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집권 18년 동안 그의 개인적 신임과 총애가 변치 않았던 부하 셋을 고른다면 박종규·차지철, 그리고 김정렴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박대통령은 이후락에 대해 지모는 높이 샀으나 늘 의심을 풀지 못했고 김종필에 대해서는 정치적 위상과 관련, 항상 「매와 당근」을 들고 대했다.
박대통령이 상대를 얼마나 믿느냐, 또는 친근하게 생각하느냐는 불쑥불쑥 내뱉는 호칭에서 잘 나타났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좀처럼 반말을 쓰지 않으며 각료나 참모들에게 가장 즐겨 쓰는 호칭은 「임자」였다. 간혹 직함을 부르거나 상대가 좋아할 만한 「전직」을 붙여 주기도 하나 대개 「임자」였다.
그가 예외적으로 반말을 하고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종규」와 「지철」이었다. 그리고 정반대로 비서실장이면서도 「실장께서는」이라는 호칭대접을 받은 사람이 김정렴이었다.
박종규와 차지철은 혁명에 함께 목숨을 걸었었다는 피처럼 끈끈한 동지애에다 두 사람의 맹목적인 충성심까지 어우러져 흡사 아버지와 큰아들(박), 아버지와 작은아들(차) 같은 유대감이 있었다.
박종규는 61년 5·16직후 최고회의의장 경호대장에서부터 74년 8·15 국립극장의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물러날 때까지 13년 동안 박대통령의 심복이자 방탄조끼였다.
두 사람의 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충분히 수긍이 간다.
6·25가 발발하기 직전 국방경비대 작전정보과에는 과장인 박정희 소령과 과원 김종필 소위, 박종규 상사는 같은 방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박종규와 오랜 술친구이자 전직 청와대비서관이었던 S씨는 박종규가 들려준 얘기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저녁 불순분자가 용산역 근처에 나타났다는 첩보가 들어왔지요. 이놈을 잡느라 용산 일대를 뒤졌는데 별 소득이 없었어요. 같이 데리고 간 부하들과 술 생각도 나고 해서 술집 몇 군데를 돌다가 그만 발동이 걸렸지요. 그날 밤 정보과 한달 활동비를 술값으로 몽땅 날려버리고 말았어요.
술이 깨고 나니 「이젠 모가지로구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다음 날 출근했는데 박 소령님이 부르시더군요.
<중학영어부터 독학>
「잡으라는 간첩은 못 잡고 한달 쓸 돈을 술값으로 날려보냈구만」하시면서 노려보는데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순간 씩 웃으시면서 「돈 다 써버렸다고 한달간 놀면 안돼」라고 하시잖아요. 어찌나 고맙던지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박 소령님은 시간 날 때마다 나에게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까짓 거 나도 소위 한번 달아보자고 공부해 장교시험을 본거지요. 박 소령님은 나한테 은인이어요』
그때 박종규의 모습을 김종필씨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루는 풀이 죽어 들어와서는 자살하겠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하니 세상이 싫다는 거예요. 그의 성격을 알거든요. 그러지 말고 박 소령을 만나 용서를 구하라고 했지요. 박 소령을 만나고 나오더니 그날부터 중학교 영어교과서를 사들고 와 밤낮없이 혼자 읽는 거예요. 어느 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자고 했더니 정말 박 소령과 제가 깜짝 놀랄 정도였어요』
61년3월초 종로4가 무허가음식점에서 있었던 혁명주체들의 비밀회합에서 박종규 소령은 두 가지 중대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하나는 박정희 소장의 신변경호를 책임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수단 출신 차지철 대위 등을 데리고 반도호텔을 습격해 장면 총리를 체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리 낌새를 눈치챈 장 총리가 칼멘수녀원으로 피신하는 바람에 체포작전은 실패했다. 박 소령은 차 대위와 함께 박정희 소장을 그림자처럼 경호해 혁명 이틀후인 18일엔 시청 앞에서 박 소장을 가운데 두고 그 유명한 「우종규 좌지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후 최고회의의장 경호대장을 맡은 박 소령은 마치 서부의 사나이처럼 쌍권총을 차고 다녔다. 눈매가 매섭고 성격이 괄괄한데다 검도·태권도·합기도로 무장한 몸집의 동선이 독특해 기라성 같은 선배군인들에게 찍히기도 했다.
육사5기로 혁명에 참여, 최고위원을 지냈던 K장군의 회고.
『잘 알지도 못하던 친구가 혁명 당일부터 자진해서 박 소장을 따라다니면서 경호를 맡더니 어느 날 경호대장이래요.중학영어부터>
<늘 쌍권총 차고 다녀>
쌍권총을 차고 다니며 선배들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많이 해 말들이 많았지요. 박 소장도 하루는 나에게 「저 친구 활극에 나오는 카우보이 마냥 쌍권총을 왜 차고 다니는지 모르겠어」라고 하더군요.
송요찬 장군 같은 이는 「저 친구 눈에 거슬리는데 내보내지」라고 해 내가 「지금이 혁명초기인데 괜히 말썽이 생기면 좋지 않으니 우리가 눈감아 줍시다」고 달래기도 했어요.』
일부 선배들의 못마땅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박 소령은 차 대위를 데리고 경호업무에 매진했다. 그는 인력보강을 위해 육·해·공 3군 사관학교 출신 엘리트장교 6명을 직접 골라 최고회의비서실 겸 경호대에 배속시키기도 했다.
이때 이미 최고회의와 육군방첩대(보안사령부전신)·중앙정보부에는 장차 한국정치사를 주름잡는 육군장교들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최고회의엔 박정희 의장전속부관 손영길 소령, 비서실의 최성택 소령, 민원비서관 전두환 소령이 포진했으며 방첩부대엔 노태우 대위·김복동 소령·권익현 대위가 있었다.
소위 정규육사1기(11기)들의 핵심들이었는데 전두환·손영길·김복동·최성택이 한해 먼저 진급해 소령이었고 노태우·권익현은 대부분의 동기생과 함께 대위였다.
이들은 JP가 중정을 창설하자 옮겨가 인사과장(전두환)·학원과장(김복동)·정보과장(권익현)을 맡게되며 당시 동기회 회장은 노태우 대위였다.
이들은 그후의 경력이 말해주듯 군내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치수업을 받게된다. 한국군부의 후계엘리트를 자처하던 이들은 한때 정보부·방첩대의 실무 부서에 있으면서 김종필· 김형욱·홍종철·길재호 등 이른바 「김홍길」 등 8기생그룹이 증권파동 등 4대 의혹사건과 관련된 것에 분개, 이들을 부패분자로 몰아 제거하려는 집단행동을 준비하기도 했었다.늘>
<육사11기와는 친해>
이른바 63년 「7·6거사계획」이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들은 JP계열의 부패를 두고는 혁명이 의미가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모의사실이 발각되고 8기생들의 압력에 의해 계획은 무산됐다. 박정희 의장은 주동자인 노 대위·손 소령과 외부에서 합세한 정호용·김식 대위까지 포함, 모두 10명을 구속하라는 특명을 정승화 당시 방첩부대장에게 내렸다. 그러나 JP와 대립된 입장에 있던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이 이들의 행동이 순수한 우국충정이라고 변호, 군에 원대 복귀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었다.
이들이 제거하려고 했던 JP는 지금 민자당 최고위원으로 노태우 대통령과 손잡고 있고 이들의 수사를 맡았던 정승화 장군은 12·12사태로 이들에게 곤욕을 치렀으며 전두환·노태우란 두 명의 대통령이 탄생했다.
이들 육사11기들과 박종규는 8기에 대한 불만이란 공통점을 가진 탓인지 사이가 좋았다. 박종규 경호대장은 상사에서 육군종합학교 5기로 장교가 된 때문인지 8기생들의 득세에 묘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이 점은 차지철 대위도 마찬가지였다.
최고위원이었던 K씨의 회고담.
『혁명이 성공하고 며칠 후 혁명주체들이 서울시내 음식점에 모여 축하연을 가진 적이 있죠.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모두 거나하게 취하자 그 자리에 있던 육사8기생들이「8기를 위하여」라며 건배하는 등 공공연히 「단합」을 외쳤어요. 옆에서 쳐다보던 박 소령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하더니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여기가 8기생 동기회냐, 8기생들만 다 해 먹냐」라고요.
8기생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죠. 「뭐가 어째 ××야」라며 서로들 옥신각신하다 급기야는 주먹과 발길질이 난무하더군요. 박 소령이야 무술엔 신기를 갖고있어 8기생들이 당할 수가 없었죠. 후에 내무장관을 지냈던 O씨와 국회상임위원장을 지낸 S씨 등이 그날 박 소령에게 얻어맞았지요. 이 회식사건은 그후 「경호대장이 감히 최고위원을 쳤다」며 문제가 됐어요. 박 소령이 「O선배, 내가 좀 지나쳤습니다. 용서하십시오」라고 사과해 별탈 없이 넘어가긴 했어요』
63년10월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청와대 경호실장이 된 박 소령은 특유의 우락부락하고 괄괄한 추진력으로 경호실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 백악관의 SS(Secret Service)시스팀을 모방해 그해 12월 경호실의 모습을 갖춰 나갔다. 초기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권위확립과 경호실의 기강을 잡기 위해 무지막지한 폭력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당시 경호관 S씨의 증언.
『그때 박 실장과 경호관들은 총 신이 긴 스웨덴·노르웨이 제 권총을 주로 차고 다녔습니다. 불편하고 무게 때문에 요통을 겪는 사람이 많아 총신이 짧은 권총으로 바꾸자고 건의했죠. 그런데 안 된다는 거예요. 아직은 정권 초창기인데 보통사람들에겐 권총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효력이 족하다는 거에요. 진짜 총을 쏘는 경우가 생기는 것보다 겁을 주어 미리 막는 것이 더 낫다는 거죠』육사11기와는>
<미 ss시스팀 모방>
그는 부하가 잘하면 『마음에 들어』라는 칭찬과 함께 거액의 술값을 내놓았고 있을 수 있는 실수를 저지른 부하가『나는 이제 모가지다』라고 겁먹고있으면 『야××야, 그 따위 밖에 못해』라며 주먹으로 가슴을 몇 번치는 것으로 끝냈다. 그러나 기강을 위협하는 잘못에 대해선 가차없었다. S씨의 증언.
『경호실 초창기에는 기강을 세운다고 잘못한 부하를 가차없이 목을 날렸으며 직접 불러다 마구 때리기도 했어요. 비서실이나 정보부쪽에서 「어떤 어떤 직원이 돈을 먹었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그 직원을 불러다 액수가 작으면 조인트를 몇 대 까는 걸로 끝냈고 규모가 크면 그대로 목을 잘랐어요. 아마 당시 직원의 열중 서넛은 박 실장한테 한번쯤은 당했을 거고 직원들은 하도 실장이 무서워 복도에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먼발치에서 눈에 띠면 잽싸게 사라지곤 했죠.』
박 실장은 박대통령을 경호하는 방식도 거칠었다. 지방출장이나 서울시내행사 때 박 대통령 주변에서 거치적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장관이든 일반시민이든 가리지 않고 팔꿈치로 옆구리를 쳐 옆으로 밀어냈다. 자신뿐만 아니라 경호관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시켜 장관 등 고위인사들은 『경호실 직원은 안하무인이냐』고 불평할 때가 많았다.
박 실장은 경호실의 자존심이 상했다 싶은 일이 있으면 눈뜨고 보질 못했다.미>
<고위인사들도 불평>
S씨가 전하는 에피소드 하나.
『박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할 때였는데 경호실에서 만들어 올린 예산을 총무처에서 그대로오케이 하지 않고 깎으러 한다는 보고가 올라왔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박 실장은 총무처차관을 부르더군요. 차관이 경호실장 방에 불려오자 박 실장은 그대로 문을 걸어 잠그더니 10여분간 마구 구타하는 거였어요. 문밖에서 가슴을 졸이며 듣고있는데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대통령 경호실을 뭘로 보는거야. 네가 뭔데 마음대로 예산을 깎아」라는 호통소리가 튀어나왔어요. 안되겠다 싶어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차관얼굴이 피투성이에요. 박 실장 성미가 불같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심하게 할 줄은 몰랐죠.』
박대통령도 박 실장의 이런 행동을 한편으론 골치 아파했다. 박대통령은 육사8기생들에게 『박 실장의 성격이 급하니 조심해 다루고 쓸데없이 충돌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박 실장은 박대통령의 권위나 인간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에겐 참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늘 이후락에겐 꽁하는 마음이 있었고 윤필용 등 육사8기들에 대해서도 고까운 생각을 갖고 있었다. 10월 유신 5개월 후에 일어난 윤필용 사건에서 그의 잠재적 원한은 폭발하고 만다. 그 사건특명수사를 맡았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의 증언.
『당시 박대통령 아래의 권력게임은 박 실장·이 정보부장·윤 수경사령관의 삼각구도 였어요. 경호실이 수경사를 장악한 차지철 실장 때와는 달리 그때만 해도 양 기관의 파워가 막상막하였죠. 그런데 육사8기인 윤 사령관은 박 실장이 자기를 군 선배로 잘 대접해 주지 않는다고 내심 불만이 많았고 따라서 HR(이후락)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죠. 윤 장군사건이 터지자 박 실장은 HR와 윤 모두를 쳐야한다고 적극적으로 나섰어요.』
그의 증언은 계속됐다.
『누구누구를 잡아넣을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박대통령과 김정렴 비서실장·박 실장, 그리고 나 넷이 모였습니다. 박대통령이 「이후락이고 뭐고 관련자는 모두 잡아넣어」라고 호통을 치 길래 내가「비서실장까지 지낸 사람을 구속하면 각하 권위가 흔들립니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아 글쎄 옆에 있던 박 실장이 대뜸 군 선배인 나한테 반말로 「강 사령관, 각하께서 하라면 하는 거지 왜 말이 많아」그러잖아요. 그래서 내가 정색하고 「당신이 나한테 반말해도 되는 거요」라고 맞받자 박대통령이 「강 장군이 참아」라고 말리더군요.』
육사11기 중 영남권출신을 중심으로 결성됐던 하나회의 핵심멤버 중 윤필용 사건으로 손영길 준장은 구속되고 권익현 대령은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았음에도 옷을 벗지만 전두환 준장·노태우 대령은 무사했다. 박 실장이 평소 자신과 가까웠던 이들을 구명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김진 기자>김진>고위인사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