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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0) 눈앞에 닥친 휴전
1953년 3월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한국전쟁 휴전회담이 부쩍 속도를 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외치면서 휴전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사진은 서울 등 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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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37) 양보 못 할 포병장교 육성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1951년 봄에 대공세를 펼치면서 수도 서울을 다시 노렸던 중공군 대병력을 향해 중앙청 앞에서 마포까지 대포 400문을 배치한 뒤 강력한 반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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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36) 새 미8군 사령관
1953년 7월 막바지 휴전협상이 벌어지고 있던 판문점에서 미군 최고 지휘관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오른쪽 첫째가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셋째가 그해 2월 한국에 부임한 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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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34) “스탈린이 죽었답니다”
공산군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대한민국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한국을 떠나기 전 서울대로부터 1953년 1월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서울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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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33) 별 넷의 대장으로
대한민국 최초로 대장에 올라 어깨에 별 넷을 단 백선엽 장군에게는 당시 진급식 장면을 찍은 사진이 없다. 공식 행사를 사진 기록으로 남기기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던 대한민국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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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9) 경무대에 온 아이크
한국 측의 오랜 설득 끝에 1952년 12월 4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34대 대통령 당선자가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그 일행이 귀국길에 오르기 전 기념촬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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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8) 명분으로 미군을 설득하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앞두고 마크 클라크 당시 유엔군총사령관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클라크 장군은 공산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 채 휴전협정에 사인한 자신을 부끄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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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4) 미국 대통령과 그 아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왼쪽) 미국 제34대 대통령 당선자가 1952년 12월 한국을 방문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미 육사 출신의 존은 당시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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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3) 눈이 커다란 미국 대통령
1952년 12월 방한한 미국 제34대 대통령 당선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경기도 광주의 수도사단을 방문해 한국군 훈련을 참관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백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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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2) 한국 땅에 온 아이젠하워
6·25전쟁 중 방한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인(왼쪽에서 둘째)이 1952년 12월 4일 미 3사단 15연대 대원들과 함께 야전 식사를 하고 있다. 그해 11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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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1) 국군 증강 작업 계획안
중공군이 1951년 경기도 안양 인근의 수리산에서 격렬한 참호전을 펼치고 있다. 52년 중부전선에서 불붙은 고지전 기간 동안 중공군은 후방에 깊고 긴 터널을 구축해 미군의 포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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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02) 먼저 닥친 인사 문제
1951년 6월 12일 강원도 속초의 국군 1군단 사령부를 방문한 정일권 제5대 육군참모총장(오른쪽). 백선엽 소장(왼쪽)은 당시 1군단장으로 정 총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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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01) 까다로운 이승만 대통령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당시로선 드물게 국제적 시야를 가진 지식인이었다. 사진은 1950년 9월 29일 서울 수복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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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200회 특집] 60년 전 한반도 ‘별들의 전쟁’
나는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임했다. 그 전까지 국군 1사단장, 1군단장, ‘백 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 2군단장을 차례로 맡으면서 전선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러나 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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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9) 참모총장이라는 자리
1952년 8월 이승만 대통령(가운데)이 미 8군과 8군 사령관에게 표창장을 수여하면서 공적 내용을 읽고 있다. 이 대통령 오른쪽은 제임스 밴플리트 8군 사령관, 왼쪽은 그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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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7) 국군 현대화의 초석
중공군은 1953년 휴전협정 조인 직전 국군 2군단 방어지역인 금성 돌출부를 향해 막바지 대공세를 퍼부었다. 백선엽 장군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맡아 중공군의 이 같은 막바지 총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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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6) 불을 뿜는 2군단 야포
1952년 2월 아군의 4.5인치 로켓포가 적진을 향해 불을 뿜고 있다. 국군 2군단은 52년 5월 금성 돌출부 너머의 중공군을 향해 2만 발의 포탄을 발사해 막대한 타격을 입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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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5) 중공군을 겨눈 포신
미군 포병대의 155㎜ 야포가 1951년 서울 북방을 공략하려던 중공군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다. 국군은 6·25전쟁이 터진 뒤 1년6개월 정도가 지난 52년 초반쯤에야 미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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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4) 중공군의 이상한 움직임
중공군은 1950년 10월 참전한 뒤 압도적인 병력으로 국군과 유엔군을 압박했다. 52년 4월 다시 출범한 백선엽 장군의 국군 2군단은 강원도 금성지구 돌출부의 전선 너머에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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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3) 밴플리트의 눈물
1952년 4월 국군 2군단 창설식이 끝난 뒤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오른쪽에서 둘째)이 한·미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조종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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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2) 2군단 창설식
현대전 수행능력을 갖춘 2군단의 창설로 국군은 면모를 일신했다. 사진은 군단 창설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백선엽 장군 제공] 새로 창설한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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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1) 미군을 따라 배우다
물이 새어 나오는 땅, 천전리에 천막을 치고 엉성하나마 진용을 갖춘 뒤 출범한 국군 2군단의 참모들은 초창기에 매우 바쁘게 생활했다. 아침에 일어난 뒤 세수와 식사를 간단히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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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89) 2군단의 진용을 갖추다
기회는 늘 닥치지만 왔을 때 잘 잡아야 내 것이 된다.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한반도가 전화(戰火)에 휩싸인 뒤 미군이 급히 몰려오고, 여러 나라가 유엔의 이름으로 지원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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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88) 느닷없이 찾아온 미8군 참모
국군 2군단은 일찌감치 있었다. 내가 1950년 6·25를 맞던 해, 북한군의 남침으로 낙동강 전선으로 밀려났다가 저들의 공세를 꺾고 북진을 거듭해 평양을 넘어 압록강 쪽으로 진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