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3) 밴플리트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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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4월 국군 2군단 창설식이 끝난 뒤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오른쪽에서 둘째)이 한·미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조종사로 참전했던 그의 아들은 작전에 나섰다가 끝내 귀환하지 못했다. 백선엽 장군(왼쪽에서 둘째)이 침통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국군 2군단 창설 기념식이 끝난 뒤 막사 안으로 들어가 서로 환담을 할 때였다. 나는 자연스레 제임스 밴플리트 사령관 옆으로 다가갔다. 2군단 창설, 결국 한국이 가장 원하는 국군 강화 작업의 첫걸음을 뗀 부대의 지휘관으로서 그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해서였다.

밴플리트 사령관 옆에는 나와 파머 미 10군단장, 오다니엘 미 2군단장, 와이먼 미 9군단장이 함께 있었다. 기념 행사장에서 꼿꼿한 자세였던 그가 이상할 정도로 풀이 없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잠시 우리를 바라보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제, 제 아들이 군산 비행기지를 떠나 폭격을 위해 북한으로 발진했는데…행방불명 상태라고 들었다….” 그는 말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기념 행사장에서의 그는 아들이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타들어가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장군이었으나, 우리에게 그 소식을 알릴 때는 그저 평범한 아버지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애써 그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지만 나와 옆에 있던 미 군단장들은 모두 그의 눈물을 봤다.

그의 아들 제임스 밴플리트 2세는 미 공군 중위였다. 6·25전쟁에 참전해 군산기지에서 발진하는 B-26을 타고 북한 지역으로 날아가 폭격을 하는 임무를 맡았다. 군단 창설식이 열리기 하루 전이었던 52년 4월 4일 그는 군산 비행기지에서 이륙해 북한 지역으로 날아가 야간 폭격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밴플리트 장군은 더 이상 아들에 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잠깐 비친 눈물로 끝이었다. 그는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여러 사람과 대담하다가 서울의 8군 사령부로 돌아갔다. 나는 달리 그를 위로하지 못했다. 아니, 어떤 말로도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심사를 달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월턴 워커(1889~1950)(左), 샘 워커(1925~)(右)

50년 6·25전쟁의 최대 위기였던 낙동강 교두보 방어전에서 적을 물리쳤던 월턴 워커 8군 사령관과 그의 아들도 그랬다. 둘 모두 한국을 위해 싸웠던 참전 미군이었다. 워커 장군이 50년 12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그의 아들 샘 워커 대위가 보여준 태도도 한국 지휘관으로서는 군인의 정신이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아버지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미군은 그에게 특별 휴가를 준 뒤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했다. 그러나 샘 워커는 그것을 거부하고 전장(戰場)에 남아 아버지의 뜻을 이어 계속 싸우겠다고 했다. 그 소식이 도쿄의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총사령관 귀에 들어갔다. 맥아더 장군은 다시 샘 워커에게 전문을 보냈다. ‘반드시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다. 이는 명령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그의 아들을 잃었다. 그는 그 슬픔을 애써 참으려 했고, 2군단 창설식이 열리는 동안 아무도 그런 내면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참았다. 결국, 행사가 끝난 뒤 잠시 보인 눈물이 군인으로서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것에 대해 그가 표출한 감정적인 반응의 전부였다. 그는 그 뒤 나와 늘 접촉하면서도 아들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슬픔이 연기처럼 흩어져 그저 사라질 리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먼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흘려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 밴플리트는 한국에서 미 8군 사령관의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행방불명된 아들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의 부인은 그렇지 않았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미군은 당시 전쟁이 벌어지던 한국 땅에 가족을 데려올 수 없었다. 규정이 그랬다. 어느 때라도 위험이 몰아닥칠 수 있는 한국 땅보다는 안전한 일본에 가족을 머물도록 했다. 이 규정은 나름대로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그런 규정에도 불구하고 밴플리트의 부인은 한국 땅을 자주 밟았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라기보다 잃어버린 아들의 유해를 찾거나, 아들이 머물렀던 땅에서 자식의 체취라도 더 느껴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2군단을 창설하고 4개월여 동안 나는 군단장으로 전선을 지키다가 육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올랐다. 나는 총장으로 있으면서 늘 서울과 대구를 오갔다. 대구에 육군본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 8군 사령관과 여러 가지 협의를 하기 위해서는 사령부가 있던 서울에 자주 들러야 했다.

내가 서울에 오면 머물던 곳이 지금의 필동 코리아하우스 자리였다. 그곳에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서울에 출장 오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위해 그곳에 미군이 숙소를 마련해 줬던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자주 만났던 사람이 밴플리트 사령관의 부인이었다. 부인은 가끔 대구의 육군본부에도 찾아왔고, 내가 서울에 오면 이곳으로 자주 찾아왔다.

자주 만났던 터라 격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사이였다. 따라서 부인과는 미국의 여러 가지 화제를 두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미군 고위 장교들의 자국 내 생활, 승진을 두고 벌이는 미 장교들의 경쟁의식 등은 부인이 친절하게 내게 설명해 준 내용들이었다. 그 부인 덕분에 나는 미군들의 다양한 면모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참 그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인이 잠시 말을 멈추는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긴장을 했다. 손수건을 잡아 쥔 그녀의 손이 다시 오므려지고, 눈가에 다시 손수건이 올라가는 경우는 그녀가 울기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늘 말없이 울었다. 조용히 눈물을 닦으면서 “백 장군, 제 아들…시신이라도 어떻게 찾을 방법은 없는가요…”

북한 지역에서 행방불명된 그의 아들은 사망한 게 분명했다. 사고가 벌어진 지 6개월 이상이 흘렀지만 아들의 유해라도 품에 안고 싶어하는 모정(母情)은 억누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도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매번 그렇게 슬픔에 짓눌린 어깨를 보이면서 돌아갔다.

아버지를 잃은 샘 워커 대위, 아들을 잃은 밴플리트 부부 모두 한국을 위해 그런 희생을 감수한 미군과 그 가족이다. 또 있다. 미 해병항공사단장 해리스 장군도 해병 대대장으로 북진했던 아들을 장진호 전투에서 잃었다.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의 아들은 보병중대장으로 중상을 입었 다.

이들이 감수한 고귀한 희생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받쳐준 토양의 한 부분이다. 그들이 보여준 피와 땀, 그것은 대한민국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우정(友情)이다. 나는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 희생한 그 영령들에게 늘 감사한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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