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9) 참모총장이라는 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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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8월 이승만 대통령(가운데)이 미 8군과 8군 사령관에게 표창장을 수여하면서 공적 내용을 읽고 있다. 이 대통령 오른쪽은 제임스 밴플리트 8군 사령관, 왼쪽은 그해 7월 새로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던 백선엽 장군이다.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을 맡으면서 한국의 모든 전선을 폭넓게 지켜볼 수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제공]

나는 강원도 소토고미의 비행장에서 L-19 경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한 뒤 지금의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 자리에 있던 미8군 사령부로 향했다. 사령부 정문을 들어선 나는 곧장 제임스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자 밴플리트 장군이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반가운 얼굴로 다가섰다. 그리고 악수를 하면서 내 어깨를 감싼 그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한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나와 밴플리트 장군은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로 환담을 했다. 육군 최고 지휘관의 자리에 올랐지만 내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1948년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약 1년여 근무한 것을 제외하면 나는 줄곧 죽느냐 사느냐를 두고 싸움을 벌여야 하는 전선에서 지냈다. 총탄이 날아드는 전선의 상황을 직접 관리하면서 눈앞의 적과 어떻게 싸우느냐만 고민했던 내가 이제는 대한민국 지상군(地上軍)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리에 올랐으니 생각이 적을 리 없었던 것이다.

 나는 밴플리트 장군에게 이런 심사(心思)를 내비쳤다. “나는 나이가 젊은 편인데, 어떻게 하면 책임이 막중한 육군참모총장 직을 잘 수행할 수 있겠느냐”고 내가 물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역전(歷戰)의 장군이었다. 또한 그는 1892년생으로 나와는 28세의 나이 차가 있는, 말하자면 아버지뻘에 해당하는 군인이었다.

 그로부터 진지한 충고를 듣고 싶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밴플리트는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당신의 여러 가지 능력을 감안하면 참모총장 직무를 수행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오. 단지 내가 해 줄 충고가 있다면, 결코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말을 많이 하는 대신 참모와 부하 지휘관들의 말에 귀를 많이 기울여야 합니다.”

 마치 준비라도 했다는 듯 그의 충고는 이어졌다. 그는 내게 어려운 일이 닥칠 경우에는 바로 결정하지 말고 하룻밤을 곰곰이 생각해 본 뒤 결론을 내리라는 당부도 했다. 그는 오랜 시간 생각을 한 뒤 내린 결정에 관해서는 ‘예스’인지 ‘노’인지를 분명히 하라고도 했다. 마지막 그의 당부는 “많은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화를 내지 말 것”이었다.

이종찬(1916~83)

 그는 당시 한국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미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휴전협상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전선의 상황은 어떠한 낙관(樂觀)도 할 수 없었다. 정치적인 상황도 복잡했다. 내 전임자인 이종찬 장군의 육군참모총장 사임 또한 ‘부산 정치파동’이라고 불리는 당시의 정치적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기도 했다. 아울러 격렬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한국의 사회 상황도 어지러웠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육군참모총장에 오르는 나이 젊은 한국 지휘관을 그는 걱정했던 것이다. 아직은 혈기(血氣)가 넘치는 내가 복잡한 상황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남의 말을 끝까지 듣고, 신중하게 사안을 판단하고, 남에게 함부로 화를 내지 말라는 충고였다.

 듣기에 따라서는 평범한 내용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가슴속에 소중히 새기기로 했다. 그때까지 내가 겪었던 전선 상황 전체보다 더 복잡한 국면(局面)을 맞아야 하는 게 참모총장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때까지 전선만을 누비며 살아와 정치판의 복잡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밴플리트 장군과 헤어져 다시 여의도 비행장으로 왔다. 미 공군이 지어 놓은 간단한 가건물이 일종의 대합실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장택상 당시 국무총리를 만났다. 그 또한 서울을 들렀다가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장 총리는 내가 육참총장에 오른 것을 모르고 있었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이유를 설명하자 장 총리는 “그래, 잘 됐구먼. 백 장군, 정말 축하해”라면서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와 함께 대합실에서 나눈 이야기가 ‘부산 정치파동’이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를 위해 행한 그 파동의 전말을 내게 들려줬다. 그러나 나는 즉각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얽히고설킨 당시의 정세(政勢)가 단번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장 총리와 함께 올라탄 미 공군의 C-47 수송기는 곧장 부산으로 향했다. 나는 이 대통령이 머물고 있던 임시 경무대, 즉 경남도지사 관사를 찾아갔다. 신고식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날은 7월 23일이었다. 응접실에 들어선 뒤 약식으로 취임 인사를 했다. 대통령이 응접실 한가운데 서 있었고, 나는 문에서 들어선 뒤 거수경례를 하면서 취임 신고를 했다.

 이 대통령의 얼굴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신고가 끝난 뒤 나는 이 대통령과 응접 탁자를 가운데 두고 앉았다. 비서들이 차를 날라 왔다. 대통령은 당시 있었던 ‘정치파동’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런 뒤에 대통령은 “참모총장은 대통령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때야 내가 비로소 일선의 군인이 아닌, 정치권과 바짝 붙어 복잡한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군인의 신분이 됐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통령은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나는 당시로서는 정확하게 그 상황의 배경을 알 수 없어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저 적을 맞아 싸워 물리치면 되는 그런 군인의 신분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의중을 잘 읽으면서 그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정치판의 기류(氣流) 또한 잘 이해해야 했다. 그러나 군은 정치에서는 한 발 물러나 중립을 취해야 한다. 섣불리 정치에 개입하면 군의 토대를 망가뜨리기 십상이었다. 이 원칙은 절대로 지켜야 했다.

 그런 점에서 밴플리트 장군이 부산에 도착하기 전 내게 해 줬던 충고를 떠올렸다. 군인으로서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제대로 호흡을 맞추는 일이 중요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가 내 앞에 펼쳐졌다는 느낌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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