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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1개 사단에 최소 20억 달러 내라”
갈수록 월남전은 심각한 양상을 보이면서 마치 블랙홀처럼 끝없이 빨려들 듯 확전되고, 배면기지 역할을 하는 태국의 미군기지 공사는 시각을 다투며 각국의 건설업자들을 불러들이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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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파병은 이승만이 약속한 것”
박정희는 1964년 대한민국 젊은이들을 월남전에 파병한다. 그리고 44년이 흘렀다.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떠나 파병으로 한국 경제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분명하다. 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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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대학, 실무 교육 등으로 취업률 높여
동원대학(www.tongwon.ac.kr)은 전체 학과가 8년 연속 취업률 90%를 달성했다고 이 대학은 설명했다. 소방안전관리과, 세무회계정보과, 시각디자인과 등은 3년 연속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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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뜻'으로 '독도밀약'에 나섰고, 극비 유지 위해 문건 불태웠다"
▶김종락 당시 한일은행 전무 ‘독도밀약’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 필자는 김종락이라는 인물을 알지 못했다. 그가 3공화국 이후 한국정치의 산 증인인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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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이름 남기고 역사에 묻힌 사람들
세월이 흐르면 역사가 남는다. 올 한해도 우리 사회를 움직였던 수많은 인물들이 영욕의 세월을 마감하고 역사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족적 만은 너무나 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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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추억] 한일협정 주도한 외교계 큰 별
이동원(사진) 전 외무장관이 18일 별세했다. 80세. 고인은 혈관질환으로 석 달가량 입원해 투병하다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숨을 거뒀다. 고인은 박정희 정권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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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서 개교한 '송도고' 인천 송도서 100년 맞이
구한말 개성에서 문을 연 송도(松都)고교가 다음달 3일 인천에서 개교 100년을 맞는다. 일제하 초가집 교사에서 시작해 한국전쟁으로 인한 휴교를 거쳐 인천 송도에 자리 잡은 이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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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협정, 베트남전 외교문서 공개] 박정희 "독도문제 융통성 절대 없다"
26일 외교부의 문서 공개로 13년8개월간에 걸친 한.일협정 협상의 전모가 최초로 드러났다. 협상은 1951년 시작돼 65년 6월 22일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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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후선 김종필·오히라, 결단은 박정희·이케다
*** 한국측 주역은 한.일 협정의 결단을 내린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협상 방식에 대한 구상과 막후 조정, 담판과 협상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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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공개된 한·일 협정 문서 들여다보니…
정부는 1965년 6월 22일 체결한 한.일 협정 관련 161개 문서 가운데 5권의 문서(1149쪽)를 17일 공개했다. 이는 2004년 2월 서울 행정법원이 개인 청구권과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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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일 수교 회담
김종필과 오히라가 회담하는 모습(1962년 10월 20일)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 모습(1964년 서울) 한·일 협정을 위해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동원(가운데)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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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벗은 한·일회담] 곡절 많았던 협상 과정
한.일 수교 회담은 14년간 진행됐다. 1951년 10월 20일 일본 도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의 중재 아래 열린 예비회담이 시작이다. 서명은 65년에나 이뤄졌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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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한·일 협정 문서 공개한다
▶ 1965년 12월 이동원 당시 외무장관(左)과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가 한.일협정 가조인을 끝내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1965년 6월 이동원 당시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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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여자 박사
한국 여성교육의 선각자였던 우월(又月) 김활란(金活蘭)을 말할 때 으레 따라붙는 호칭이 박사다. 김활란과 박사는 동격으로 취급됐다. 이화학당 대학과를 마친 김활란은 모교에서 교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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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이동원 동원대 이사장 자서전 펴내
"마릴린 먼로를 데려오게. " 1950년대 초반 임병직(林炳稷)유엔대사는 미국 컬럼비아대 유학생이던 이동원(李東元)씨에게 넌즈시 '밀명' 을 내렸다. 한국대표부 주최로 치를 예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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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연재 '남기고…' 5천회 맞아
현재 중앙일보에 연재 중인 각계 명사들의 증언록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이 오늘로 5천회를 맞았다. '남기고…' 은 신문 연재물로는 보기 드문 롱런 히트상품으로서, 중앙일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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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밀사 평양밀사] 2. 이후락의 북행
1972년 5월 4일 0시 15분쯤. 평양 모란봉초대소. 대북 밀사 이후락(李厚洛)중앙정보부장은 순간 깊은 잠에 들었다가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깼다. 예고없이 들이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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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 한일의원외교 다음 주자는?
지난 총선이 계속되면서 국내는 야단법석이었지만 일본 나리타(成田)공항에 마중나가는 한국인들의 발길은 한동안 뜸했었다. 선거 탓에 정치인들의 일본 행차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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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이정은 전 미국 디킨슨대 교수
이정은(李政恩)전 미국 디킨슨대 교수는 2일 오전 11시 경기도 광주군 동원대'(이사장 李東元 전 외무부장관)'교정에서 이 대학 제2대 학장으로 취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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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60)
60. 이야기를 마치며 우리는 어느덧 20세기의 끝 자락에 서 있다. 이제 머지않아 새 천년이 시작될 것이고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물결을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런 시점에서 지나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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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59. 오프 더 레코드
59. 외교무대 퇴장 66년 12월 20일, 나는 유엔본부(뉴욕)에서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을 만나고 있었다. 그때만해도 남북한은 유엔총회 때마다 한국문제 총회 상정을 놓고 표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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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58)
58. 한일협정 마무리 65년 6월 20일 김포공항 입구. 나와 연하구 외무부 아주국장이 타고 있던 자동차가 시위대의 집중적인 달걀 세례를 받았다. 나는 반쯤 열린 창문으로 날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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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56)
56. 헛도는 한일회담 65년 3월 26일 저녁. 일왕 히로히토(裕仁)예방을 마친 나는 숙소에 머물며 밤 10시로 예정된 비공식 외무장관 회담전략 마련에 들어갔다. 이미 세 차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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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55)
55. 긴장속 첫 공식 방일 미국 방문이 끝난 65년 3월 23일 나는 일본항공(JAL)편으로 다시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 5시 40분. 일본에 체류중인 연하구(延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