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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상 수상자 공적
▲이병도(학예)=60여년간 한국사학의 연구와 발전을 주도하면서 「역주 삼국사기」를 완성하여 고대사연구에 신기원을 개척했다. 「고려시대의 연구」「한국사 고대편」「자료 한국유학사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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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교모의 다양화
서울시교위가 올해 중학교신입생들부터 그들의 교복과 교모를 학교별로 다양화하도록 조치한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런 일은 사실 벌써 실전에 옮겨졌어야 하는 일인데 그동안 학생들의 교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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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하씨 별세
독립유공자로 배재학당 교장을 지낸 장룡하씨가 15일하오6시 서울성동구중곡동110의37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 장씨는 3·1운동 당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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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 중·고 강남 이전 내년부터, 신림동에
명문사립 배재 중·고교(서울 중구 정동환)가 79학년부터 강남으로 이전한다. 6일 시교위에 따르면 배재학원은 현재 교지 8천평 중 4천평을 율산「그룹」에 팔고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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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의 노래
나보기가 역겨워/가실때에는/말없이 그이/보내드리오리다…. 소월의 시는 언제나 아련한 애상에 젖어 있다. 흙이 묻은 언어로, 풀기가 남은 무명옷의 그윽한 향기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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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긍선 박사 기념사업회 발족 「전기」출판. 추모강연회 열어
4일은 우리나라 개화기의 의학선구자로 평생을 의학과 육영사업에 몸바친 해관 오긍선 박사의 탄생 1백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을 맞아 그의 유덕과 위업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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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교회
서울의 정동은 아직도 이국적인 정취가 남아 있는, 아마 유일한 곳이다. 지금은 대로가 가로질러 고즈넉한 분위기는 사라졌지만, 사뭇 색다른 건물들의 옛 빛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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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제54화 배재학당(57)-고종황제가 1886년 하사한 현판의 글씨|윤성열|교사진
1920년대의 배재고보 교사진은 당대 일류 교육자들과 학자들로 짜여져 있었다. 이중화·강매 교사는 정인보 선생 등과 학문의 경지를 나란히 하는 학자들이었으며 김성호·김인식·신봉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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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제54화 배재학당(56)-고종황제가 1886년 하사한 현판의 글씨|윤성열|배재출신 의사
초기 배재 고보 출신들의 직업을 분류해보면 의사가 가장 많다. 의사가 되면 일인들도「선생님」이란 칭호를 붙여주기 때문에 일제의 민족차별을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 의전에 많이 진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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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제54화 배재학당(55)-고종황제가 1886년 하사한 현판의 글씨|윤성열|정동 골목 편싸움
배재학당 학생들의 항일 감정은 3·1운동 이전부터도 아주 강렬해 일인 학생들과 자주 편싸움을 벌였다. 특히 배재와 경성중학(현 서울고의 전신) 일인 학생들간의「정동골목 싸움」은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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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제54화 배재학당(54)-고종황제가 1886년 하사한 현판의 글씨|윤성열|배재출신 문인
1920년대 배재출신 중에는 유명한 문인들이 많다. 방인근·나도향(빈)·박팔양·김팔봉·김소월 등이 모두 배재 출신이다. 1917년 학당을 졸업한 방인근이 가장 선배고 나머지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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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제54화 배재 학당-고종황제가 1886년 하사한 현판의 글씨(53)|3·1운동|윤성열
3·1독립운동의「배재」학생대표로는 학당 측에서 김병호(11회) 장별하(12회) 장대찬(13회), 고보 쪽에서는 신봉조(3회) 이병선(3회)등이 주동자 역할을 했다. 고보보다는 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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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배재학당(고종황제가 1886년 하사한 현판의 글씨)(52)|이중졸업|윤성열(제자·윤성열)
4년제였던 배재고보는 1922년4윌 일본 문부성의 조선 교육령에 의해 5년제로 개편됐다. 배재는 5년제로 된 후에도 학당과 「고보」가 여전히 일원적으로 운영됐다. 일일이 총독부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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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제54화 배재학당(51)
배재학당은 1916년2월1일 총독부의 강압적인 교육령에 의해 「미션·스쿨」 중에서는 가장 먼저 「고등보통학교」로 인가됐다. 총독부의 정치적 탄압에 순응, 이제까지 애용해오던 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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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배재학당-고종황제가 1886년 하사한 현판의 글씨(50)-배재학당
기독교연합대학인 배재대학이 1912년4월 배재학당 안에 설치됐다. 「아펜젤러」와 「언더우트」교사가 시작한 한국의 기독교 교육사업이 크게 성공을 거두자 미북감리회는 한국에 각 교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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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 배재학당 (22) 이승만의 입학 윤성렬
우리나라 최근세사의 거목이었던 이승만 박사가 배재학당에 입학한 것은 1894년 11월이었다. 당시 이박사는 이미 문과 과거에 몇번 실패하고 결혼까지 하여 득남을 한 20대의 어엿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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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선생 60주기
27일은 한힌샘 주시경 선생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60돌이 되는 날. 우리말과 글의 과학적 연구의 개척자며 청년교육 한글운동의 선구자인 선생의 60주기를 맞아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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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2) 제36화 양악백년 (7) 김영환
처음의 교회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쪽 지방에서 교세를 뻗쳤고 음악도 그 교회를 통해서 들어왔으니 자연 초창기에 음악하던 사람들은 북쪽 사람들이 많았다. 나보다 먼저 음악을 공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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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월곡동 7만평 땅|배재학당 소유확정
지난 58년 고 이승만박사의 특명으로 학교법인 배재학당에 불하됐던 토지소유권 시비가 소송 8년6개월만에 원고패소로 끝났다. 대법원 민사부는 7일 이우인씨(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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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제33화 종로YMCA의 항일운동(23)|전택부
1914년이다. 이번에는 세계대전이 터졌다. 전쟁은「유럽」에서 일어났지만 그 불꽃은 조선 땅에 까지 튀어올 정도로 번져갔다. 월남은 멀리 이 불길을 바라보면서, 안에서는 학생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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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제33화 종로YMCA의 항일운동(21)|전택부
얘기가 좀 뒤로 물러 나는 감이 있으나 확장되는 YMCA의 얘기와 Y회의 재건을 홀로 담당하다시피 한 이상재 선생의 청년상, 예언자상, 야인상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몇 가지「에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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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4)종로YMCA의 항일운동(14)|거대한 건물|전택부(제자 전택부)
전회에서 말한바와 같이 YMCA조직은 민족의 연합전선이라 할까, 민중의 연합세력이라 할까 그 당시에는 각계 각층의 개화꾼과 독립꾼들로써 구성되어 있었다. 독립회가 처음에는 정동구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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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국가의 발생과 변천-이재호 교수의 고찰
요즘 불리는 우리의 애국가가 어떻게 해서 불리게 되었으며 세계적인 연관 속에서 어떻게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았는가하는 고찰이 발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재호 교수(이화여대·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