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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1) 미군을 따라 배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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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군단은 앞으로 미군으로부터 그 작전지역을 물려받아 지켜야 했다. 따라서 아침에 일어나 열리는 브리핑은 미 9군단이 맡고 있던 작전지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투 상황에 관한 내용이었다. 전날 벌어진 군단 관할 중동부 전선의 전투 상황, 당일(當日) 전투 계획과 예상, 각 부대의 배치와 보급 및 병력 상황, 날씨 등을 체크하는 게 일이었다. 물론 미군과 2군단의 참모들이 함께 들어야 하는 내용들이었다.

국군 2군단은 미군으로부터 새롭고 강한 화력의 상징인 155㎜ 야포를 지원받았다. 강원도 북부에 마련한 2군단 포진지에서 포병단 소속 부대원들이 155㎜ 야포를 발사하는 장면이다. [백선엽 장군 제공]

우리의 당시 학습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일대일의 밀착형 교육 형태였다. 그러나 단체로 함께 모여 듣는 과정도 있었다. 미군이 2군단의 장교들에게 계급의 상하 구별 없이 전체적으로 강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침의 브리핑과 그러한 단체 교육 말고는 모든 것이 일대일의 맞춤형 교육이었다. 미군은 그를 ‘OJT(On the Job Training·현장훈련)’라고 했다. 정보와 인사 참모를 비롯해 병참과 통신·수송·공병 등 모든 분야에서 일대일의 현장훈련이 벌어졌다.

그때까지 우리는 미군이 실제 내부에서 어떤 작전을 구상하고, 어떻게 보급선을 이어가며, 통신은 어떻게 조립하는지 등은 전혀 알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훈련기간은 약 5주였다. 나는 각 분야 참모들의 역량을 믿었다. 한국인은 배우는 시간이 빠르다. 손재주와 머리가 뛰어나 무엇인가를 배우는 학습 능력이 뛰어난 편이다.

당시 군단 창설과 함께 세운 무기 공장에서 국군 병사가 기계를 만지는 모습이다. [백선엽 장군 제공]

우리 참모들은 미군들로부터 그들의 전반적인 지식을 열심히 배웠다. 5주의 훈련기간이 짧다고 하면 짧은 기간이겠지만, 전시(戰時)에서의 그 시간은 매우 소중했다. 참모들도 아침 일찍 기상한 뒤 브리핑을 듣고 각 현장을 쫓아다니면서 미군 파트너에게 열심히 배웠다.

나는 군단장으로서 특별한 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그저 와이먼 미 9군단장과 헬기나 지프로 이동하면서 전선의 각 상황, 전방 배치 부대의 전투 현황 등을 살피는 게 주요 업무였다. 미군 전방 부대도 다녔고, 그 밑에 배속된 한국군 부대에도 열심히 다녔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5주의 교육이 모두 끝이 났다. 이제 정식으로 국군 2군단이 출범해야 할 때였다. 우리는 물이 많이 나오는 천전리를 떠나 화천 북방의 소토고미로 사령부를 옮겼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 개념의 군단이 이제 국군에도 자리를 잡는 것이다.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실감이 잘 나지를 않았다.

역시 소토고미의 허허벌판에 천막을 치고 우리는 그곳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틀기 시작했다. 6·25전쟁이 벌어진 뒤로 국군은 줄곧 허약한 싸움꾼이었다. 소총은 미군의 M-1 갤런드를 지급받은 상태였지만 별달리 내세울 화력(火力)이 없었다. 당시 사단별로 1개 대대의 105㎜만 보유한 국군은 그보다 성능이 뛰어난 야포로 무장한 북한군과 중공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우리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면서 전선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을 상대로 혈전(血戰)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미군의 화력 지원 덕분이었다. 그런 미군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국군은 그저 북한군과 중공군이 즐겨 찾는 ‘먹잇감’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제 국군이 정규 포병을 운용하게 됐다는 점은 한국 국방(國防)의 역사에서는 크게 취급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우리가 소토고미로 옮긴 뒤 그런 특별한 감회에 젖게 하는 일이 있었다. 국군에 정식으로 지급된 155㎜ 야포 대대를 이끌고 대한민국 포병이 2군단에 배속된 ‘사건’이다.

그 첫 주역은 노재현 대령이었다. 나중에 국방장관을 지낸 노재현 대령은 155㎜ 첫 포병지휘관의 명예를 안고 내가 있던 2군단에 배치됐다. 나는 부대에 도착한 그로부터 신고를 받으면서 국군이 단독으로 현대전을 수행할 수 있는 화력의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을 실감했다.

내가 1951년 4월 경기도 파주 인근의 관산리에 있던 국군 1사단을 떠나 강원도 강릉의 1군단으로 부임하기 위해 준비를 할 때였다.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평양 진격, 운산 전투까지 함께 나를 지휘하고 가르쳤던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네 진급시키는 것은 좋지만, 이곳 한국군 1사단에 더 남아 있는 게 낫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그의 발언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보잘것없는 화력의 국군 1군단을 지휘하며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전차와 포병을 마음껏 동원할 수 있는 미 1군단 산하의 1사단에 남아 더 전적(戰績)을 쌓는 게 좋을 것이라는 충고였다. 그는 여러 번 그런 말을 하면서 떠나려는 나를 만류했다.

아주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전장(戰場)에서는 화력(火力)이 가장 필요하다. 당시 한반도의 전장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사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강한 야포를 운용하는 일이었다. 강릉에 1군단장으로 가 있던 동안에 나는 자칫 ‘핫바지 군단장’으로 전락할 뻔했다. 군단장 예하에 강력한 포병이 없으니 사단을 충분히 지원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 스스로 운용할 수 있는 화력이 없어 당시의 강릉 1군단장은 사단장과 연대장의 인사와 보급만을 챙기는 별 볼 일 없는 군단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미 5포병단을 축으로 하는 강력한 포병 화력이 주어졌고, 광주에서 훈련을 받은 뒤 다시 2군단에 배치를 받아 전투경험을 쌓기 위해 배속되는 국군 155㎜ 포병부대가 내 밑에 있었다. 게다가 통신과 병참, 수송과 공병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군으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은 뒤 장비까지 갖춘 예하 부대가 내 지휘에 들어오게 됐다. 새로운 개념의 국군 군단이 창설된 것이다.

한국군 증강 작업에 관심이 많은 ‘영감님(Old man)’, 제임스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은 더 세심한 배려를 해줬다. 그는 국군 2군단 예비부대로 미군 1개 연대를 보내줬다. 새로 출범하는 2군단의 후방을 미 1개 연대가 받쳐준다는 점은 여간 든든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쳤다. 52년 4월 5일 군단 창설식을 열었다. 군단 옆에 있는 비행장 활주로 상공 위로 L19 비행기 여러 대가 나타났다. 이승만 대통령, 밴플리트 사령관 등을 태운 비행기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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