡」,거문고 독주 「산조」,민요 「성주풀이」 「진도아리랑」,국악관현악 「신모듬」 등을 연주할 예정이다. 9일 공연의 1부는 남측이 먼저하고 10일 공연의 1부는 북측이 먼저한다. 특히 11일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들은 이들의 합동특별공연을 12일 관람할 예정이다.
북측 연주단의 관광코스는 비원(9일),롯데월드 민속관(10일),삼익악기(11일),국립국악원(12일) 등이다.
KBS­1TV와 MBC­TV는 9일 밤 10시30분,11시10분부터 각각 90송년통일전통음악회 실황을 녹화중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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