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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북간도(4)-이지택|제28화
용정은 자그마한 시가였다. 일본인도 없고, 우리 나라 사람도 그때는 별로 없었다. 장사꾼으로 정사빈이란 사람이 자투리 (포목) 장사를 하고 있었다. 또 시계 점을 하는 박씨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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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자가 문학평론 집필「30년대 농촌과 심훈 문학」|연세대 홍이섭 박사
사학자 홍이섭 박사(연세대·국사)가 문학평론을 집필, 문단의 화제가 되고 있다. 홍 박사는 최근 간행된「창작과 비평」지(가을호)에서『30년대 초의 농촌과 심훈 문학-「상록수」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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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한국인 이주민의 수
일본 안에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해방직후 대일 관계에 있어서 강경 일변도의 자세를 춰했던 이승만 박사에게 보내온 하천풍언씨의 공한은 국내외에 유명한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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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본 한국의 지역사회개발 운동|서울대 행정대학원 제3회 국가정책「세미나」…이만갑 교수 발표요지
서울대 행정대학원은 6일, 7일 문화관광「호텔」에서 제3회 국가정책「세미나」를 가졌다. 전체적인 주제는「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지역사회개발운동」. 이「세미나」에서는「역사적 측면」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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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국의 병폐… 「말의 혼돈」-각계인사가 말하는 용어의 반성
『신약성서』의 「요한의 복음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맨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은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시었다….』 「말씀」의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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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이슈」…근대문학의 기점논쟁
우리 문단에서의 해묵은 순수·참여논쟁이 71년에 이르러 「리얼리즘」논쟁, 농촌문학논쟁으로 논쟁의 형태를 변화시키더니 작년 말 제기된「우리 나라 근대문학의 기점」문제가 문단에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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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경무대 사계|윤석오(제자는 필자)
좌익세력의 집요한 「테러」로 숱한 파란을 겪었지만 선거는 치러졌다 개표결과는 무소속85석, 이박사의 국민회 55석, 한민당 29석, 대회청년단 12석, 민족청년단6석, 이밖에 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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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제26화>경무대 사계|윤석오(제자는 필자)
유석은 그의 주동으로 군정정무회의가 만든 「남조선조치요강」때문에 군정 연장을 획책한다해서 크게 몰린 일이 있다. 이 조치요강은 당시 안재홍 민정장관의 비서였던 이교선씨가 이화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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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카페」시절(10)|이서구(제자는 필자)
지금도 그렇지만 극장주변에는 술집도 많고, 호떡집도 그득하다. 해가 저물어 극장 옥상에서 손님을 부르는 날나리 소리가 구슬프게 들리면 극장앞마당은 설레기 시작한다. 그때는 주간흥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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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제25화「카페」시절(6)
카페와「바」가 한창인 어느날 밤 이름을 잘 기억해낼 수 없는 한「바」에서 한국인과 일인이 민족적인 감정 때문에 싸움을 벌이고 일인 여급들이 한국인 편을 들고나선 사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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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59)-제자는 필자|「카페」시절(1)
필자 이서구씨(73)는 동아일보기자(20년), 토월회동인(26년), 대한극작가 협회장(45년), 대한무대예술원장(49년), 국방부종군극작가단장(52년), 한국방송인협회이사장(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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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제자는 필자|부산통화 개혁(5)
조치내용이 비밀리에 마련되고 있는 동안 한편에서는 담화문·해설문 등의 인쇄계획을 세우느라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새 화폐 인쇄문제는 의외로 수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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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전문학교(12)|김효연(제자는 필자)
일본의 군국주의가 193l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다음해에는 청말 최후의 황제인 오의를 옹립하여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는데 성공하자 이 같은 사실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에도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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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4)김효록
이미 설명했듯이 당시 한국에 온 외국선교사들은 포교수단으로 교육과 의료 사업을 활발히 하게됐다. 이것은 봉건사상에 사로잡힌 한국 민을 무지와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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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상업적 농업의 전개』일문 임병윤
근래 해외에서 우리학자들의 저서가 많이 발간되어 내외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에 임병윤 박사는 일제지배하의 한국농업실태분석을 기도한 표제의 저서를 발간하여 우리학계의 주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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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제19화 형정 반세기(9)
사내 이후의 총독들이 귀가 아프도록 내선일체를 내세웠으나 이는 말로만일뿐, 일제 36년 동안 형무소 안팎을 가릴 것 없이 조선인·일본인의 구별은 미격 했다. 조선 13도의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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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형정반세기(2)|권영준
전옥서란 이름이 감옥서로 바꿔지기는 1907년이라 들었다. 본디 한말의 전옥서는 남녀 옥이 동서로 갈려있고 옥마다 둥근 담이 둘러쳐져 있었으며, 감옥의 칸과 칸 사이에는 빈지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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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 남긴 민족의 발자취|고승제 교수 『농업이민에 관한 연구』에서
만주는 오늘날 중공령으로 돼 있지만 한국과의 관계에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지역이다. 고조선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 한민족의 옛 영토일 뿐 아니라 일제시대에 한국 이민의 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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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에 영향 준 「타고르」|김용직 교수의 비교 분석에서
한국의 현대시는 만해 한용운의 출현을 기다려 비로소 그 속에 깊이를 지니는 미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한용운의 시의 원동력의 일부가 된 것이 바로 「타고르」였다고 한국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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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방송 50년(11)|이덕근
처음 일본말로 된 방송국을 세웠다가 1933년에 소위 이중 방송이라 하여 우리말 방송을 따로 둔 것은 한국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불편을 덜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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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제자는 필자|제13화 방송 50년(1)
※편집자주=이덕근씨는 1943년 경성방송국에 입사, PD 또는 아나운서로 활약하다 해방 후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거쳐 현재 서라벌예술대학 방송학과 교수로서 계속 우리나라 방송문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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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제12화 조선은행(3)
한일합방이후 대정말기인 1926년까지는 말하자면 일본 상업자본의 대한진출이 본격화하였고 이들에 의한 금융자본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에 맞서 토착민족자본도 금융기관의 형태로 집결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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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경성제국대학(15)|강성태 &해방과 함께 교명도 「경성 대학」으로 변경|47년에는 현재의 「서울대학」으로 다시 개교|일제가 세운 학교 다녔다고 욕먹은 졸업생도
해방되던 해에 졸업한 의학부 17회 졸업생 (법문학부 18회에 해당) 에는 강중구 (개업) 김세경 (우석 의대 학생) 노종문 (개업·이비인후과) 임창제 (개업) 함용주 (개업·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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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문화 연구소 학술 발표회서(하)|사회 과학 연구의 변천과 과제|조기준
한민족의 사회 경제사가 근대 서구에서 발달한 사회 과학 방법론에 따라 연구·서술된 것은 반세기 이래의 일이다. 한국 사회 경제사는 이 시기에 개척되었고, 그 연구 결과는 국내외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