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8) 명분으로 미군을 설득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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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휴전협정을 앞두고 마크 클라크 당시 유엔군총사령관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클라크 장군은 공산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 채 휴전협정에 사인한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는 52년 백선엽 장군의 주장을 받아들여 방한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경무대 방문을 설득했다. 사진전문잡지 라이프에 실린 작품이다.


서울 동숭동의 미8군 사령부 정문을 지키고 있는 미군 헌병들은 나를 잘 알았다. 한국을 지원하는 군대였으니, 그들은 우리의 동맹군(同盟軍)인 셈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도 함께 어깨를 하고 적군에게 맞서 싸우는 대한민국 국군은 역시 동지였고, 우군(友軍)이었다. 게다가 나는 별 셋을 단 대한민국 국군의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아울러 나는 동숭동 8군 사령부의 ‘단골손님’이었다. 늘 제임스 밴플리트 사령관을 만나러 왔고, 심지어 때에 따라 사령부 안에 있던 게스트 하우스에서 자주 숙박까지 하는 손님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가 묵고 있던 곳이라 경호가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들은 정문 앞에 다가선 내 지프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바로 차단기를 들었다. 거수경례까지 붙였다. 나는 평소 하던 대로 그들에게 답례를 하면서 정문을 지났다. 나는 곧장 사령부 본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2층의 밴플리트 사령관 집무실 안에 있었다. 나는 먼저 2층으로 올라가 그 부속실을 쓰고 있던 밴플리트 장군을 찾았다.

 밴플리트 장군은 내가 급히 사령부를 찾아온 속내를 짐작하는 눈치였다.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밴플리트 사령관을 보자마자 말을 꺼냈다. “장군, 이런 식으로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그냥 한국을 떠나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밴플리트 사령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 알고 있습니다. 나 또한 왜 설득을 하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소용없습니다. 대통령 당선자의 뜻이 워낙 강합니다.” 그는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끝내 경무대를 방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앞서 소개한 대로, 신중하고 사려가 깊었던 아이젠하워였다. 아직 대통령에 취임하지 않은 터라 대통령과 같은 공식 행사를 최대한 자제하겠다는 원래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1942년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 시절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오른쪽)와 부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 두 사람은 미 육군사관학교 2년 선후배 사이로 친분이 두터웠다.

 나는 난감하기만 했다. 밴플리트 장군을 찾아가면 무슨 수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밴플리트 사령관은 내 표정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백 장군, 옆방에 있는 클라크 대장을 설득해 보시오”라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마크 클라크 대장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한국전쟁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을 미 대통령 당선자에게 보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통해 설득해 보면 만에 하나라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언질이었다. 마침 클라크 장군은 혼자 방에 있었다. 나는 그와 매우 친숙한 사이였다. 그는 도쿄에 머물면서 유엔군 총사령관을 맡아 그 예하의 미 8군은 물론, 한국전쟁의 모든 상황을 관리하는 최고 지휘관이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을 자주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와 동행하면서 각종 논의를 거듭하던 사이였다.

 그는 매우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유럽에 주둔 중일 때는 소련과 여러 차례 협상을 벌이면서 냉혹했던 공산국가들의 협상 술책에 질려 상당히 염증을 표시하곤 했던 인물이었다. 나는 그가 사용하고 있던 사무실의 소파에 앉자마자 속으로 내 생각을 정리하기에 바빴다. 점차 나는 명분으로 그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생각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때 경무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의 모든 요인이 아이젠하워 당선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결국 경무대를 방문하지 않은 채 한국을 떠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클라크 장군도 예상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내 논리를 들이댈 생각이었다. 클라크 사령관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져가고 있었다. 평소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던 내가 일그러진 얼굴로 사무실에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이니 매우 당황했던 것이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출범한 뒤 겨우 2년 만에 맞은 전쟁입니다. 공산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느라고 지금은 별게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땅을 차지하려는 북한군과 중공군을 맞아 50만의 대군을 모았습니다. 우리는 계속 싸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그들에 맞서 싸울 의지도 대단합니다.”

 클라크는 역시 말없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불쾌하다는 표정도 얼굴 위에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이왕 내친김에 끝까지 내 주장에 ‘명분’을 실어볼 생각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우리를 도와줘서 힘겹게나마 공산 침략군을 막아내고 있는 처지였다. 그리고 미국 또한 이 땅이 공산국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함께 공산군에 맞서 계속 싸워가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 그런 두 나라의 협력관계를 위협하는 문제가 생기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내 생각을 빨리 정리해 나갔다. 이제는 더 물러설 때가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게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 오른 사람의 도리(道理)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시다시피, 지금 경무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모든 요인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 안에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경무대를 방문하지 않고 한국을 떠난다면 우리는 무슨 명분으로 미군과 함께 공산군에 맞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군의 50만 병력은 미군에게 협조할 명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클라크 장군의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분노가 치미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할 말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전선을 함께 형성하는 우군과 동지로서 내가 내세우는 명분을 반박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손을 내밀더니 내 말을 막고 나섰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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