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의 해, 누가 용의 등에 올라탈까
위의 그림은 민화 속에 나타난 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아래 왼쪽은 경기도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용 무늬 탁자(부분). 오른쪽은 사찰에서 쓰는 용 모양 목어(木魚).머리는 낙타 같고
-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백두산 정계비
숙종 38년(1712) 세운 ‘백두산정계비’는 현재진행형 문제다. 문제의 발단은 당시 조선 대표들의 부적절한 처신에 있었다. 청의 대표는 오랄(烏喇:길림성)총관(總管) 목극등(穆
-
이토에게 쫓겨난 고종, 이토 빈소 찾아가 조문 ‘굴욕’
1909년 11월 5일 일본 도쿄에서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오른쪽 예복 대열 맨 앞이 조선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진가 권태균 제공] 안중근의 이토 사살
-
[옛책 다시보기] 9차례 투옥 식민지 지식인 안재홍, 백두산에서 무엇을 보았나
정민 교수가 풀어읽은 백두산 등척기 안재홍 지음 풀어쓴이 정민, 해냄 208쪽, 1만원 독립운동가·언론인·정치가였던 민세 안재홍(1891∼1965). 육당 최남선, 위당 정인보
-
明 신뢰 얻으며 실리 외교, 북방영토 확장 결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흔히 외교는 평화적 수단이고 군사는 전쟁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양자는 모두 국제정치의 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세종은 국제무대에서 목소리의
-
明 신뢰 얻으며 실리 외교, 북방영토 확장 결실
송조천객귀국시장(送朝天客歸國詩章) 북경에서 조선 사신을 송별하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세종이 취한 명과의 사대 외교는 다양한 포석이었다. 사진가 권
-
[그때 오늘] 조선과 청나라 간 국경회담 결렬되다
1910년께 간도 용정 거리. 한국인의 간도 이주는 18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간도 이주자가 계속 늘어나자 이주를 엄하게 처벌하던 정부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1900년 이후
-
사라진 ‘백두산 정계비’ 복원돼 대구에 세워졌다
4일 광복회원과 간도되찾기운동본부 회원 등이 대구 망우공원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뒤 “간도를 되찾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경일대 제공] 사라진 ‘백두산 정계비(定界碑)’
-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김일성 백지 위임 사인도 물거품”
▶최초로 공개된 김일성의 친필 서명. 김 주석은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이 북한의 금강산 관광개발사업을 추진하도록 하고, 북한 측 파트너인 금강산국제그룹이 작성한 보고서에 서명했다
-
간도 표기된 중국 지도 발견
‘서간도(西間島)’‘동간도(東間島)’란 지명이 표기된 중국 지도 두 장이 발견됐다. 중화민국 타이완(臺灣) 중앙연구원의 근대사연구소에 소장돼 있는 ‘옌지(延吉)’ ‘창바이(長白)
-
[찾아라!논술테마] 한 입 정보
▶ 중화사상(中華思想) 중(中)은 중앙을, 화(華)는 문화를 뜻한다. 중국 문화가 최고며, 모든 것이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 만방에 퍼져야 한다는 사상이다. 중화에는 예부터 이적(
-
[시론] 중국 눈치보다 백두산까지
여름이 유난히 길고 무더웠기 때문일까. 초가을 아침 바람이 더없이 상큼한 요즘이다. 그러나 신문 1면에 난 사진 한 장이 상쾌한 아침 기분을 잡쳤다. 중국이 내년 1월 창춘(長春
-
거대 흙벽 … "여기가 토문강일 것"
병풍처럼 두른 검은 흙벽 사이로 강이 흐른다. 흙벽은 바로 흙(土)으로 된 문(門) 모양을 하고 있었다.성인 남자 키의 네 배가 훨씬 넘는 거대한 흙벽이 강 양편에 펼쳐져 있다.토
-
[분수대] 쑹화강
간도(間島)는 그리운 이름이다. 아련한 우리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다.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자기 민족의 발상지라며 이 일대에 이주와 접근을 막았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낀 섬
-
[한·일 협정, 베트남전 외교문서 공개] 55년 만에 정부문서 공개
두만강 이북 간도 지방이 우리 영토이며, 일본이 중국에 간도를 넘긴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담은 정부 문서가 55년 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백두산 정계비에 조선.청
-
"토문강과 두만강은 별개"
토문강과 두만강이 서로 다른 강임이 중국 정부의 공식 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1964년 북한과 중국 간 국경 문제를 정리한 '중조변계의정서'(中朝邊界議定書)를 통해서다.
-
백두산 정계비 터에 표석만… 고구려연구재단 첫 확인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은 3일 "최근 북한을 다녀온 고구려유적 조사단이 백두산 정계비(定界碑) 터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조사단이 찍어 와 공개한 사진(上)엔 정계비를 받
-
[삶과 문화] 백두산 가는 길
상식과는 달리 백두산에 관한 과거 기록은 흔치 않다. '삼국사기' 등 오래된 사서(史書)에 백두산의 존재가 보이지만 그것에 지금처럼 거창한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았다. 백두산이 적극
-
[내 생각은…] 간도문제 우물쭈물할 시간 없다
간도 문제는 더 이상 늦출 시간이 없다. 왜냐하면 국제적으로 100년이 지나면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관례가 있기 때문인데 그 기간이 바로 2009년이다. 중국은 국
-
"토문강은 쑹화강" '간도는 조선 땅' 지도 발견
▶ 1909년 제작된 백두산 일대의 지도. 쑹화강의 지류를‘토문강’으로 표기하고 두만강과 압록강은 따로 표시했다. '간도 분쟁'의 핵심으로 지목되면서도 현재의 어느 강을 가리키는지
-
두만강 이북 '간도는 조선땅'
일본이 간도(間島)지역을 중국에 넘겨준 '청.일 간도협약'의 바탕이 됐던 '토문강=두만강'설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지도가 발견됐다고 9일 조선일보가 보도했다. '토문강(土門江)'을
-
[중앙 시평] 절대로 확실한 미래를 위하여
지난 6월 남한의 초등학생들이 백두산에 올랐다. 분단 이래 초유의 행사에 텔레비전 방송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며 물었다. "백두산 느낌이 어때요?" "시시해요." 너저분한 돌무지의 산
-
북-중 국경선 밝힌 책 첫 출간
백두산과 압록강.두만강을 양분한 북한.중국간의 국경선을 명확히 밝힌 책이 처음으로 나왔다. 북한문제 전문가인 세종연구소 이종석 연구위원이 쓴 '북한-중국관계, 1945~2000'
-
[압록·두만강 대탐사] 10. 강은 대륙을 열고 있네
10. 조선족들 "나는 누구인가?" 백두산에 국경비가 처음 세워진 것은 1712년(조선 숙종)이다.그로부터 근 3백년이 지난 지금,그 정계비는 자취를 감추고 시멘트로 만든 계장(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