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시평] 다양성을 인정해야 풍요로워진다

    양형진 고려대 명예교수 버스에서 공익캠페인을 본 적 있다. 피부색을 살색이라고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피부색은 개인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인종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데, 우리 민족의 피부색을 살색이라고 한다면 우리 중심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편견일 수 있다. 이는 반세기 전이라면 나오기 어려운 얘기였다. 우리 세대는 어렸을 때 반만년 역사의 단일민족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비극을 거친 후 내세울 것 없이 춥고 가난했던 시절엔 파란 가을 하늘과 유구한 역사의 단일민족이라는 게 위로가 됐었다.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면서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때는 외국과의 교류가 드물고, 외국인을 만나기도 어려운 시기였다. 이렇게 우리 안에 갇힌 상황에서는 베이지색을 살색이라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긍정적인 작용을 하기도 했다.     ■  「 늑대가 있어야 사슴이 건강하듯 다름 인정·포용하는 사회가 건강 미래는 상호존중과 배려의 시대   다양성 품는 공존 확대해 나갈 때 」    이런 상황은 이제 전적으로 달라졌다. 지난 연말 방한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게오르기에바는 한국이 외국에서 더 많은 인력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인구 감소에 대응해 잠재성장률을 높이기 위한 조언이었다. 결혼이나 취업 등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은 지금도 많이 있으니, 우리는 이미 그 길에 들어서 있다.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고 노령화로 인구 구조가 변화하니 외국 출신 인구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좋건 싫건 그런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우수한 외국 인력을 유입하려면 이민 정책이나 사회 복지뿐 아니라 언어, 교육,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사회 통합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간단치 않은 일이지만, 이걸 제대로 이뤄내지 못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글로벌 악몽을 꾸어야 한다. 잘 대처하기만 하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도약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왜 적극적으로 다양성을 포용해야 하는가? 잠시 눈을 돌려 생명 세계를 보자.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살았던 늑대는 인간이 못마땅하게 여겼던 탓에 1926년에 멸종됐다. 포식자가 사라지면 초식동물의 평화로운 낙원이 펼쳐질 것 같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늑대가 사라지자 사슴이 증가했고, 이들이 풀과 낙엽 식물을 마구 먹어댔다. 숲이 황폐화하고 초목이 죽으면서 땅이 침식됐다. 물가의 나무가 사라지면서 비버도 함께 사라졌다. 가뭄으로 풀과 초목이 부족해지면서 사슴이 집단 아사하기도 했다. 서식 환경이 처참히 바뀌자 멸종위기종 보호법이 제정됐고, 1995년부터 30여 마리의 늑대를 캐나다에서 포획하여 옐로스톤에 순차적으로 방출했다. 그 후 사슴 수가 줄면서 공원의 식물군이 변하고 물가 식물도 살아났다. 이 식물로 집을 짓는 비버 수가 늘었고, 비버가 건설한 댐은 물속에 사는 여러 동식물의 서식처가 됐다. 이후 100여 마리의 늑대가 안정적으로 생존하면서 죽어가던 생태계는 이전의 건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는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초식동물만 있을 때 평화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건 겉모습일 뿐이다. 사슴을 잡아먹는 늑대가 있을 때, 사슴도 오히려 건강할 수 있다. 다양성의 토대 위에서만 건강한 공존이 이뤄지고, 이런 공존 위에서 생태계가 건강할 수 있다. 이 다양성은 단순히 서로 다른 여러 종류가 같이 있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사슴과 토끼와 노루 등 여러 초식동물이 있다고 해서 건강한 게 아니라, 초식동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육식동물이 필요하다. 유사한 종류의 다양성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다양성이 필요하다. 단일 혈통의 순수도 좋지만, 다양성을 포용하는 건강한 공존이 이제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한 덕목이다. 생태계와 달리 우리는 여기에 상호존중과 배려의 미덕을 추가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꽤 많은 사람이 ‘다른’을 ‘틀린’이라고 말하지만, 바로잡아야 할 틀린(wrong) 것은 인정해야 할 다른(different) 것과는 다르다. 우리 사회는 앞으로 점점 더 서로 다른 인종적·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으로 이뤄지게 될 것이다.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단정 짓지 말고 포용해야 한다. 문화 배경이나 신념 체계가 나와 다르다고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늑대를 사악한 존재로 규정하고 멸종시키는 것처럼 폭력일 수 있다. 다만 다를 뿐이니, 동조하지는 않더라도, 배제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유네스코 국제미래교육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 ‘함께 그려보는 우리의 미래’에서는 “함께 미래를 그려보는 일은 다양성과 다원주의가 강화되고 우리 공동의 인간성이 풍요로워지는 사회를 비전으로 품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포용적이고 타인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능력을 발전시켜야 하며, 다른 문화와 인식체계, 생활방식과 세계관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했다. 상호존중과 배려의 영역을 가족, 이웃, 소속 집단, 민족으로 한정하지 말고 인류와 생태계 전체로 확대하는 시대가 우리의 미래여야 한다.   양형진 고려대 명예교수    

    2024.04.26 00:38

  • [중앙시평] 좁아지는 보수의 정치인구학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이번 총선은 여러 교훈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는 한국이 바야흐로 ‘정치인구학의 시대’에 본격적으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인구는 크게 세 가지 요인에 따라 변한다. 출생, 사망, 이주다. 그리고 인구의 변화는 정치적 결과를 낳는다. 과거에도 한국에서 정치인구학의 효과는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영호남 인구 격차의 정치적 결과라든가, ‘안보·성장 보수’와 ‘운동권 86세대’ 간의 대결 같은 것들이다.     ■  「 ‘안보·성장 세대’ 점차 퇴장하면서 보수-진보 간 균형 급속하게 파괴 나이들면 보수 된다는 것도 옛말 보수의 변신과 각오가 필요한 때 」    전쟁과 가난을 경험한 보수적 세대와 운동의 승리를 경험한 86세대 간의 정치적 차이는 그들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는 동안에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드러난 것은 마침내 그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앞으로 당분간 불균형은 심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보수정치에는 불길한 소식이다. 균형이 무너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안보 보수’의 사망 혹은 질병일 것이다. 한국전쟁 때 10살이었다 하더라도 지금 80대 중반이다. 한국이 절대 빈곤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 1970년대에 10살이었다면 60대 후반이다. 보수의 아성을 이루던 세대는 사라지고 있는데 진보의 아성은 견고하게 존재한다.   그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에 대한 지지의 세대별 분포다. 사람들은 막연히 청년은 진보적이고 노인은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큰 틀에서 보아 2012년 대선까지는 맞는 말이었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고령층의 표를 싹쓸이했고 문재인 후보는 젊은 층의 표를 싹쓸이했다. 문재인 정부를 겪으면서 젊은 세대의 젠더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약간 보수적으로 투표하던 과거의 패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특히 젊은 세대 여성들은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2030 남성들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빠른 속도로 보수화했고, 젊은 세대에서의 이러한 젠더 분화는 지난 대선에서 소위 ‘갈라치기’ 논란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진보정치에 대한 젊은 여성 유권자의 지지는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못 미치지만 아직도 견고하다. 이 분야에선 세계 수십개 국가의 경험에 대한 연구들이 쌓여 있는데, 확고한 결론은 여성 유권자들이 한번 진보화하면 다시는 보수 성향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또한 보수정치에는 불길한 소식이다.   18대 대선에서 이번 총선까지 12년이 지나는 동안 유권자들은 나이를 먹었다. 박근혜 후보를 흔들림 없이 지지했던 안보 보수 중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고, 진보의 세대적 기반인 86세대 유권자 중 절반 가까이가 60대에 접어들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을 가장 많이 지지한 세대중 4050은 예전과 별 차이가 없지만, 단연 눈에 띄는 것은 60대가 진보의 새로운 지지기반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이들은 나이를 더 먹더라도 여전히 비슷한 정치성향을 유지할 것이다.   젊었을 때 진보적이었던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서 보수화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들이 있다. 인구집단의 정치적 성향은 두 가지 효과의 상호작용으로 결정된다. 하나는 젊은 시절의 강렬한 경험이 평생 지속되는 것이다. ‘코호트 효과’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보수화해가는 것이다. ‘연령 효과’라고 부른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정치성향은 달라진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대체로 1960년대 초반 출생자들까지는 연령 효과가 더 강하다. 이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보수적으로 변한다. 하지만 60년대 중반 이후 출생자들부터는 코호트 효과가 더 강하다. 이들은 청년 시절 학생운동의 경험을 평생 가지고 가면서 나이를 먹어도 보수화하지 않는다.   세상을 점령하는 가장 쉬운 방식은 우리 편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다. 탄압받던 기독교인의 높은 출산율로 로마제국은 개종할 수밖에 없었고, 히스패닉의 높은 출산율은 앵글로 아메리카의 기반을 흔든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교육수준이 높고 온건한 종교적 믿음을 가진 집단의 출산율은 낮은 반면, 교육수준이 낮고 극단적 종교 신념을 가진 집단의 출산율은 압도적으로 높다. 이번 총선 과정에서 민주당이 공천 파동으로 가장 수세에 몰렸을 때에도 약 30%의 지지를 받았다. 선거에서 이기는 절대적 득표율을 51%라고 한다면 민주당은 기존 30%에 21%를 더 모으면 되지만, 국민의힘은 뼈를 깎는 분석과 변신이 없는 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0’에서 시작해 51%를 모아야 하는 상황에 근접해 갈 것이다.   이번 선거 결과는 앞으로 정치인구학적 불균형이 가져올 결과들을 보여주는 서막에 불과하다. 진보 진영에서 범죄 혐의를 벗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후보나 상상을 초월하는 막말로 논란을 빚은 후보조차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분개했을 보수 성향 유권자에게, 정치인구학의 대표적 학자인 에릭 카우프만의 말을 전한다. “이성의 시대여 안녕. 혼돈의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2024.04.25 00:40

  • [중앙시평] 우리는 어떤 통일을 바라는가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 경제학부 이전 보수 정부 때의 일이다. 정부 위원회의 공공외교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동행한 위원이 한국은 점진적 방식의 통일을 지향한다고 말했더니 미국 전문가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한국 대통령의 말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화해·협력 기간을 거쳐 남북 연합 단계로 나아가고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룬다는 한국의 공식 통일방안을 설명해도 ‘언제 그런 것이 있었냐’는 표정이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부가 만든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국민이 많다. 보수 정부의 대통령은 ‘북한 붕괴 후 급진통일’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을 자주 했다. 진보 정부의 대통령은 통일로 가는 첫 단계로서 ‘경협’을 강조했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우리 국민이 알지 못하고 대통령조차 믿지 않는 통일안을 외국인에게 설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  「 통일 반대는 해결책이 아닌 함정 ‘강하고 선한 국가’ 비전 확립하고 통일을 최종 목표로 유지하면서 중간 단계로 경제공동체 거쳐야 」    지정학적 격동의 시대에 우리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 갈팡질팡하게 되면 무력 충돌이나 영구 분단이 초래될 수 있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때 만들어진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북한이 거부하지 않고 여야가 합의할 수 있었던 최대 공약수였다. 통일을 목표로 삼고 이를 단계별로 접근하는 방식 외에 다른 안이 나올 수 없었다. 또 단일 민족이 통일의 근거이자 동력이라는 점에 당시 대다수 국민이 마음을 같이 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30년 이상이 흐른 지금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중요한 도전에 처했다. 이제 이를 업그레이드한 새로운 통일방안으로 국민의 마음을 모아야 한다.   통일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이며, 이를 평화롭고 점진적 방식으로 추진한다는 민족공동체 방안의 핵심은 계승해야 한다. 통일 대신 남북 간 평화 공존을 최종 목표로 삼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해결책이 아니라 함정에 가깝다. 비정상 국가이자 남한을 적대하여 핵 무장한 북한과의 평화 공존은 어렵다. 북한 내부의 취약성은 핵을 직간접적으로 사용하려는 유혹을 배가한다. 북한발 위험 때문에 해마다 우리 국민은 보이지 않는 세금을 내고 있다. 이런 분단 비용이 수십 년 쌓이면 남한 한 해 국민소득의 절반 이상이 될 수 있다. 또 남한의 핵무장으로 핵 균형을 이루면 통일 없는 공존이 가능하다는 견해도 있으나, 그 현실성은 차치하고 외환위기 몇 배 이상의 경제적 충격을 초래할 것이다. 아예 북한 붕괴를 추진하자는 더 용감한(?) 주장도 있다. 그러나 남북 충돌의 가능성뿐 아니라 경제적 격차가 큰 지역 간 급진통일은 핵무장보다 훨씬 큰 경제적 비용을 수반한다.   민족공동체 방안에 비현실적인 부분도 있다. 남북 연합이 바로 그렇다. 북한이 사회주의 경제를 유지하는 한 북한은 발전할 수 없다. 이 상태로 남북이 연합하면 남한 경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크나큰 짐을 지게 된다. 일국양제(一國兩制)가 아니라 양국일제(兩國一制)가 되어야 남북 모두 급성장한다. 따라서 기존의 남북 연합단계를 시장경제에 기반한 경제공동체로 대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 민족공동체 방안의 화해·협력 단계 이전에 북한 비핵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혹은 비핵과 협력을 병렬하여 비핵·협력 단계를 1단계로 설정할 수 있다. 북한의 비핵화에 연동하여 제제를 해제하고 경협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경협은 경제공동체 형성의 마중물이자 디딤돌이 되도록 설계돼야 한다.   통일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북한 지역으로 확장하는 과정이다. 통일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자는 우리 국민은 없을 것이다. 북한 주민의 인권과 번영을 위해서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필수 불가결하다. 새로운 통일방안은 북한 주민과 관료의 역량을 끌어올려 북한이 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도움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대립 중에서도 대화하고 군사적 억지를 추진하면서도 관여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지정학 바람이 반대로 불 때, 북한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다리를 만드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래서 통일을 떠밀려 택하지 않고 만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이 복합적 과정에 대한 인식이 올바른 통일정책의 첫걸음이다. 예전처럼 하나의 악기만으로 교향곡을 연주하려는 정책은 또 실패한다.   통일 방안이라는 지도가 있어도 동력이 없다면 목적지로 갈 수 없다. 우리는 민족이란 전통적인 동력에 가치와 편익(국력)을 더한 삼두마차를 몰아야 한다. 민족의 호소력은 아직도 작지 않지만 과거와 같은 힘을 내기는 어렵다. 북한 주민을 향한 공감은 우리 사회가 더 일궈야 할 가치다. 통일 편익은 또 하나의 추동력이다. 그러나 ‘대박’ 같은 미시적 계산으로써는 통일이란 거대한 산을 움직이기 어렵다. 통일은 ‘강선국(强善國)’이라는 큰 비전으로 승화돼야 한다. 우리는 한 세기 내에 민주화와 경제발전, 그리고 통일까지 완성한 성공의 대서사시로 세계에 선한 영향을 끼치겠다는 꿈을 가져야 한다. 통일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국력의 완성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왜 세계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가슴 뛰는 답이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2024.04.24 00:38

  • [중앙시평] 이제 혁명적 정치개혁이 필요하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2대 총선의 과정과 결과는 한국 정치의 환부를 전부 드러냈다. 이의 본격적인 수술과 치료를 모색해야 할 때다. 무엇보다 민심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헌법과 정치 개혁이 중요하다.   먼저 공천 과정의 혁명이다. 당연히 주권자가 공천권을 행사해야 한다. 더 이상 당 지도부에 의한 위로부터의 공천을 지속해선 안 된다. 아래로부터의 공천이 제도화하지 않는다면, 아무나 아무 지역에 꽂아서 출마하게 된다. 나아가 주민의 대표 및 헌법기관으로서의 국회의원의 독립성과 자율성보다는 친(親)·비(非)·반(反) 같은 수식어가 붙는 파당인의 위치와 역할이 너무 커진다.     ■  「 22대 총선, 비례·대표성 왜곡 극심 정치 개혁 외면한 여당의 자업자득 제도적 리스크와 개인 리스크 결합 선거·정당·헌법 혁명적 개혁 절실 」    대표성·비례성·등가성 보장을 위한 선거제도 혁신은 말할 필요도 없다. 민주화 이후 21대까지 총선의 사표(死票)는 전체 투표의 49.3%에 달했다. 유효표는 단지 50.7%였다. 주권의 절반이 행사 즉시 사표가 된 것이다. 게다가 제1당의 의석율은 득표율보다 평균 9.9%포인트나 높아 거의 30석이 초과 의석이었다. 지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의 지역구 득표 차이는 8.4%포인트(49.9% 대 41.5%)에 불과했으나, 의석수 차이는 79석(163석 대 84석)이 됐다. 8.4%는 겨우 21석에 값할 뿐이다. 득표수 대비 1당은 14.53%의 의석 이득을, 2당은 8.3%의 의석 손해를 본 셈이다. 22대 총선도 같다. 사표는 41.52%에 달하며,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득표는 5.4%포인트(50.5% 대 45.1%) 차이였으나 의석수는 71석이나 차이(90석 대 161석) 났다. 5.4%는 단지 14석에 값한다.   의석과 권력 배분이 ‘민심 그대로’ 반영되려면 이토록 큰 사표와 의석 불비례는 바로잡혀야 한다. 이를 위해 특별히 보수정당의 혁명적 의식 전환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헌법개혁과 정치개혁을 위한 국회 특위 기간, 민의를 반영하고 표의 비례성·대표성·등가성을 지키기 위해 ‘연동형’을 받아들이라는 설득에도 국민의힘 계열 의원들은 난공불락이었다. 여러 객관적 선거 지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표심 왜곡방지와 민주주의 원리는 고사하고라도, 왜 자해적 선택인 연동형 반대와 위성정당 창당이라는 이중·삼중의 악수(惡手)를 선택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영남당·부자당·노인당 추세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지표를 무시하는 비민주적, 반과학적 선택이었다. 그 자업자득이 이번 총선 결과다.   22대 국회에서 ‘연동형 비례’ 대표의 본질에 합당한 의석은 2석(개혁신당)에 불과하다. 나머지 44석은 지역구 후보가 없는 위성정당이나 단독정당·가설정당의 의석이다. 대체 무엇과의 연동이고 비례인가? 즉 44석은 지역구 표심과 의석의 불비례성을 보정하는 비례대표 제도의 본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지역대표와 비례대표 간 최악의 불비례·불연동 선거가 아닐 수 없다. 화급히 바로잡혀야 한다.   표의 등가성·대표성·비례성 및 정확한 민심 반영을 위한 선거·정치개혁은 권력구조 개혁과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선진국 한국은 이제 나라이건, 국민이건, 정당(여당)이건, 더 이상 ‘대통령제 리스크’와 ‘대통령 리스크’를 동시에 안고 갈 수 없는 한계상황에 도달했다. 전자는 ‘제도’ 리스크이고, 후자는 ‘인물’ 리스크다. 최근 들수록 제도 요인과 인물 요인이 만나서 한국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은 불안을 넘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 위험 요인으로부터 나라와 국민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 애국자라면 진영을 넘어 함께 직시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 탄생한 모든 대통령의 득표율은 유효투표 대비 평균 44.65%, 선거인 수 대비 34.03%였다. 유효 투표의 절반 이상이 반대표 내지는 사표였다. 전체 선거인을 따지면 3분의 1 지지에 불과하다. 대화와 타협이 절대 필수임에도 불구하고 승자 독식을 지속한 결과 한국은 최고 갈등 국가가 되고 말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최소 비율 및 득표 차인 0.73%포인트, 24만표 차이로 당선됐다. 그런데도 대화·타협·협치 거부와 일인독주·승자독식 정치를 고수하다 통치 불능 상태에 가까운 심판을 받고 말았다.   선진 한국의 자율성과 다양성, 창의성과 가능성이 더 이상 한 제도와 한 사람에 의해 좌우돼선 안 된다. 대통령 선거는 결선 투표를 도입해 대표성을 높이고 연립·연합정부의 경로를 열어놓아야 한다. 동시에 지지 민심의 크기만큼만 권력을 행사하도록 일체의 승자 독식과 대권 요소를 철폐해야 한다. 인사 및 정책의 독임과 전횡, 초법성과 불가예측성을 제거할 최소한의 장치가 필수다. 총리의 국회 복수 추천, 국무회의 의결기구화, 장관 임명동의제는 그 최소 요건이다.   행정권과 입법권, 최고 행정권자와 최고 입법권자가 서로 다른 상황을 맞아 22대 국회는 정책 연합과 입법 연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꼭 그리해야 한다. 나아가, 주권자의 민심만큼만 권력을 획득하고 배분하고 행사하는 정치개혁을 위한 혁명적 결단과 행동도 함께 기대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024.04.19 00:38

  • [중앙시평] 이제는 타협과 협력의 시간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한국사회는 수렁에 빠져있다. 심한 분열과 갈등과 불신, 미래에 대한 불안, 집단이기주의, 유착과 담합을 통한 기득권 방어가 우리 사회에서 일상화됐다. 양극화는 심해졌고, 흙수저·금수저란 말이 상징하듯 계층 간 사다리는 좁혀져 있다. 과거의 역동성이 사라지며 이미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세계 평균 성장률을 밑돈 지 오래다. 그러나 정치는 이에 대한 바른 진단과 대책을 내놓기보다 분열과 증오를 증폭시키며 증세를 악화시켜 왔다. 그 결과 한국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사회, 정체사회가 되어있다.   5년마다 바뀌는 단임 정권은 한국사회 전반의 시계(視界)를 단기화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주요 공직자뿐 아니라, 공공기관장, 각종 단체장, 대주주 없는 금융기관장, 심지어 장기적 안목으로 국가정책을 연구해야 할 국책연구원장들도 따라 바뀌게 된다. 국가의 지도층에서부터 짧은 임기 내에 그들의 사적 목표를 우선시하며 단기적 포퓰리즘, 장기적이며 구조적인 문제들의 방치, 도덕적 해이가 깊이 퍼져있다.     ■  「 한국 사회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어 사회 전반적 개혁 없이는 못 벗어나 국가 지배구조, 정치질서 바뀌어야 대화·타협 통한 변화가 총선의 민의 」    한국 사회, 경제, 정치가 안고 있는 오늘의 문제는 갑자기 이 땅에 뚝 떨어져 생겨난 문제들은 물론 아니다. 근대화와 압축성장 과정에서 정부가 도입해 온 제도와 정책이 한국인의 행동양식, 문화, 관행, 국내외 환경의 변화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오늘날의 현상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한 국가와 사회는 늘 연속선을 그리며 변화, 발전한다. 지난 60년간의 한국 경제는 그 상승의 기울기와 하강의 기울기 모두 과거 산업혁명 이후 어떤 선진국이 그려온 상승과 하강의 모습보다 가파르다. 제도와 정책, 그리고 이의 운영방식이 국가의 영고성쇠를 결정한다. 향후의 기울기는 지금 우리가 어떤 제도와 정책을 도입하며 국가사회의 전통과 기풍을 만들어 갈 것인지에 달려있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제도에 대한 논의가 있어도 이것이 정치과정을 통해 입법화되고 도입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한 정치과정은 결국 국가의 권력구조, 정당 문화, 언론, 시민의식에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의 정치와 제도, 정책이 지금과 같이 지속되면 한국의 병은 더 깊어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그 뿌리들이 매우 깊고 서로 연결되어 있어 종합적 접근과 처방을 필요로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해온 보상과 유인체계는 더 이상 역동적이며 건강한 한국의 미래를 열어가기에 적합하지 않다. 관료 시스템이 흔들리고, 인재의 흐름과 국가자원의 배분이 왜곡되며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 있다. 지금 이 시대 상황에 맞게 근본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사법 전반에 걸친 대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국민의 인식이 이번 총선에서도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위기의식,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혁신을 이룰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정치문화와 국가지배구조의 개편이 불가결하다. 여, 야, 진보, 보수 진영 간의 극한적 대립 방식, 상대방이 하는 일을 어떻게든 반대하고 끌어내려야 내게 기회가 오는 정치구조를 가지고는 제대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과 혁신을 추진해 나갈 수 없다.   민주주의는 한계가 많은 제도이다. 그것이 생산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타협과 협력의 문화가 필수적이다. 우리 정치는 이제 1987년 민주화 이후 지난 37년간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그러한 성찰 위에서 오늘을 바꾸고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여야가, 보수와 진보 진영이 서로 건강한 대립을 지속하되 미래를 위한 큰 틀에서 대화하고 협력하며 국가과제를 개혁해 나가지 않으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너무 크고, 그 결과가 두렵다. 나라와 국민을 잘되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정당의 정체성이 무엇이 있는가? 영남과 호남,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의 갈래로 나누어지고 언론은 이러한 진영 간 분열을 부추기는 상황이 지속되지 않도록 국민의 지혜를 모으고 화해를 얘기해야 한다. 정치가, 국민이, 타협과 협력의 문화와 전통을 세우지 않고는 아무런 문제도 제대로 해결해 나가기 어렵다는 것이 민주화 이후의 교훈이다. 위기를 겪고 외압에 의해서야 겨우 부분적 개혁을 하는 위기의존형 국가가 될 뿐이다.   이번 총선 민의에 나타났듯이 국정운영의 일방독주, 비타협의 정치로부터 벗어나 여야가 진지한 대화와 타협, 협력으로 미래를 위한 변화를 이루어내기 바란다. 22대 국회 의석의 분포도 정부 여당과 야당 간 설득, 타협, 협력 없이는 어떤 개혁과 변화도 이뤄낼 수 없음을 말해준다. 점점 조선 시대 당파싸움으로 돌아간 것 같은 오늘의 정치 모습에서 벗어나, 이제 새로 구성될 22대 국회는 여야가 타협과 협력의 문화를 만들어가면서 국민에게 희망을 주길 기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헌을 통한 새로운 국가지배구조와 정치 질서를 모색해 나가길 기대한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2024.04.12 00:37

  • [중앙시평] 고달픈 주인의 국회 만들기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선거가 끝나서 기쁜 점은 조용해졌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후보들이 보내는 문자메시지의 무차별 공격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무엇을 하겠다는 공약이라면 가치가 있었을 텐데, 심지어 대놓고 ‘거짓선동으로부터 ○○후보를 지켜달라’는 문자도 있었다. 선거는 나를 대신해서 일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인데 오히려 유권자인 내가 누구를 지켜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다니, 누가 누구의 공복인지 앞뒤가 바뀌어도 한참 바뀐 것이다.     ■  「 총선 끝난 지금부터 시민 참여 절실 통합 위한 낙관적 편향이 필요한 때 새 국회에 토론의 규칙부터 요구를 미래세대 대변 청년 정치인 키워야 」    선거 기간 동안 정치에 오만정이 떨어졌어도, 시민의 관심이 진짜 필요한 것은 새 국회 출범을 앞둔 이제부터다. 시급히 착수해야 하는 환경, 교육, 연금, 노동 영역의 개혁 과제들은 장기적으로 미래세대의 삶을 크게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뒤에 올 세대들이 맞부딪칠 세상을 소수의 정치공학적인 이해득실 계산에 희생시킬 수는 없다. 종업원이 마음에 놓이지 않으면 사장이 바쁠 수밖에 없듯 주인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고달픈 법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처럼 인종이나 종교, 언어와 같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더 뿌리 깊은 갈등 요인을 가진 것도 아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망국병이라 여겼던 영남과 호남의 갈등도 많이 옅어졌다. 보복의 악순환으로 공고해진 정치적 양극화가 ‘넘사벽’으로 여겨지지만, 비관하고 포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지금은 우리가 통합의 길로 갈 수 있다는 낙관적 편향이 억지로라도 필요한 순간이다.   통합을 위한 만병통치약이 있을 수 없고, 통합이 어떤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통합이라는 거대한 단어 앞에서 한없이 사소하고 미미해 보이더라도 포용과 합의의 가치를 담은 작은 실행들을 사부작사부작 쌓아가는 것만이 미래세대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서로 이질적인 집단 간의 협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관찰한 연구는 몇 가지 요소를 지적한다. 서로 동등한 지위를 갖는 사람들끼리, 구체적 목표를 공유한 상태에서, 자주 상호작용을 할 때, 그리고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의 만남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는 규범이 생기고 이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때 협력이 촉진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4년간 주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끊임없이 통합의 시도들을 응원하고 요구하는 일이다.   우선 22대 국회에 토론다운 토론의 선례를 보여줄 것을 요청한다. 국회는 규칙을 만드는 기관인 만큼 우선 국회부터 발언과 표현, 토론의 규칙부터 제발 좀 만드시라. 정해진 형식과 규범이 없는 토론은 말다툼이지 토론이라 부를 수도 없다. 제대로 된 토론이 없다면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진다.   수많은 공청회나 국무위원과의 질의응답 등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시시각각 중계되는데, 이는 논쟁적인 이슈의 쟁점을 파악하고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배우는 시민성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나쁜 선례의 반복은 오히려 시민성에 해악을 끼치기만 한다. 말꼬투리 잡기, 상대의 발언을 맥락에서 분리하여 침소봉대하기, 고정된 프레임 씌우기와 같은 자극적인 언어선동은 다양한 미디어를 타고 더 크게 증폭된다.   그리고 정치 엘리트들의 말하기는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거대한 내러티브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언론은 갈등을 먹고 사는 것이 생리라지만, 양질의 토론과 협력적 시도들이 충분히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시민들이 언론과 국회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비판적 반응을 보이고 압력을 넣어야 한다.   또 하나, 정당법 개정을 서둘러서 청년정치인을 늘리는 실효성 있는 방안을 만들기 바란다. 정당 내 다양성의 확보는 정치적 양극화의 폐해를 보완하는 하나의 대안이다. OECD 국가 중 한국은 40세 이하 청년 의원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다. 인구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해 6070이 2030보다 많은 이른바‘ 그레이 선거구’는 앞으로 더욱 증가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재선 가능성에만 온 신경이 갈 수밖에 없는 국회의원들은 노년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이슈들만 주로 다룰 수 밖에 없다.   선거 때마다 일회성 이벤트처럼 이루어지는 청년 인재영입에 청년을 소진하지 말고, 정당법 개정을 통해 젊은 정치인의 교육과 국회 진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제도적으로 정비하는 것이 시급하다. 더 많은 젊은 정치인의 등장은 산업화 세대 가치와 민주화 세대 가치 간의 상호 대결 구도를 넘어서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문자 폭탄은 유권자가 지닌 양질의 무기가 된다. 상대편 말고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통합의 가치에 반하는 정치를 했을 때 비난의 문자 폭탄을 보내고, 상대가 통합적인 행보를 보였을 때 지지의 문자 폭탄을 보내는 시민운동을 펼친다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이러나저러나, 주인은 고달프다.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2024.04.11 02:30

  • [중앙시평] 지금 다시 계몽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우리는 쉽게 냉소적이 된다. 저출산·고령화·저성장 문제에 닥치고도 정치 갈등으로 사회적 자원을 낭비하며 20년 가까이 제대로 된 구조개혁을 이뤄내지 못한 현실에 지치기도 한다. 그러나 비관주의나 패배주의 대신 인류의 진보를 믿으며,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개선해나갈 수 있다고 역설하는 세계적인 학자가 있다.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스티븐 핑커다. 그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1), 『지금 다시 계몽』(2018), 『이성』(2021)이라는 일련의 저작을 통해 계몽주의 이념, 즉 이성에 기반한 과학적 사고와 휴머니즘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  「 인지편향 극복이 문제 해결의 출발 이성에 기반한 올바른 선택이 중요 선거판의 비합리성 극복 위해서는 공공 담론이 정치로부터 벗어나야 」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발전한 지적·문화적 운동이다. 전통적 권위, 특히 교회 및 절대군주의 권위에 도전하며, 지식과 개인의 자유·권리에 기반한 사회질서의 재편을 주장했다. 계몽주의 가치인 자유·평등·박애는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 운동은 근대 과학적 방법론의 발전, 근대 민주주의 이념의 형성, 경제 및 사회적 자유의 확대에도 기여했다. 경제학의 고전이며 자본주의 이론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국부론』도 계몽주의 시기인 1776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 역시 부가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해 이성적으로 분석한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다.   그런데, 지금 왜 다시 계몽주의가 필요한가? 우선 우리의 인지편향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인지편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황에 대해 비논리적인 추론과 판단을 하는 오류를 말한다. 사회문제 해결은 인지편향을 고치는 데서 출발한다. 가령, 뉴스는 정치적 증오, 범죄, 약물남용, 전쟁, 환경오염 등으로 가득하다. 뉴스는 폭탄이 터지지 않은 도시나 총격이 일어나지 않은 학교는 보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사례가 잘 기억날수록 그 사건이 더 자주 발생한다는 인지편향을 갖고 있다. 미국인들은 이슬람 테러를 심각한 위협으로 보지만, 그 위험 수준은 장수말벌이나 꿀벌의 공격보다 낮다. 2주 전 작고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행동경제학 창시자 대니얼 카너먼의 연구 결과다. 저널리즘의 속성과 인지편향이 맞물려 비관주의로 빠지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답은 데이터 기반의 이성적 사고, 과학, 휴머니즘에 있다.   둘째, 계몽주의는 인류의 진보에 기여한 제도에 대한 냉소를 막아준다. 인류는 평균수명의 증가, 극단적 빈곤의 감소, 전쟁과 폭력의 감소, 교육수준의 향상 등에서 놀라운 진보를 이룩했다. 이런 진보는 다양한 분야에서 데이터로 측정 가능하다. 특히 한국이 보여준 진보는 기적에 가깝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1970년 62.3세에서 2022년 82.7세로 증가했고, 1000명당 영아사망률은 같은 기간 48.3명에서 2.3명으로 극적으로 줄었다.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1953년 20조원 수준에서 2023년 1996조원으로 100배가량 늘었다. 25~64세 인구 중 대학 졸업 인구의 비율을 나타내는 고등교육 이수율은 1997년 19.8%에서 2022년 52.8%가 됐다. 그 어떤 나라도 이렇게 단시간에 정치·사회·경제·문화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셋째, 교착 상태에 빠진 구조개혁과 공공담론을 진척시킬 실마리를 계몽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공공담론을 정치와 분리(탈정치화)하는 것이다. 이슈들이 정치화하면 사람들은 이성적이 되기 어렵다.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새로운 정책에 대해 자신이 지지하는 당이 제안하면 찬성하고, 반대하는 당이 제안하면 싫어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앨 고어가 만든 ‘불편한 진실’이란 영화다. 민주당 출신 정치인이 이 영화를 만드는 바람에 기후변화에 좌파 낙인이 찍혔다. 이 때문에 일부 환경보호론자들은 이 영화가 환경운동에 득보다 독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정치와 선거의 규칙은 사람들의 비합리성을 최대한 뽑아내게끔 극악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인류 역사에서 폭력이 점차 감소했음을 논증한다. 이 책 제목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1861년 3월 4일, 제1차 취임연설에서 빌려왔다. 남북전쟁 직전 노예제를 둘러싼 분열의 정점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취임사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비록 열정이 우리 사이를 시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결속을 끊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 땅 곳곳의 모든 전장과 애국자의 무덤에서부터 모든 살아 있는 마음과 가정에 이르기까지, 기억의 신비한 화음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에 의해 다시금 어루만져질 때, 연합의 합창이 다시 울려 퍼질 것입니다.”   아무도 링컨을 순진했다고 비웃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루어낸 우리 사회의 진보를 믿어야 한다. 이성·과학·휴머니즘으로 우리 사회가 더 올바른 선택을 하는 데 집중할 때다. 낭비할 시간이 더 이상 없다. 다시 계몽을 생각하는 투표일 아침이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2024.04.10 00:46

  • [중앙시평] 되돌아 보는 74년 전의 ‘선거 십계명’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마침내 선거가 내일로 다가왔다. 예전과 비교할 때 이번 선거를 지켜보는 일은 참으로 피곤하고 짜증스러웠다. 선거가 정치적 변화와 개선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을 주기는커녕 22대 국회에서는 얼마나 더 심하게 싸우고 대립할까 하는 걱정을 갖게 했다. 우리 정치의 질(質)이 나빠졌다는 것을 이번 선거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선거라는 것이 국회의원이라는 공직 담당자를 뽑는 일인데 주요 정당이 내세운 기억나는 공약이 솔직히 없다. 상대방에 대한 거친 비방과 공격만이 난무했다. 우리의 유능함을 강조하기보다 상대편에 대한 적대와 증오를 부추기는 선거 운동이었다. ‘저자들이 밉다면 우리를 찍어라’ 이런 선거 전략이었다. 주요 정당 대표가 대통령 탄핵을 공약처럼 내세우는 일도 처음 겪었다. 우리 당 지지자가 아니면 누구든 적으로 간주하는 거부와 배제의 정치가 지배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정서적 내전 상태’에 빠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 정당 운영 후진성 보여줬던 총선 “인격도 교양도 보잘것없으면서…” 1950년 ‘이런 사람 뽑지 말자’ 운동 우리 정치는 그때보다 나아졌나 」    임기 중반에 실시되는 선거가 중간평가의 속성을 갖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렇게까지 대통령이 선거 경쟁의 중심에 놓이는 일은 드물다. 소통과 공감이 부족한 윤석열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이 일차적 원인일 것이다. 윤 대통령으로서도 그간 자신의 통치 스타일에 대해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총선이 마치 대통령 선거 운동하듯이 진행되는 데에는 근소한 차이로 승패가 갈린 2년 전 대통령 선거 결과가 마음 깊이 받아들여지지 못한 탓도 있는 것 같다. 더구나 민주화 이후 예외적인 5년 만의 정권교체였다. 여기에 윤 대통령의 승자독식, 불통의 리더십이 불을 질렀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번 선거에서는 후보자보다 정당의 영향력이 훨씬 큰 것 같다. 정파적 양극화에 대선 같은 경쟁이 더해지면서, 엉망진창이었지만 각 당의 공천은 내부적으로는 비교적 큰 잡음 없이 끝이 났다. 불만이 있어도 이러한 ‘전쟁 같은 선거’에서 당의 승리를 위해 희생을 강요당했던 셈이다. 하지만 이번의 공천은 우리 정당의 검증과 평가라는 것이 얼마나 형식적인 것인지, 정당 운영이 얼마나 후진적인지 잘 보여주었다. ‘그 나물에 그 밥’이었던 국민의힘 공천도 문제였지만, 후보 선정 기준이 파벌이라는 이른바 ‘비명횡사’의 모습을 보여준 더불어민주당의 공천은 공직 후보 선정에 대한 정당의 공적 책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   보스에 대한 충성심이 후보 선정 기준이 되다 보니 역량이나 도덕성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저잣거리의 장삼이사보다도 수준이 훨씬 낮은 언행을 보이면서도 부끄러움 없이 공직을 맡겠다고 나선 이들이 너무 많이 눈에 띄었다. 수신(修身)도, 제가(齊家)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이들이 치국(治國)을 하겠다고 나선 모습이다.   이런 선거운동, 이런 후보들을 지켜봐야 하는 유권자는 괴롭다. 선거 막판까지 접전 지역이 많은 것도 이 당도 저 당도 다 마음에 들지 않는 유권자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투표하러 가기를 주저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투표를 안 하면 그만큼 내가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은 더 높아질 수 있다. 좋은 후보를 뽑아야 한다.   우리 국민의 두 번째 선거였던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성일보는 “이런 사람은 뽑지 말자”는 선거 캠페인을 벌였다. 1950년 5월 5일 자 신문에 게재된 ‘선거 십계명’이라고 지칭한 캠페인의 내용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인격도 교양도 보잘것없으면서 권세나 돈으로 민중의 환심을 사고 또는 민의를 누르려 드는 자.” “국사는 제쳐놓고 국회의원을 명예직처럼 팔고 다니며 세도나 부리고 이권 운동에나 힘쓸 뿐 진실성과 책임감이 희박한 자.” “어느 정당, 단체 또는 배경의 도구로서 편협된 태도를 갖는 자.” “역사의 방향과 국내의 정세를 판단하는 지식이 부족하고 민의와 그 실정을 정확히 파악지 못하는 자.”   선거 십계명의 내용 하나하나가 내일 선거일을 앞둔 우리에게도 큰 공감을 준다. 이 문구를 읽다 보면, 민주화 40년이 멀지 않다고 하는 오늘날 우리의 정치가 과연 이때보다 나아지기는 한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선거 경쟁 때 죽고 살기로 싸우더라도 선거가 끝이 나면 결과를 받아들이고 타협과 합의라는 정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러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선거 결과가 어떠하든 지난 2년간 보아온 것보다 더 심각한 여야 간 대립, 대통령-국회 간 충돌이 예상된다. 이번 선거운동을 보면서 느꼈던 피곤함과 짜증스러움이 앞으로 4년 내내 이어질 것 같다. 내일이 선거일이다. 선거 십계명에 한 번이라도 더 눈을 돌려 정말 좋은 후보를 뽑아야 한다. 결국 모든 결과는 유권자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기 때문이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4.04.09 00:54

  • [중앙시평] 포퓰리즘과 분노 정치 시대의 총선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사전투표가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에 이뤄졌다. 수요일에 본투표가 남아 있으니 총선은 현재진행형이다. 선거 과정을 돌아보면 두 흐름이 내 시선을 끈다.   첫째는 ‘포퓰리즘 정치’다. 20세기형 포퓰리즘이 복지정책을 앞세운 인기영합주의 정치였다면, 21세기형 포퓰리즘은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무장한 비(非)자유주의 정치다. 비자유주의 포퓰리즘은 나와 이념을 같이 하는 이들만 ‘진정한 국민’으로 여긴다. 다른 정치 세력 및 지지자들에 대한 혐오와 악마화가 포퓰리즘의 최대 무기다. 포퓰리즘 아래서 진영 정치는 한층 요새화하고 있다.     ■  「 총선의 두 흐름은 포퓰리즘과 분노 이틀 후 새로운 정치지형 마주해야 좋든 싫든 국민 선택받은 국회의원 책임감 발휘하고 포용 정치 일구길 」    둘째는 ‘분노의 정치’다. 분노의 정치의 다른 이름은 ‘정체성 정치’다. 정체성 정치란 이념·민족·젠더 등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들이 부정되는 현실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정치를 말한다. 우리 사회의 경우 진보적 시민은 보수적 정부가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에, 보수적 시민은 진보적 세력이 보수가 일궈온 대한민국 가치를 부정하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   이 정체성 정치는 팬덤 정치의 얼굴로도 나타난다. ‘우리’라는 집단적 정체성은 온라인 초연결을 통해 자신과 같은 팬들과 동료애·목적의식을 공유하게 한다. 팬덤 정치는 정치 과정에 직접 참여한다는 만족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동시에 리더에의 비이성적 충성심은 합리적 대화와 토론을 거부하게 한다. 요새화된 진영 정치는 팬덤 정치 아래서 다시 한번 힘을 얻는다.   전통적 민주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주장했듯, 민주주의는 이제 투표장에서 전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사회의 공간이 포퓰리즘 정치와 진영 정치로, 시민사회의 공간이 분노의 정치와 팬덤 정치로 대체되는 것은 우리 민주주의 위기의 현실이자 증거다.   정녕 난감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가 이렇게 비관적인데 이틀 후에는 새로운 정치 지형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좋든 싫든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 모두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치인이라는 사실이다. 현실적 관점에서 이들이 정치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줄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를 공부하는 이로서 두 가지를 미리 당부하고 싶다.   첫째, 직업정치인으로서의 책임감이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의 치명적인 두 죄악으로 ‘객관성의 결여’와 ‘무책임성’을 들고 있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은 이라면 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입법을 추진할 경우 그것이 국민 다수에게 불행을 안겨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치인에게는 옳고 그름의 ‘신념윤리’ 못지않게 정치적 행위의 결과까지 책임지는 ‘책임윤리’가 중요하다.   직업정치인에게 부여된 책임의식을 베버는 다각도에서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정치인에게 필요한 자질은 ‘열정·책임감·균형감각’의 세 가지다. 정치적 대표성에 헌신하는 태도가 열정이라면, 그 대표성에 책임을 다하는 태도가 책임감이다. 그리고 이 열정과 책임감 사이의 균형감각이 요구된다. 균형감각은 사물과 사람에 거리를 두는 태도이자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는 역량이다.   둘째,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숙고다. 현재 우리 사회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 저성장·초저출생·초고령화·복합위험·신냉전질서 앞에 놓여 있다. ‘두려운 미래’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현재가 정점이라는 불안이 전 세대와 전 계층에 스며들어 있다. ‘피크 코리아’다. 문제의 핵심은 정치가 이러한 대한민국의 전진을 가로막는다는 데 있다. ‘정치의 죽음’이다. 이러한 현실에 보수와 진보 모두 면책되지 않을 것이다.   성숙한 경제·문화 선진국으로 자리 잡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역작 『좁은 회랑』에서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이 개념화한 ‘좁은 회랑’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오만한 정부와 분별없는 시민사회 간의 거리가 멀어져 왔다. 양극화와 비타협이 시대의 질서가 돼가고 있다. ‘포용적 경제’를 일구지 않고서는, 이 포용적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설득과 타협의 ‘포용적 정치’를 통해 국가와 사회 간의 생산적 균형을 추구하는 좁은 회랑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문제는 정치다!’라는 주장은 이 포퓰리즘과 분노의 정치 시대에 가장 중요하고 유효한 테제다.   사전투표율이 총선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치가 아무리 실망을 안겨주더라도 우리 국민은 이 애증하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높다고 봐야 한다. 김수영의 ‘사랑의 변주곡’을 소환하고 싶다.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까지도 사랑이다.” 분노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걸까. 그렇다고 믿고 싶다. 우리 정치가 객관성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번영의 좁은 회랑으로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주길 나는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2024.04.08 00:36

  • [중앙시평] 공감 능력 없으면 공동체는 붕괴된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총선이 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부터 사전투표가 가능하니 실제로는 선거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이번 총선을 지켜보는 유권자들의 얼굴에는 축제의 즐거움보다는 수심의 표정이 훨씬 많아 보인다. 정당의 후보자 공천 과정부터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니 선거 운동 중에도 막말과 저질 폭로가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관한 비전을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과거에 대한 보복과 응징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아마도 이번 총선은 역대 최악의 선거로 기억될 것이고,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의대 정원 확대를 두고 두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의정(醫政) 갈등은 국민 모두를 지치게 하고 있다. 어제 대통령과 전공의 대표의 만남이 성사되었지만, 앞으로 갈 길이 먼 듯하다.     ■  「 축제 아니라 갈등의 현장된 선거 끝없는 의·정 갈등에 국민들 불안 공동체 유지 위해 공감 정신 필수 지도층이 ‘내 탓이오’ 정신 살려야 」    국회의원 자리를 놓고 사생결단식으로 경쟁하는 정치인들이나 의료 정책을 두고 정부와 대치하는 의사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여럿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기심이 큰 동기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진화론자들에 의하면 생물의 유전자는 원래 이기적이고 자신의 번성만을 위해 활동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경제학의 토대를 제공한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해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전체의 이익이 증진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신선한 빵을 매일 먹을 수 있는 것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좀 더 잘 살려는 그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는 그의 또 다른 대표 저작인 『도덕감정론』에서는 인간의 ‘공감(共感)’ 능력의 중요성도 설파하였다. 스미스는 이 책의 서두를 “인간이 아무리 본래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이 천성으로 인하여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밖에는 얻을 것이 없다 해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였다. 즉 인간에게는 이기심도 있지만, 타인을 이해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공감 능력도 있어서 사회적 유대감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진화생물학자들도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이기적이지만, 무리를 이루어 사는 동물들에게는 상호 간의 공감 능력도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이러한 공감 능력은 집단의 생존에 도움이 되며, 인류가 다른 동물들보다 번성한 이유 중의 하나도 구성원 간의 뛰어난 공감 능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이기심만 드러나고 타인과의 공감 능력은 사라진 것 같아서 걱정이다. 공감 능력이 있다 해도 자기와 이해관계가 같거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만 작동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오히려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진영 논리가 지배하고 패거리 정치가 난무하는 것이다. 정치의 본래 역할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공존하는 지혜를 만드는 일인데, 정치가 오히려 진영 간의 적개심만 강화하고 이것이 선거를 통하여 극대화되고 있다. 이래서는 선거가 어떻게 끝나든 사회 공동체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울 수 있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의정 갈등도 우리 사회의 배려나 공감 정신의 결핍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정부는 그동안 고집스럽게 2000명 증원을 고수했고, 전공의들은 대화의 노력조차 없이 돌보던 환자들을 버리고 떠났다. 아무리 정부의 태도가 불만스럽다고 해도 환자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의사가 그렇게 쉽게 환자 곁을 떠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감 능력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다행히 교수들은 의료 현장을 지키고 있어서 최악의 파국은 막고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수많은 환자와 가족들은 불안에 떨며 지켜보고 있다. 교수들마저 공감 정신을 잃는다면 의사 집단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며, 사회를 유지하는 공동체 정신은 붕괴할 것이다.   과거에는 사회에 존경받는 어른들이 있어 사회적 혼란이 있거나 위기가 닥쳐오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곤 하였다. “내 탓이오” 운동을 주창하신 김수환 추기경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사회적 문제가 생기면 남 탓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가르침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역지사지(易地思之)요, 공감의 정신이다. 그런데 지금의 소위 사회 ‘지도자’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상대방 악마화에 앞장서고 있으며, 정부는 다른 의견을 듣는 데 인색하고, 의료계 대표자들은 자기 입장만 내세우고 있다. 이들의 행동으로 그동안 우리가 소중히 가꾸어 온 사회 공동체가 무너진다면 앞으로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할 것이며 책임은 누가 질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2024.04.05 01:10

  • [중앙시평] 신념과 고집 사이: 의대 증원 2000명의 경우

    이현상 논설실장 읽는 데 51분 걸린 지문 뒤 질문이 나왔다. 이 글의 요지는? ①2000명 증원 의지를 고수하겠다 ②2000명 증원을 꼭 고집하는 건 아니다.   이만하면 킬러 문항이다. 1만4000자 원고 중 ‘2000명’과 관련해 대화의 여지를 남겼다고 해석될 부분은 정확히 191자(띄어쓰기 및 문장부호 포함)였다. “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방안을 가져온다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는 구절을 포함한 네 문장이다. 그나마 이들 문장 바로 뒤에는 ‘하지만’이라는 역접 부사가 이어진다. 앞 네 문장이 전하고 싶은 요지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담화문의 대부분은 ‘2000명’의 도출 근거와 정당성, 의료 카르텔 타파 및 국정 개혁 의지 등으로 차 있다. 보통의 문해력을 가진 수험생이라면 ①번을 택하는 건 당연할 터. 그런데 그날 저녁 KBS에 나온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②번이 정답이란다(“숫자에 매몰되지 않겠다”). 출제 미스인가, 독해력 부족인가. 혹은 꿈보다 해몽이 좋은 건가.     ■  「 대통령 개혁 의지 평가할 만하나 ‘2000명 마지노’가 해법 막아버려 소통하지 않는 의지는 고집일 뿐 총선 뒤 더 절실해질 정치의 공간 」    2000명이 절대적 숫자가 아니라면 왜 대통령 본인이 명쾌하게 말하지 않는 걸까. 자존심 때문인가. 지금이 제왕무치(帝王無恥)의 시대도 아닐진대,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돌아설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 리더십이다.   국민에게 문해력 ‘킬러 문항’을 냈다고 어깃장을 놓아봤지만, 사실 킬러 문항에 갇힌 이는 윤석열 대통령 자신이다. 여러 차례 2000명을 마지노선으로 제시하는 바람에 퇴로가 막혀 버렸다. 전장에서 가장 어리석은 진법이 배수진이다. 죽을 각오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 때 택하는 마지막 방법일 뿐이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너무 구체적 수치를 정해버림으로써 협상과 조정이라는 정치의 공간이 없어져 버렸다.   대통령은 건폭과 화물연대를 제압한 개혁 사례를 들었지만, 의사 집단은 이들보다 훨씬 교섭력이 강하다. 무엇보다 대체 가능성이 없다. 본분을 팽개친 의사의 집단행동에 국민은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대통령실과 정부가 거칠게 진격했다가 총선 앞에서 오히려 의사들에게 대화하자고 매달리는 양상이 됐다. 이러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망언이 명언이 될까 두려울 지경이다. 좀 더 정교한 접근이 필요했다.   답답한 것은 국민이다. 지난 2월 초 윤 대통령이 2000명 증원 카드를 꺼냈을 때 여론은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지금도 의사 대폭 증원에 대한 지지 여론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지금 국민이 듣고 싶은 건 당위성이나 의지의 되풀이가 아니라 해법이다. 취임식 넥타이를 매고 나온 대통령은 ‘초심’을 역설했지만, 국민 귀엔 잘 들리지 않았다. “그건 알겠고, 그래서 어떻게 풀려고?”를 국민은 묻고 있다.   정치의 공간이 사라진 것이 오직 의정 갈등에서뿐이랴. 윤 대통령 집권 2년 내내 협상과 조정이라는 정치 본연의 기능이 멈췄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정치가 사라진 자리엔 혐오와 배제가 판을 쳤다. 거대 야당의 횡포가 이유라지만, 국정의 최종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내키지 않더라도 야당에 손 내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드물었다. 자신을 대통령 자리에 올린 선거연합마저 해체해버리고 오직 ‘의지’에 기대 국정을 돌파하려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그 과정에서 오만과 불통의 이미지가 입혀졌다. 3대 개혁 같은 굵직한 국정과제의 해결 동력마저 사라져 버렸다. 지금 총선에서 여당이 고전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정부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한 유권자의 회의일 것이다.   정치인에게는 ‘신념 윤리’만큼 중요한 것이 ‘책임 윤리’라고 베버는 강조했다.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신념에 따른 정열, 그에 따른 책임감, 그리고 사태를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다.”(『직업으로서의 정치』) 국민이 정치인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본인의 신념뿐 아니라 그 신념을 어떻게 현실화하겠다는 해법(solution)이다. “잘하겠습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데 “열심히 하겠습니다”만 외치는 신입사원을 보는 상사의 답답함을 국민은 윤석열 정부에 느끼고 있다.   고집이 신념으로 승화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신념이 고집으로 여겨지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소통하지 않는 신념은 제3자의 눈에는 고집일 뿐이다. 버락 오바마는 “나의 신념은 어느 정도의 의심은 인정하는 신념”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달인이라는 오바마의 말을 신념의 정치인을 자부하는 윤 대통령이 참고했으면 한다. 니체는 “열정으로부터 견해가 생기고, 정신적 태만이 이를 신념으로 굳어지게 한다”고 설파했다. 의심하지 않는 신념은 신념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불가능한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잡을 수 없는 저 별을 향해 팔을 뻗는”(‘맨 오브 라만차’ 중) 낭만주의가 아니라면 신념은 현실에서 벼려져야 한다. 여의도 정치를 욕하지만, 그게 정치의 현실이다. 어쩌면 총선이 끝난 뒤 더 절실해질지 모를 현실이다.     이현상 논설실장 leehs@joongang.co.kr

    2024.04.04 00:55

  • [중앙시평] 팬덤 포퓰리스트 정당의 출현

    박상훈 정치학자 과거 누군가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개탄했지만, 지금 우리는 ‘죽은 정치가의 사회’ 내지 ‘정치가가 사라진 민주주의’를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시인의 상상력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이 문제가 있듯, 정치가다운 정치가를 기대할 수 없게 된 민주주의도 얼마든지 위험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정치에서 승부를 보는 체제다. 특정 혈통이나 특출한 가문에 통치를 맡기는 군주정이나 귀족정과 달리, 민주주의는 시민이 적법하게 선출한 정치가에게만 통치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가 나쁘면 민주주의도 나쁘기 마련이고, 선거가 좋은 정치가를 뽑는 기제로 작동하지 않으면 좋은 정치, 좋은 민주주의는 기대할 수 없다. 미국의 트럼프나 러시아의 푸틴처럼 ‘대중이 사랑하는 독재자’를 만날 수도 있고, 오늘날 우리처럼 판사·검사·변호사·법대 교수 출신이 선거를 지배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     ■  「 심판·청산 앞세운 법률가의 정치 공존과 타협 모색 정당정치 위협 입법자를 뽑는가, 투사를 뽑는가 여론조사가 공천 좌우해선 문제 」    이미 행해진 일을 두고 다투는 법률가와 달리, 정치가는 앞으로 행해져야 할 일을 다룬다. 법률가가 법의 처분을 통해 누군가의 과거 행적을 심판하고 청산하는 일을 한다면, 정치가는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변화와 개선의 여지를 넓히는 일에서 보람을 찾는다. 법률가는 권력 지향적이거나 당파적이지 않을 때 제역할을 한다. 정치가는 다르다. 정치가는 권력을 추구한다. 오래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강조했듯, 정치가란 권력을 이해하고 선용할 수 있는 특별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정치가는 당파적 입장 없이 행동할 수 없다. 성장파인지 복지파인지, 동맹파인지 평화파인지와 같은 정견이 분명하지 않으면 그가 행사할 권력에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인간 사회든 정치가는 책임있게 길러져야 하는바, 그 일이야말로 정당에 맡겨진 민주적 소명이다.   정치가 좋아야 민주주의도 가치가 있다. 그 어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시민 집단들이 가진 이해관계와 열정은 갈등적이다. 정치는 그런 갈등 속에서 일하고, 해결할 수 없는 시민들의 요구 사이에서 공존과 타협의 길을 낸다. 그렇게 도달한 공적 결정이라야 정치는 권위를 갖는다. 그래야 여야를 달리 지지하는 시민들도 법률과 공공정책에 순응할 수 있다. 여야 정당에 의한 상호 책임의 정치 없이 공동체의 안녕과 통합을 이끌 수 있는 민주주의란 없다. 선거가 정당이 양성해 낸 좋은 정치가를 선발하는 시민 잔치이자 시민 총회의 역할을 해줘야 좋은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아니면 공천도 선거도 정치 밖에 있어야 할 사회적 강자들을 불러들이는 투기장으로 얼마든지 퇴락할 수 있다.   정치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정당을 장악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민주주의는 악몽 중에도 가장 무서운 악몽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덧 우리 현실이 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정치가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국민이나 당원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국민 직접민주주의의’와 ‘당원 직접민주주의’의 주장이 한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이번 총선은 그 결정판을 보여주었다. 공천에서 정당들은 국민과 당원의 참여를 최대화했다. 그 방법은 여론조사였는데, 여론조사가 이번처럼 많았던 적이 있었나 싶다.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이런 공천 방법에 들어간 돈이 엄청났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조사비 모두 공천 신청자들이 부담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여론조사 업체들은 돈을 벌었다. 정당은 ‘공직 후보자 양성 기관’이라는 본래 역할 대신 돈 받고 인력 채용을 대행하는 기관 역할을 했다. 열성적 참여 의지를 발휘한 팬덤 시민과 팬덤 당원들은 원하는 조사 결과를 성취해냈다. 팬덤 포퓰리스트들은 한결같이 ‘국민주권’과 ‘당원주권’을 이상화한다. 그들이 설계한 국민 참여, 당원 참여 방법으로 팬덤 포퓰리스트들은 이번 공천에서 최대 승리를 거뒀다. 그러는 사이 정당은 팬덤 리더와 팬덤 당원만 있으면 되는 팬덤 정당으로 변모했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꼭 있어야 할 ‘당내 다원주의’는 사라졌다. 승자가 정의를 독점하고, 이견은 곧 이적으로 취급받았다.   모두가 참여를 말하고 민심을 따른다고 하지만, 선거가 입법자를 뽑는 것인지 투사나 전사를 뽑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오로지 자신의 당만 남고 나머지 정당들은 사라지기 바라는 ‘일당제주의 심리’가 열성 지지자와 열성 당원의 의식을 지배한다. 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상대 당에 대한 적개심, 패배에 대한 공포, 그래서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조바심만 있다. 전보다 더 무례하고 공격적인 시민들이 늘고 있다. 누군가에 대한 열광적 지지가 다른 이들에 대한 억압을 동반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정당이 더 이상 정치가다운 풍모나 기품을 가진 이들을 길러낼 수 없게 된 현실에 있다. 한국의 정당은 팬덤 포퓰리스트의 야심을 실현하는 도당(徒黨)처럼 변하고 있다.   박상훈 정치학자    

    2024.04.02 01:16

  • [중앙시평] 고준위 방폐물 특별법, 21대 국회가 매듭지어야

    김명자 KAIST 이사장·전 환경부장관 4·10 총선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21대 국회는 5월 29일 종료된다. 현재 국회에 접수된 법률안은 2만5785건이고, 미처리 법안은 1만6333건이다(국회의안정보시스템). 정부 발의안은 3.2%로, 필자가 정부에서 일하던 15·16대에 비하면 의원 입법이 크게 늘고 가결률은 급감했다. 법사위에 계류된 민생법안은 400건 이상이고,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한 것도 다수다. 5월 국회가 개점휴업하는 경우 민생법안은 무더기로 자동 폐기된다. 그중에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방폐물) 관리 특별법도 들어있다.   우리나라 방폐물 관리 정책의 역정은 험난했다. 1978년 고리 1호기 가동 후, 1983년부터 아홉 차례 추진된 고준위 방폐물 정책은 줄줄이 무산됐다. 당초 1988년 ‘방폐물관리기본방침’은 동일 부지 내에 95년까지 중·저준위 영구처분시설, 97년까지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 건설이었다. 그러나 89년 경북 후보지역 조사, 91년 안면도, 95년 굴업도 처분장 계획이 잇따라 백지화되고 2003년 부안사태에서 소요는 절정에 달했다.     ■  「 원전 46년 역사 동안 미해결 과제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 포화 상태 법 제정돼야 부지 선정 작업 시작 총선 후 5월 회기에서 처리하기를 」    2004년 노무현 정부는 정책 기조를 바꾸어 중·저준위 처분장과 고준위 중간저장시설을 별개로 건설하기로 한다. 2005년 중·저준위 특별법은 “사용후핵연료 관련 시설은 유치지역 안에 건설하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그로써 19년 만에 중·저준위 처분장 부지는 경주지역으로 선정됐지만, 고준위 처분은 기약 없이  밀렸다.   잇따라 풍파를 겪으며 역대 정부는 ‘국민의 공감’을 얻겠다고 강조했다. 원자력은 가치에 민감하고 찬반 선호가 갈리는 분야다. 뇌과학 연구는 사람의 가치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한 쪽이 다른 쪽을 설득하기 쉽지 않다. 2014년 박근혜 정부는 ‘출발부터 삐걱거린다’는 공론화위원회를 거쳐 ‘고준위방폐물관리기본계획’(2016년)을 내놓았다. 원전 가동 38년 만에, 고준위 방폐물 관리정책 시도 33년 만의 결실이었다. 구체적 계획이 없는 로드맵이었으나 2020년까지 부지 선정, 2035년 중간저장시설, 2053년 영구처분시설 가동이라는 목표가 제시된다.   이후 2017년 문재인 정부는 부지 선정 작업에 들어가는 대신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를 출범시킨다. 위원회의 첫 번째 권고는 특별법 제정이었다. 후속 조치로 발표된 제2차 기본계획(2012년)은 제1차와 내용이 비슷해서, 부지 선정 절차 개시 후 13년 내 부지 확보, 20년 내 중간저장시설 건설, 37년 후 영구처분시설 확보였다.   선진국도 시행착오를 겪었다.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폐장 건설에 성공한 핀란드는 1977년 원전 도입 후 6년 만에 부지 선정에 나서 2000년에 올킬루오토를 부지로 확정한다. 이후 2016년 착공으로 450m 지하에 ‘온칼로’(洞窟)를 건설해서 내년부터 가동할 예정이다. 제2주자인 스웨덴은 1977년 법 제정 후 부지 선정에 들어갔으나 공사를 하려다 반발에 부딪쳐 표류한다. 그 뒤 1992년 원점으로 돌아가 지방정부에 서한을 보내는 등 재작업을 거쳐 2009년 포스마크를 부지로 선정한다. 2022년에는 고준위 처분시설 사업 허가를 발급했다.   우리 사용후핵연료는 원전 내 임시저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저장공간이 차고 있다. 그동안 저장조의 포화 시점이 계속 바뀌면서 신뢰를 잃은 측면이 있으나, 고밀도 조밀 저장대와 저장대 추가 설치 등으로 대응해 왔다. 이제 한계에 이르러 2031년 고리·한빛부터 2032년 한울, 2044년 신월성 등의 순서로 포화된다고 한다. 2022년 2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녹색분류체계에 원자력을 녹색 경제활동으로 포함하면서 2050년까지 고준위 방폐물 최종처분 시설을 운영하는 계획을 수립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21대 국회는 4개의 고준위 특별법안을 놓고 십여 차례 논의한 끝에 대체로 두 가지 쟁점을 남겼다. 원전 부지 내 건식 저장시설 규모와 고준위 방폐물 처분장 확보 시점이 그것이다. 고준위 방폐물 관리 원칙에는 기술혁신 가능성 등을 고려해 재검토할 수 있는 의사결정의 ‘가역성’이 있다. 즉 조건 변화에 따라 법률은 변경할 수 있다. 이쯤해서 최종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원전은 현존하는 기술이다. 원자력 전기를 쓰는 한 사용후핵연료 관리는 반드시 해야 한다. 원전 가동 46년 역사에서 30여년 만에 보수·진보 정권이 각각 두 차례 기본계획을 내놓았다. 이제 2차 기본계획 시행을 위한 특별법 제정 차례다. 법적 근거가 있어야 부지 선정과 지역주민 지원을 할 수 있다. 더 이상 미룬다고 새롭게 나올 것도 없다. 이대로 ‘폭탄 돌리기’를 계속한다면, 전기가 끊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20대 국회에서 자동폐기됐던 전철을 밟지 말고, 5월 회기 내에 국가적 난제를 풀어야 한다. 한때 국회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전력수요가 급증하는 AI 시대의 21대 국회가 국가 전력 공급체계 안정화 등 민생법안 처리의 책무를 다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김명자 KAIST 이사장·전 환경부장관    

    2024.03.29 00:37

  • [중앙시평] 총선판이 좌우 극단으로 가는 이유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이번 총선은 상식을 초월한다. 선거 이론의 상식은 선거 때가 되면 좌우 정당 모두 중도로 모인다는 것이다. 그래야 외연을 넓히고 한 표라도 더 모아 선거에 승리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번 총선은 전혀 그렇지 않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이후 이재명 대표의 기치 아래 일사불란하게 좌클릭했다. 선거 때가 됐는데도 더 급진적으로 나아가면 나아갔지 중도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보인다. 국민의힘도 한 달 전과 달리 판세가 불리하게 기울어진 것이 분명해 보이자 어정쩡하게 우클릭과 보수 결집으로 기운다. 민주당은 선거판 왼쪽은 싹쓸이할 줄 알고 진보정당을 포함한 비례연합까지 만들었는데 느닷없이 조국혁신당이 그보다 더 왼쪽에 시쳇말로 빨대를 꽂았다. 중도가 비어있을 줄 알았던 제3지대 정당들은 관심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자멸하는 중이다. 왜 선거 이론의 상식과 달리 좌우 극단으로만 나아가고 중도를 외면하는 걸까.     ■  「 여야 좌-우 클릭에 3지대 맥 못 춰 강성 지지층 결집, 방탄 꾀하는 야 코너 몰리자 이념 의존 도지는 여 총선 후에도 극단 정치 계속될 듯 」    개인적인 인센티브만을 본다면 이재명 대표의 좌클릭은 충분히 합리적으로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사법 리스크는 너무 많아서 비전문가로서는 몇 개인지 세지도 못하겠는데, 언론보도에 따르면 혐의가 9개라고 한다. 이화영 전 부지사 등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체로 관련자들의 진술도 일치하고 있어서 그에게 유리한 재판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이 중 하나라도 유죄로 확정된다면 중대한 것들이다. 좋게 봐줘서 각각 혐의의 유무죄 확률이 반반씩이라고 한다면, 그가 9개 혐의를 모두 무죄로 판결받을 확률은 가위바위보 아홉 판을 연달아 이길 확률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이런 확률에 의지하기보다는 서둘러 국회의원과 당대표라는 방탄조끼를 입고 친명 의원들과 강성 지지층을 결집해서 총선에서 이기고 나아가 대선까지 거머쥠으로써 정치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확률 높은 게임이다. 그러려면 중도의 온건한 지지로는 안 되고 왼쪽에 있는 충성도 높은 지지층이 필요하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비어있는 중도와 텃밭인 보수를 아우르기에 유리한 상황인데, 자신들의 정책이 왜 중요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인지 설명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하필 이 시점에 이종섭 대사를 임명하는 정무 감각도 문제지만, 인도·태평양 안보 구도에서 과거와는 완전히 위상이 달라진 호주 대사의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도 못한다. 문재인 정부의 무모한 공시지가 현실화 계획을 백지화하겠다고 했지만, 조세 정의와 복지국가 지속가능성 차원에서 그것이 왜 중요한 정책 변화인지를 설명하기는커녕 최대 수혜자인 한강 벨트에서도 밀린다. 최대 현안이 되어버린 의대 정원 증원 문제도 초고령 사회 대비와 차세대 성장동력 확보 차원에서 달리 접근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거친 접근 끝에 총선을 앞두고 의사들의 선처를 기다려야 할 처지가 되었다. 얼마든지 장기적인 청사진을 가지고 일관되고 중도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일들을 그렇게 하지 못하니, 코너에 몰리자 이념적으로 치우친 발언과 전 정부 탓이 나오면서 우클릭해버린다. 이 대표의 좌클릭이 계획적이라면 윤 대통령의 우클릭은 우발적이다.   국민의힘 우세가 점쳐지던 한 달 전에는 한동훈 대 이재명 구도였다면, 정권심판론이 득세한 지금은 윤석열 대 이재명 구도가 되어버렸다. 다시 한 달 전 우세 분위기를 회복하려면 한 위원장의 정치적 위상을 대선후보급으로 높여서 회고적 투표가 아닌 전망적 투표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할 텐데, 용산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선택이다. 변수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민주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게 대부분 전문가의 예측이다. 이 대표의 지휘 아래 민주당이 승리한다면 그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마침 미국에서도 트럼프 전 대통령을 둘러싸고 비슷한 일이 진행 중이다.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는 훨씬 더 심각하다. 그는 91개의 중범죄로 기소되어 있고, 범죄의 종류도 사기, 성폭력, 매수, 비밀문서 유출, 내란 선동 등이지만 공화당 대선후보로 사실상 확정되었다. 트럼프가 만약 유죄를 선고받는다면 대선을 완주할 수 있을까. 미국 헌법은 내란에 가담하거나 헌법을 위협한 적을 지원하면 공직을 맡을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2021년 1월 6일 미 의사당 난입 사태를 사실상 선동했던 것이 이 조항에 해당하는지는 논쟁 중이다. 작년 11월에 나온 첫 판결은 그가 내란에 가담했지만 대선에는 출마할 수 있다는 판단이어서 더 큰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나라 공직선거법은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피선거권을 박탈하기 때문에 차기 대선 이전에 형이 확정되면 선거에 나갈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재판을 지연하든, 사법부를 압박하든 대선 이전에 판결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 혹은 탄핵을 통해 차기 대선일을 앞당기는 것이 될 것이다. 총선이 끝나도 당분간 극단의 정치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2024.03.28 00:40

  • [중앙시평] 가치를 세워야 나라가 산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1990년대 후반 영국 대학 조교수일 때 필자의 연봉은 세전 2000만원을 조금 넘었다. 4인 가족이 겨우 먹고살 정도였다. 같은 나이 또래의 교사나 소방관과 비슷한 액수였다. 교수들의 불만은 정부를 향했다. 교수노조는 수업을 중지하고 데모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참여하는 교수는 극소수였다. 학교 후문에 몇 명의 교수가 엉거주춤 서서 월급 인상을 요구하는 팻말을 들고 있는 정도였다. 필자는 한 영국인 교수에게 왜 데모에 동참하지 않는지 물었다. 그가 말했다. “내가 좋아서 택한 직업이다.”     ■  「 가치와 계산이 조화돼야 선진국 손익만 따지는 한국, 가치 후진국 의사 파업, 저출산도 이에서 비롯 종교와 정부의 역할 절실히 필요 」    한국인은 어떻게 직업을 선택할까. 세계가치관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84%가 직업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월급과 안정성, 즉 평생 소득을 꼽았다. 조사 대상 47개국 중 한국보다 이 비중이 높은 나라는 에티오피아, 이집트, 루마니아에 불과했다. 조사가 행해졌던 2005~09년에 세 나라의 평균 소득은 3000달러 정도였지만 한국은 2만 달러를 넘었다. 그런데도 돈 대신 보람과 동료를 택한 한국인의 비중은 16%에 불과했다. 반면 스웨덴인의 76%는 보람과 동료를 직업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답했다. 심지어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 대만, 중국도 이 비중이 50%, 35%, 26%였다. 이처럼 생계유지가 가능한 나라에서 한국인만큼 직업 선택에 돈을 중시하는 나라는 없다.   한국의 국력은 성장했지만 가치의 힘은 퇴보했다. 우리는 경제개발 시대의 ‘잘살아 보세’를 더 발전된 가치로 대체하지 못했다. 오히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잘살아 보세’는 ‘나와 내 가족만 잘살아 보세’로 퇴행했다. 성공의 기준이 돈으로 획일화되다 보니 심각한 깔때기 현상이 생겼다.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간 다수가 깔때기란 경쟁의 병목에서 쥐어짜이고 뒤틀리고 튕겨 나간다. 깔때기를 통과한 사람도 괴롭고 지치기는 매한가지다. 소득이 늘어도 행복하지 않다. 자살률이 높다. 당연히 사회 갈등 수준도 높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모든 문제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그리고 집단으로 뭉쳐 기득권을 방어하려 애쓴다. 이 같은 고갈등·고비용 사회에서는 성장은커녕 현상 유지도 버거워진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가치는 사라진다. 저출산도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다. 예전에는 결혼과 출산은 가치였기 때문에 비용을 계산해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선진국의 출산율이 우리보다 높은 근본 이유도 결혼과 출산을 여전히 가치의 영역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 증원과 전공의 파업 문제도 이와 유사하다. 본질적인 문제는 전공의들이 의사 증원에 따라 미래 소득이 감소할 것을 우려하는 데 있다. 결국 환자를 치료한다는 숭고한 직업을 소득 창출의 도구로 물신화(物神化)시킨 까닭이다. 선진국에서는 계산을 따르는 합리성과 계산을 거부하는 가치가 서로의 영역을 지키면서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원시키는 ‘합리성의 재앙’에 직면했다. 마음의 힘에서 한국은 아직도 후진국이다.   너와 나를 하나로 연결하는 공동체의 가치를 세워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공동체의 가치를 민족에서 자유로 전환하려 한다. 자유는 인간과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자유는 너와 나를 묶어주지 못한다. 약자에 대한 공감과 타인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너와 나 사이의 연대 의식이 형성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물질 중심 가치관은 이마저 해체해 왔다. 자녀 양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을 묻는 세계가치관조사에서 한국은 ‘타인에 대한 관용과 존중’을 택한 비중이 최하위인 나라 중 하나다.   정부부터 신뢰와 공감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칼의 정책’으로썬 통합의 가치를 만들기 어렵다. 단기간에 정책 목표는 달성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날카로운 공권력은 자발성과 호의에 기초한 시민 간 연대를 약화한다. 비정상적인 의료체계의 짐을 가장 많이 져왔던 전공의의 호소를 귀담아듣고 심각하게 왜곡된 의료수가도 바로잡아야 한다. 의료수가는 일종의 가격이다. 그런데 지금의 의료수가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매우 중요한 가격기능을 무시하고 있다. 주어진 예산총액을 전제로 의료행위 사이의 형평성만 따졌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희소성 항목을 신설하고 사회과학자를 참여시켜 기피 의료분야와 지방 및 고난도 의료행위의 희소가치를 반영해야 한다.   종교는 역할을 다하고 있나. 종교는 가치관의 뿌리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라고 했다. 불교의 유마경에서 유마 거사는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며 병자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유교의 인(仁)도 사람 사랑이 핵심임을 가르친다. 신앙은 영원의 눈으로 현재를 바라보고 초월의 관점에서 인생을 봄으로써 돈과 차별되는 가치를 정련해 낸다. 의사 파업에서 생각한다. 이 땅에 ‘빛과 소금’은 어디로 갔나. 이 시대의 불자는 누구인가. 유교의 덕목은 어디로 사라졌나. 우리 사회가 신앙인에게 던지는 뼈아픈 질문이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2024.03.27 00:36

  • [중앙시평] 대화와 타협 절실한 의료개혁

    박명림 연세대 교수· 정치학 의료개혁 문제가 최악의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결론부터 말해 의료체계를 혁신하여 지방회복과 의료개혁을 함께 달성하려는 정부 구상은 옳다. 의료인력 증원 역시 맞다. 그러나 문제는 의료개혁과 지방소멸 방지가 일방적 밀어붙이기를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민주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의대와 의사 규모의 급격한 증대가 의료개혁의 선결 과제도, 전부도 아니다.     ■  「 의대 증원 및 의료개혁 필요하나 일방적 강행은 민주주의에 위배 공공·필수의료, 정부 책임 더 필요 자유민주적 원리로 해법 찾아야 」    전인류적 위기인 코로나19를 거치며 세계는 한국의 의료수준이 얼마나 높고, 의료시스템이 얼마나 잘 갖추어져 있는지를 상찬한 바 있다. 동시에 우리는 공공의료와 필수의료 부문의 기구와 조직, 인력과 예산이 얼마나 작고 부족한지도 절감하였다. 그러나 코로나19 시기에 ‘방역’과 ‘경제’를 의료인들의 헌신과 국민의 협조를 통해 세계 최선두권으로 통과하자 정부는 과거로 돌아갔다. 예산편성을 포함해 공공의료와 필수의료에 대한 정부 역할과 책임, 기구와 지원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 줄어들었다. 의대 정원 증가와는 반대방향이다.   즉 지금 문제는 정부 스스로 책임과 역할을 통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의료생태계 개혁은 방치·역행하면서, 대학과 의료 부문에 개혁의 책임과 부담을 요구하는 데에 있다. 일정한 교육과 수련 과정 이후에 현장에 투입될 의대 정원 증가에 앞서 공공의료·필수의료·지방의료의 기관과 예산, 인원과 역할, 수준과 지원을 대폭 제고하는 게 먼저다. 교육생태계 개혁에 앞서 입학 숫자와 정원만 늘린 관계로, 철저히 실패한 대학 교육개혁의 경우를 보자. 국가의 공적 책임과 역할은 외려 역진적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끌던 시기의 대학교육을 보면 국공립 대 사립의 숫자는 1960년 34개 대 47개(이하 동일), 65년 39 대 92, 70년 57 대 95, 75년 68 대 122, 80년 68 대 147이었다. 공공과 민간 사이가 그런대로 균형을 이뤘다. 그러나 85년 52 대 184, 90년 55 대 187로 확대되더니 2000년 62 대 288, 2005년 60 대 301로 완전히 벌어졌다.   정부 역할과 교육공공성 강화는 회피·역행한 채 급증시킨 사립대학들의 상황은 오늘날 어떤가? 국가의 책임방기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정부의 현재 의료개혁 방식이라면, 대학교육의 ‘역할’과 ‘책임’은 민간(대학)에게 맡겨놓고, ‘규모’와 ‘정책’은 정부가 통제했던 모순을 반복할 것이다. 즉 대학증가에 앞서 대학교육과 교육생태계의 개혁이 먼저였다는 이야기다.   교육개혁 실패가 의료 영역에서 재연되어서는 안 된다. 공공의료·필수의료·지방의료 강화는 의대 정원 증원을 통해 배출될 미래 의료의 문제인 동시에 당장 절실한 문제다. 게다가 지방의료 위기는 지방붕괴의 결과요 귀결이지, 결코 원인도 요인도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수도권과 지방, 그리고 상급종합병원·종합병원·병원·요양병원·의원 사이의 매출액, 지방환자, 요양급여, 개·폐업 현황, 중증·경증 진료비의 전체 규모와 차이와 평균을 분석하면 수도권과 상급종합병원으로의 과도한 집중은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국제 의료 통계를 따를 때 증원도 필수다.   그러나 더욱 놀랍게도, 한국 사회 다른 영역의 서울 및 최상층부 점유율과 소득의 초(超)과두독점·초과두집중에 비하면 의료 부문은 그나마 낫다. 즉 병원은 권력·법조·금융·교육·언론에 비해 서울과 상층 집중도가 훨씬 더 낮다. 이 말은 지방의료 확충을 늦추라는 말이 아니라, 다른 부문의 더 심각한 불균형 해소와 함께하지 않으면 의료 불평등과 지방붕괴는 해소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권력과 자원 배분 권한의 완전한 중앙 독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돈? 서울의 대형 은행은 단 하나가 지방금융 전체 규모와 맞먹으며, 4대 은행의 예대 점유율은 80%에 달한다. 법? 전국 지방변호사 규모는 서울 10대 대형로펌 규모에 불과하며, 개업변호사의 85%는 수도권에서 영업한다. 언론? 중앙일간지 단 한 곳의 매출액은 15개 지방신문의 전체 매출액보다 훨씬 크다. 권력·법·돈에서 지방은 서울의 한 작은 부분도 안된다. 끔찍할 정도다. 바른 대책이 없다면 지방의대 정원증대의 퇴영을 미리 보는 듯하여 크게 두렵다.   철저히 실패한 이들 부문과 대학개혁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한국 의학교육과 의료기관의 수준과 경쟁력은 세계 최고다. 최근 발표에 의하면 한국은 세계 최고 병원 순위에서 미국·독일에 이어 세계 3위를 하였다. 세계 100대 병원에도 6개가 포함되었다. 즉 반도체, 문화(한류), 자동차, 스마트폰과 함께 한국의 의료 수준은 단연 세계적이다.   이번 일방적인 의대 정원 증가가 과학기술 연구개발비 급감과 맞물려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과 이공계 대학교육, 의료시스템을 크게 후퇴시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모두가 동의하는 의료개혁과 지방회복을 위해 강행과 투쟁을 접고 대화와 타협의 자리로 돌아오라. 자유민주주의의 본령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024.03.22 00:42

  • [중앙시평] 유권자의 변심은 정치발전 도움될 수 있어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선거는 민주주의의 엔진이기도 하고, 꽃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 선거의 지형과 유권자의 선택은 나라에 따라, 시대에 따라 무상하게 변한다. 영국도 금년이 총선의 해다. 내각제 영국의 경우 만약 내일 선거가 있다면 집권여당 보수당의 대패와 야당 노동당의 압도적 승리로 정권교체가 예상되고 있다. 현재 각종 지지율 조사에서 노동당이 보수당을 2배 이상 큰 차이로 앞서고 있다. 최근 이코노미스트지(誌)가 빅데이터를 이용해 영국 유권자의 투표 성향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흥미롭다. 과거 영국 정치 지형을 움직인 것은 주로 계층 간 성향 차이였으나, 이제는 언제 태어났냐는 세대의 차이가 더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2019년 선거의 경우 45세를 분기점으로 노동당과 보수당 지지 성향이 갈렸으나, 금년 선거에는 이것이 70세 가까이로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만큼 보수당이 당내 파벌 분쟁과 각종 스캔들로 국민의 신망을 잃은 반면 노동당은 케이 스타머 대표가 당을 보다 중도노선으로 끌어오면서 지지층을 확장한 때문으로 보고 있다.     ■  「 정당 성과에 따라 투표 결정할 때 더 나은 정치·정책 기대할 수 있어 정치 바꾸려면 유권자가 바뀌어야 중도층 역할 강화되는 선거 되길 」    이는 또한 영국의 경우 1960년대 이후 각 선거에서 다른 정당을 선택하는 유권자의 비중이 점점 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열성 고정 지지자보다 선거 때마다 정당의 성과와 노선에 따른 스윙보트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에만 해도 유권자의 8분의 1만이 차기 선거에서 다른 정당에 투표했으나 1980년대에는 이것이 5분의 1로 늘었고, 금년 선거에서는 유권자의 5분의 2, 즉 40%가 지난번 선택했던 정당과 다른 정당에 투표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선거 결과를 유동적으로 만들고 정권 교체를 잦게 하는 면이 있을 수 있으나, 정당들로 하여금 더 좋은 정책과 정치로 경쟁하게 만들고, 집권당에 정신 바짝 차려 국가경영을 잘 수행하도록 하는 채찍으로 작용하게 된다며 이코노미스트지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열성 지지자들, 고정 지지자들이 견고할수록 정치인들은 핵심 지지층에 충성 경쟁을 하고, 국가를 위한 정치보다 당내 정치에 몰두하게 된다. 중도 성향 정치인의 설 자리는 좁아진다. 최근 미국의 정치가 점점 이런 모습으로 변해오면서 식자들은 미국 민주주의의 퇴행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금 세대보다 계층과 지역, 인종에 따라 투표성향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선거지형도 조금씩 변하고는 있지만 지역별, 계층별 투표성향 차이가 고착돼 있다. 호남과 영남으로 갈라진 견고한 핵심지지층이 후보의 면모나 당의 정책보다 당의 이름만 보고 ‘묻지 마’ 투표를 하는 성향은 여전히 견고하다. 수도권에서는 소득 수준이 다른 강남과 강북이 투표 성향의 큰 차이를 보인다. 지난 총선의 경우 광주·호남에서 지금의 여당은 한석도 얻지 못했고, 대구·경북에서는 지금의 야당이 한석도 얻지 못했다. 호남 주민이 대부분 진보적일 수 없고 영남 주민이 대부분 보수적일 수 없을진대 이러한 투표 성향은 민주주의의 발전, 국가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정당의 정책경쟁, 정치의 질 경쟁을 견인하지 못하고 상대에 대한 비방, 끌어내리기를 부추기게 된다. 국가의사 결정에서 합리적 중도층의 역할이 제한된다.   또한 한국은 세대별 정치성향 차이도 두드러진다. 30·40대는 진보성향이, 60대 이상은 보수성향이 강하다. 20대와 50대는 뚜렷한 성향을 규정하기 어렵다. 젊은 층은 고령층보다 성장과 사회구조 개혁, 기회의 균등, 주거와 환경, 교육 및 육아 등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며 미래지향적 투표를 하는 성향이 강하다. 이번 선거 유권자의 구성은 20~40대와 50대 이상 유권자의 비중이 거의 비슷하다. 아마도 이런 균형은 이번 선거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차기 선거에서부터는 50대 이상의 비중이 훨씬 커지게 된다. 반면 여태까지의 투표율을 보면 20~40대가 50~70대보다 10% 포인트 이상 낮다. 유럽과 일본의 경험을 보면 유권자가 고령화될수록 경제사회 개혁이 정체되고 현상유지적 정책이 선호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제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이번 총선에서 우리 유권자들이 자신의 출신 지역과 계층, 그리고 과거 투표한 정당에 고착되지 않고, 지난 4년 어떤 정당이 더 좋은 정책과 합리적 정치를 추구해 왔는지를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해보고 정당과 후보를 선택했으면 한다. 국민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어느 당이, 어떤 정치인이 더 좋은 발상과 더 많은 노력을 해왔고, 할 것인가를 보고 투표하기를 바란다. 또한 정당과 후보자들이 젊은 세대와 중도층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정책으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들을 더 많이 투표장으로 향하게 하는 노력들을 했으면 좋겠다.   유권자가 바뀌어야 정치가 바뀐다. 좋은 정치, 나쁜 정치, 미래를 일으키는 정책, 미래를 갉아먹는 정책-. 국가가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되는가는 민주주의하에서 결국 국민의 책임이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2024.03.15 00:38

  • [중앙시평] 녹색 에너지 전환, 소비자의 결단 없인 불가능

    정내권 초대 기후변화 대사 강원도 고성에 지난달 쏟아진 폭설의 적설량이 146.4㎝를 넘으면서 기상청 향로봉 측정소의 측정 한계치를 넘었다. 사상 처음 관측 장비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최근 미국에서는 해수 온도의 이상 상승에 따른 ‘대기의 강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미국 서부부터 중부까지 기록적인 폭설과 폭우가 동시에 발생해 큰 피해를 줬다. 북유럽은 수은주가 영하 30도 아래로 내려갔고, 중국 만주 지역은 심지어 영하 50도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은 지구촌 곳곳을 강타하고 있는 ‘기후 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난해는 관측 사상 가장 더웠던 한 해였고, 지난 1월은 가장 더운 1월이었다. 기후변화가 이미 국제적 합의 한도인 섭씨 1.5도를 넘었다는 관측 통계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  「 지구촌 곳곳에 큰 피해 기후재난 파리협정은 정부·기업에만 초점 에너지 소비자들 방관자로 남아 ‘나부터 비용 내야’ 의식전환 절실 」    그러나 가속하는 기후 위기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대응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열린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 28)는 화석연료 전환에 합의했으나, 2015년에 서명한 ‘파리 기후 협정 체제’에 따라 각국이 2018년 서약한 감축 목표치들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지 않다고 평가했다.   현행 파리 기후 협정 체제는 ‘국가의 자발적 기여(NDC·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기반을 둬 정부 목표치를 설정하고, 기업의 이행 책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정작 에너지를 소비하는 소비자들이 방관자로 남아 있다 보니 기후 위기 대응이 실질적 성과를 거두기 쉽지 않다.   탄소 중립과 녹색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이 주도하는 현재의 하향식 기후 체제에서 벗어나 소비자가 참여하는 상향식 기후 체제로 전환이 시급하다. 하지만 녹색 에너지 전환의 비용을 소비자들에게 분담시키는 데 따른 정치적 부담과 사회적 저항을 각국 정부들이 예외 없이 우려하는 것이 현실이다. 유류세 인상에 항의한 2018년의 프랑스 노란 조끼 시위, 가스 가격 인상에 항의한 2022년 카자흐스탄 시위 등이 아직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기후 위기가 날로 심각해지면서 기후 재난을 자신의 생존 문제로 인식하고 자신을 지구 시민으로 자각하는 신인류 세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다. 이들은 녹색 에너지와 무탄소 배출(Carbon Free) 제품 구매에 추가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소비자의 48%가 추가비용 지불 의사를 갖고 있다고 응답했다.   문제는 이들의 이런 참여 의사를 행동으로 실천할 기회를 제공하는 시스템이 없다는 점이다. 모든 소비자에게 일률적으로 녹색 에너지 전환 비용을 분담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고려할 수 있는 방안은 추가 비용 지불 의사를 가진 소비자들부터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환경을 생각해서 추가 비용 지불 의사를 가진 것은 개인 소비자들만이 아니다. 국내외 기업들도 자발적으로 ‘RE100 운동’에 속속 참여하고 있다. 기업이 필요한 전력을 2050년까지 전량 재생에너지 전력으로 구매 또는 자가생산해 조달하겠다는 RE100 운동은 비영리 단체 클라이밋그룹(Climate Group)이 2014년 출범시켰다.   자발적 참여 시스템의 핵심은 화석 에너지와 녹색 에너지의 가격 차별화다. 기후 위기를 걱정하는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더 비싼 ‘녹색 전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전기 가격을 더 비싼 녹색 가격과 일반 가격으로 구분해 소비자들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 적자가 누적된 한국전력이 재생에너지를 비싸게 구매해 소비자들에게 싸게 판매하는 현행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나부터 자발적으로 녹색 에너지 전환 비용을 부담하는 ‘미 퍼스트(Me First) 운동’과 함께, 국가의 자발적 기여(NDC)를 뒷받침할 ‘개인의 자발적 기여(PDC)’ 인식의 확산이 필요하다.   11월 대선에 출마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대선 공약 1호’로 파리 기후 협정 탈퇴를 천명한 상황이다. 국제사회에 영향력이 큰 미국이 반환경적 정책으로 회귀한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정치인들에게만 기후 위기 대응을 맡길 수 없다. 정부와 기업을 비판하고 책임을 추궁하는 환경 운동만으로는 탄소 중립을 구현하기 어렵다.   소비자인 나부터 녹색 에너지 전환의 비용을 부담하는 사회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이런 운동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할 때 비로소 탄소 중립의 목표 실현이 가능할 것이다. 전 세계 어디에도 나부터 녹색 에너지 전환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사회 운동은 아직 없다. 한국이 나부터 자발적으로 책임을 분담하는 새로운 기후 운동을 선도해 ‘기후 한류’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내권 초대 기후변화 대사

    2024.03.13 00:35

  • [중앙시평] 낯선 민주당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제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 결과에 따라서 여야 모두 감당해야 할 정치적 부담이 만만치 않은 만큼 정치권의 관심은 온통 ‘누가 이길까’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선거를 바라보는 국민 입장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다음 국회에서는 정치가 좀 나아질까 하는 것이다. 21대 국회는 극단적 대결의 정치로 역할도 못하면서 국민을 피곤하고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각 당의 공천을 보면 다음 국회라고 해서 딱히 나아질 것 같지 않다. 현역 중심의 공천을 한 국민의힘도 문제지만 더불어민주당 쪽이 더 걱정스럽다. 한 친명계 의원의 표현대로, ‘당의 주인이 누군가를 확인하는 경선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재명의 당’으로 민주당이 바뀐 것이다. 국회를 좌지우지해 온 거대 공당(公黨)을 두고 사조직처럼 주인 운운하는 것부터 틀려먹은 것이지만, 민주당의 문제는 단지 그 주인을 위한 정당으로 바꾸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  「 공천 논란 거치며 사조직처럼 변모 ‘86 운동권’ 자리엔 ‘97 운동권’ 진입 이전의 민주당보다 훨씬 왼쪽으로 영국 노동당 좌편향 오류 경계해야 」    요즘 민주당을 보면서 갖게 되는 느낌은 ‘낯설다’는 것이다. 과거 민주당은 김대중의 관용과 통합, 노무현의 개혁이라는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 김대중의 민주당이 이낙연 당으로 옮겨가고 노무현의 민주당은 쫓겨난 탓인지 모르지만, 지금의 모습은 그동안 우리가 알아온 민주당이 아닌 것 같다. 당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이재명의 민주당은 과연 어떤 색깔일까.   민주당의 공천 과정에서 눈에 띄는 건 운동권의 세대교체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위원장이 민주당을 겨냥해 선거 구호로 내세운 것이 운동권 청산이었는데, 언뜻 보면 친문 배제와 함께 이재명 대표가 나서 그 일을 해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실상은 한총련 출신 인사들의 발탁과 함께 ‘86 운동권’ 대신 ‘97 운동권’이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점입가경이다. 이들의 정치권 진입이 걱정스러운 것은 이들이 86세대보다 더 이념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군부 통치의 폭압이 있었던 80년대와 달리 90년대는 국내적으로는 민주화, 국제적으로는 탈냉전의 시대였다. 우리나라는 1987년 민주화되었고, 1990년대에는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대안 체제로서의 공산주의가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났다. 이렇게 변화된 국내외 정치 환경에서도 좌파 이념을 추종하고 친북 노선을 따른다는 건 이들이 이념적 근본주의자이거나 외골수의 이념 지향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의 진입으로 이재명의 민주당은 이전의 민주당에 비해 훨씬 왼쪽으로 나아갔다. 더욱이 이재명의 민주당은 과거 통합진보당의 후신인 진보당, 그리고 연합정치시민회의와 같은 강경 좌파 세력을 우당(友黨)으로 삼아 선거연대를 구축했고 이들이 국회로 나아갈 수 있는 뒷문을 열어 주었다. 이러한 이념적 좌편향과 함께, 김대중 대통령이 그렇게 강조했던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으로서 민주당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아직 비례대표 후보가 발표되지 않았지만, 이런 추세라면 지역구 유권자에게 어필하기 어려운 강성 이념을 가진 인물을 비례대표로 밀실 공천할 수도 있다. 이들까지 포함된다면 민주당의 이념 편향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의 이런 모습은 예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을 준다. 어떤 정당이 근소한 표 차이로 패배해서 권력을 잃었다. 그 패배는 경제 혼란과 사회 갈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집권당에 대한 심판이었다. 야당이 된 후 당은 강경 노선으로 치우쳤고, 선거를 앞두고 당내 갈등으로 일부 세력이 탈당했다. 탈당한 이들은 다른 정치세력과 힘을 합쳐 선거 연대를 구성했다. 민주당 이야기 같지만, 이 정당은 영국 노동당이다.   1979년 ‘불만의 겨울’을 겪고 난 후 야당이던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당수가 노동당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표결 결과 311 대 310이라는 단 한 표 차이로 불신임이 가결되었다. 그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노동당은 권력을 잃었다. 그 뒤 강경 좌파인 마이클 푸트가 당수로 선출되었다. 노동당은 급속히 좌 편향되었고 당내 갈등도 격화되었다. 결국 로이 젠킨스 등 온건파 당 중진들이 탈당했고 이들은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과 연대를 맺었다. 그 뒤 치러진 1983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대패했다. 이전보다 10% 정도 득표율이 떨어졌고 1945년 이후 가장 적은 의석을 얻었다. 노동당이 권력을 되찾은 건 그로부터 14년 후 ‘새로운 노동당’을 주창한 토니 블레어가 중도로 당 노선을 바꾸고 나서였다.   좌편향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해도 어쨌든 이건 오래전 영국에서의 일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최근 변화가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는 결국 우리 유권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 다만 그동안 우리 사회를 갈라놓은 정파에 따른 정서적 양극화에 더해 이념적 격화까지 더해진다면, 다음 국회는 역대 최악이라는 21대보다 더 나쁜 모습을 보일 것 같다. 과연 우리 정치의 밑바닥은 어디까지일까.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4.03.12 00:38

  • [중앙시평] 융합을 통한 창조적 발현과 미래 교육

    양형진 고려대 명예교수·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위원 자동차가 달리면 속도계의 바늘이 움직이면서 속도가 표시된다. 속도가 쉬지 않고 변하므로 바늘도 따라서 흔들린다. 어느 순간에 바늘이 100을 가리켰다면 시속 100㎞다. 그 속도를 계속 유지하면 1시간에 100㎞를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다는 전제가 속도가 계속 변하는 상황과 양립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은 속도에 미분 개념이 들어있음을 이해해야 풀린다. 미분(微分, differentiation)은 미세(微細)한 차이(difference) 둘을 서로 나눈(分) 것이다. 속력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동한 거리를 그 시간으로 나눈 것이다. 100만분의 1시간 동안 1만분의 1㎞를 갔다면, 1만분의 1㎞를 100만분의 1시간으로 나누면 된다. 8/2가 4/1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나누기는 분모를 1로 만들므로, 어떤 시간으로 나눠도 계산 후에 분모는 언제나 1시간이 된다. 100만분의 1시간을 달려도 1시간 동안 100㎞를 갔다는 계산이 나온다.     ■  「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융합과 창발은 더욱 중요해져       자기주도적 탐구와 도전 위해 과도한 교육 부하는 줄여 줘야 」    이는 미분이 변화율이란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1년 동안 성장하면서 생긴 경제의 변화량이라면, 시속은 1시간 동안 이동하면서 생긴 위치의 변화량이다. 미분의 정의만으로 이를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차원이 다른 수량이 함께 개입할 때 미분이 변화율이라는 사실이 훨씬 쉽게 파악된다. 이는 수학과 물리 교육이 상호 보완적임을 보여준다. 이런 상호 보완성은 수학과 물리학의 깊은 연관성 때문에 나타나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게 아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일반상대론, 방사선물리학과 의학, 지구과학과 진화생물학 같은 인상적인 사례뿐 아니라 양자화학, 생화학, 양자계산, 양자정보, 양자암호 등에서 보듯이 서로 다른 학문 분야 사이의 상호 의존과 연관의 관계는 상당히 보편적이다.   이질적인 존재가 서로 의존과 연관의 체계를 이루는 상황은 자연 세계에서도 그렇다. 물 분자는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하나로 이뤄지는데, 그 속성은 수소나 산소 원자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어디에서 왔는가? 요소 원자가 화학적으로 결합하면서 창조적으로 발현한 것이다. 창발(emergence)이다. 물질세계뿐 아니라 문명에서도 그렇다. 그리스의 과학과 알렉산드리아의 정밀과학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서구 사회는 르네상스를 거쳐 과학혁명으로 이어지는 도약의 시기를 경험했다. 그리스와 알렉산드리아가 전해준 지적 충격을 받아들이고 확산시키면서 창조적 발현의 과정을 거쳐 서구 문명은 중세에서 근대로 전진할 수 있었다.   자연 세계나 문명의 역사는 이질적인 요소가 융합하면서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학혁명과 같은 거대한 진보가 아니더라도, 서로 다른 요소가 결합하면서 진보를 이뤄낸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진보의 누적적 결과 속에서 살고 있다. 주시해야 할 점은 창조적 발현의 진보가 앞으로는 더욱 크고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인류는 융합의 요소가 될 지적 자산을 그 어느 때보다도 풍부하게 쌓아 놓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로 다른 지적 요소를 융합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는 문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정보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융합을 통한 창조적 발현이 일상화되면서 진보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교육의 문제가 발생한다. 지식 체계가 변하고 내용이 풍부해지는 변화에 대응하려면 이를 교육내용에 포함해야 한다. 단순히 기존의 교육내용에 첨가한다면, OECD 보고서가 지적하는 것처럼 교육 과부하(overload)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와 관련해 속도계를 제작한다고 생각해보자. 이 글의 도입부를 읽으면서 1만분의 1㎞인 10㎝는 너무 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미분의 정의로 보면 아주 큰 수지만, 아주 짧은 거리를 재려면 측정 오차가 지나치게 커지므로 현실적으로는 적당한 길이를 써야 한다. 그러면 그게 미분인가? 엄밀하게는 아니다. 미분이 나누기여서, 분모와 분자가 같이 변하면 계산 결과가 같아진다는 점을 활용했을 뿐이다. 속도계를 이해하려면 미분이 필요하지만, 처음 만드는 단계에서는 미분을 몰라도 된다는 것이다. 수학과 공학을 융합시키기 위해선 복잡한 공식을 외우고 어려운 문제를 많이 풀어보는 것보다는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속도계가 비교적 간단한 문제여서 그런 게 아니다. 양자암호를 하기 위해 물리학 과목을 모두 들어야 하는 게 아니다. 양자 측정에 관한 기본적인 구조만 명확하게 파악하면 된다. 물론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건 그리 많지 않다. 융합의 창발을 기대한다면, 기본에 충실하되 학습량을 줄여 교육 과부하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자기 주도적으로 탐구하고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해야 한다. 너무 많은 것을 배우는 것보다는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개척하는 열정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이 중요하다.   양형진 고려대 명예교수·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위원

    2024.03.08 00:38

  • [중앙시평] 의료 개혁, 결기만으론 어림없다

    이현상 논설실장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1981년 미국 항공관제사 파업 사태가 소환되고 있다. 관제사들의 파업에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대규모 해고를 포함한 강력 대응으로 노조를 패배시킨 사건이다. 정부가 의사들의 진료 거부에 대해 법과 원칙으로 엄정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1981년 관제사 파업은 노동운동사에서 의미가 크다. 1970년대 서구를 휩쓸었던 노동운동이 퇴조하고 그 자리에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들이닥침을 알린 상징적 사건이었다. 임금인상과 근무시간 단축을 놓고 정부와 줄다리기하던 항공관제사연합 노조는 협상이 결렬되자 8월 3일 아침 7시를 기해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휴가철로 공항이 한창 붐빌 때였다. 그날 당장 미국 전역에서 7000대의 비행기가 뜨지 못했다. 노조는 “우리가 없으면 하늘길이 마비될 것”이라며 자신했다. 그러나 레이건의 조치는 단호했다. “48시간 내로 업무에 복귀하라. 불복 땐 해고다. 재고용은 없다”고 못 박았다. 설마 했으나 진짜였다. 미복귀자들에게 가차 없이 해고통지서가 날아갔다. 노조원 1만4000여 명 중 1만1400여 명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12년 뒤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일부가 재고용되긴 했지만 해고 인원의 6%에 지나지 않았다. 노조의 완벽한 패배였다.     ■  「 레이건 승리한 1981년 관제사 파업 그 뒤에는 원칙·여론·계획의 삼박자 의사는 여론 외면, 정부는 거칠기만 길어지면 정부·의사 모두 지는 싸움 」    이 사건에서 ‘엄정한 법과 원칙’만 읽는 것은 단편적이다. 두 가지를 더 봐야 한다. 하나는 여론, 또 하나는 준비다. 레이건의 강경 조치가 가능했던 것은 시민들의 호응 때문이었다. 당시 갤럽조사 응답자의 70% 가까이가 관제사들의 파업은 잘못이라고 봤다. 정부의 강경책을 지지한 비율이 60%나 됐다. 2년 전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 거대노조의 횡포에 염증을 낸 유권자들이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에 표를 던졌던 상황과 일맥상통한다. 레이건은 이런 여론을 믿고 그 난리통에 캘리포니아에서 느긋하게 휴가까지 즐겼다.   레이건이 여론만 믿었던 건 아니다. 시민 불편이 장기화하면 여론의 화살은 거꾸로 돌아올 수 있다. 레이건은 파업이 시작되자마자 전직 관제사 및 관제 감독관 3000여 명, 파업 불참자 2000여 명, 군 관제사 900여 명을 전국 공항과 주요 관제센터에 배치했다. 파업 전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시민들이 불편을 견딜 정도는 만들었다. 몇 달 후에는 20년간 200억 달러를 들여 첨단 관제 시스템을 새로 만들겠다는 계획까지 발표했다. 치밀한 사전 준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대처가 1984년 영국병의 상징이었던 탄광노조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요인도 결기가 다는 아니었다. 대처는 석탄 비축을 지시하며 발전소에 쌓아 놓도록 했다. 수송 철로가 막히는 사태까지 대비한 것이다. 긴급 석탄 수입 계획은 물론이고, 석유발전 확대 계획도 짰다. 시대의 물줄기를 바꿀 요량이라면 굳건한 의지, 우호적 여론, 치밀한 계획의 삼박자를 갖춰야 한다.   의대 정원 확대를 다루는 정부가 이런 삼박자를 갖췄나. 의지와 여론은 모르겠지만, 치밀한 계획은 ‘글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5년간 매년 2000명을 늘려 놓겠다고 발표했지만, 5년 뒤에는 어떻게 할 것이라는 시간표가 없다. 지역의와 필수의에 대한 보상 강화, 지역 공공의료 확충 계획 같은 명세표도 없다. 갑자기 늘어난 의대생들 교육은 어떡할 건가. 대통령은 “2000명이 최소”라는 말만 던진 채 요지부동이다. 여론만 믿는 듯하다. 사태 장기화에 대비한 어떤 플랜이 있는지 궁금하다. 일단 총선은 넘기고 보자는 전략인가.   의정갈등이 아직은 ‘공공선 대 사익’의 성격으로 비치는 듯하다. 정부에 유리한 여론조사 결과가 방증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의사들의 책임이 크다. 의사들이 든 손팻말에 “일방적인 정책추진 국민건강 위협한다”는 문구가 보인다. 10년 뒤쯤 위협받을 국민건강은 걱정되고, 지금 당장 아픈 환자들은 걱정되지 않는가. 공익을 표방한 사익 추구에 속을 국민은 없다. 의사들은 자기들끼리 가까워질수록 여론과는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설사 이번 갈등에서 의사가 정부의 양보를 받아낼 수 있다 해도 여론은 이를 ‘정부의 패배’라기보다 ‘국민의 패배’로 느낄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앞으로 국가 정책의 초점은 ‘반개혁 기득권 세력’ 의사집단의 힘을 약화하는 데 맞춰질 것은 뻔하다. 벌써 비대면 진료 확대, 의료행위의 의사 독점 완화 등에 대한 요구가 높다. 지지율에도 도움이 되는데, 이런 정책 추진을 마다할 정권은 없다. 이는 앞으로 의사 직역에 의대 정원 수호보다 더 큰 도전이 될 것이다.   돌아가는 판세가 의정 일방의 승리는 어려울 것 같다. 자신의 유리한 점만 보면 싸움을 멈출 수 없다. 약점을 직시해야 타협할 수 있다. 정부는 여론의 지지가 철회될 가능성은 없는지, 장기전이 진짜 가능한지 돌아봐야 한다. 의사는 여론을 적으로 돌리는 이 싸움이 장기적으로 자신들에 유리할지 고민해야 한다. 정부든, 의사든 과유불급이다.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 이현상 논설실장 leehs@joongang.co.kr

    2024.03.07 00:38

  • [중앙시평] 밸류업 프로그램과 주가 상승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지난 주 주식시장은 금융당국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발표에 따른 기대와 실망으로 출렁거렸다. 일명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불리는 우리나라 주식의 저평가 문제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그 원인으로 후진적 기업지배구조와 낮은 주주환원율을 지목하고 있으나, 이외에도 다양한 원인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만큼 몇 개의 정책으로 일시에 해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 주가의 장기적 우상향 위해서는 지배구조 개선, 상속세 현실화 등 여러 정책·요인 복합적 작용해야 정부 부처 전방위 협력해야 가능 」    일각에서는 이번 당국의 발표를 두고 기업들의 자율에 맡긴 연성 규범으로, 세제 혜택이나 상장폐지 경고와 같은 강력한 한방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원조 격인 일본의 밸류업 프로그램 역시 외견상 도쿄증권거래소가 주도한 만큼 대부분의 내용이 기업의 자율적 참여를 독려한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으며, 다만 2026년까지 PBR 1배 미달성 시 상장폐지를 고려할 수 있다는 경고 정도에 차이가 있다.    한가지 생각할 점은 최근 일본의 주가 상승이 단지 작년 3월 실시한 ‘자본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조치’라는 밸류업 프로그램에 기인했는지에 대한 논란이다. 일본은 2014년부터 아베노믹스의 일환으로 기업지배구조 개선책을 통해 이사회 중심의 경영, 지배구조의 투명성, 연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등 지난 10년간 꾸준히 실질적 밸류업 프로그램을 작동해 왔다. 즉, 빌드업을 통해 중원을 넘어 상대 문전까지 다다른 후 마지막 슈팅이 작년 발표된 밸류업 프로그램이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빌드업 과정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 진영에서 상대 골문에 바로 롱슛을 쏜 형국이기 때문에 골을 바라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오히려 이번 밸류업 프로그램은 지배구조개선 및 주주환원에 대한 기업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빌드업 과정의 일환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은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2010년 12월부터 니케이225지수에 연동하는 ETF를 직접 매수하는 질적 완화를 수행해왔다. 현재 중앙은행이 보유한 ETF는 약 30조엔 정도로 일본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의 5%에 해당하는 금액이며, ETF 시장에서 일본은행의 점유율은 2016년 이후에는 꾸준히 50%를 웃돌았다. 중앙은행이 전통적 통화정책에서 벗어나 화폐발행을 통해 주식을 매입하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일본의 주가가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시점은 ETF 매입이 본격화된 2012년 말부터로, 일본 밸류업 프로그램이 발표된 작년 3월까지 무려 3.4배가 올랐다. 동 기간 동안 미국을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주가 상승을 보인 것이다. 즉 지배구조개선과 중앙은행의 주식매입을 통해 히말라야 산맥을 쌓은 후 작년 밸류업 프로그램을 통해 에베레스트라는 봉우리를 얹은 격이다.   또한 최근 일본주가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한 시점인 2020년 10월 말은 공교롭게도 엔화가 달러 대비 본격적인 약세를 보이기 시작할 때다. 지난 30년간 디플레이션으로 악전고투한 만큼 인플레이션 유발은 일본 경제에서 핵심적 과제였다. 엔화가 본격적으로 약세를 보인다는 것은 결국 디플레이션 탈출 신호가 타전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곡점으로 인식되었고, 여기에 작년부터 중국에서 이탈한 해외자본이 주로 일본과 인도로 유입되면서 일본의 주가 상승에 탄력이 붙었다. 따라서 최근의 일본주가 상승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밸류업 프로그램은 그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번 밸류업 프로그램은 그런 면에서 첫술을 뜬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궁극적으로 정부가 지향해야 할 주식시장의 과제는 주가가 장기적으로 우상향하는 추세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면 장기투자가 활성화되고 부동산으로 쏠리는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유입되어 자본비용을 낮추고 주가가 다시 상승하는 선순환이 장착된다. 그러나 이는 지난한 과제로 전 세계에서 오직 미국만이 유일하게 달성했다. 선진국이라는 영국, 독일, 프랑스 포함 유로존 전체 주가 차트를 한번 보라. 2000년 대비 주가가 얼마나 상승했는지.   주가를 우상향시키기 위해서는 지배구조 개선이나 주주환원율 제고와 함께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 및 증여세의 현실화, 불공정거래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부당이득 환수, 중복상장과 벤처 생태계의 왜곡으로 인해 날로 증가하는 상장주식 수의 증가세 완화, 기관투자자 비중 확대, 운용수수료 대비 훨씬 높은 판매수수료의 시정, 연기금과 우정사업본부 등 준정부기관의 위탁 및 중개수수료 현실화 등 많은 정책이 필요하며, 여기에 부동산 불패 신화가 깨져야 가능하다. 이는 금융당국뿐 아니라 기재부, 공정위, 중기부, 법무부 및 감사원 등을 총망라해 부처를 초월한 전방위적 협력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당 부분이 국회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과제들이지만 그렇더라도 정부가 이러한 빌드업에 관한 방향성이라도 제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24.03.05 01:00

  • [중앙시평] 9월 학기제로 ‘교육 갈라파고스’ 벗어나야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3월은 신학기의 달이다. 학생 본인이나 자식 혹은 친척들이 3월에 입학식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학년 학기를 시작한다. 왜 3월일까? 우리나라에서는 근대교육이 시작된 이래 대부분 봄에 새 학기를 시작해 왔기 때문에 ‘3월 학기제’에 익숙하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보면 ‘3월 학기제’는 소수에 속한다. 오히려 ‘9월 학기제’를 채택한 나라가 많다. 예를 들어 우리와 교류가 빈번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을 보면 일본, 호주, 뉴질랜드, 칠레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9월에 새 학기를 시작한다.     ■  「 세계 대부분 국가 9월에 새 학기 3월 학기제는 국제 표준 어긋나 글로벌시대 학생교류 등에 불편 6년간 학기 한달씩 당기면 해결 」    이 같은 학기제의 차이는 점차 글로벌화하는 환경에서 국제교류를 하는 데 여러 가지 불편함을 준다. 우선 외국으로 유학을 갈 때나 외국에서 한국으로 유학 올 때 6개월의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해외주재원으로 수년간 파견 나간 부모를 따라갔던 학생들은 심지어 1년을 뒤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불편은 외국 학생들이 한국으로 유학 오는 것을 꺼리게 하는 한 요인이다. 얼마 전 정부는 학령인구 감소에 대비하기 위해 해외 유학생을 지금보다 두 배 가까운 30만명 유치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했는데, 학제의 차이가 이 목표 달성에도 심각한 장애 요인이 될 것이다.   이러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3월 학기제를 유지하고 있는가? 아마도 첫 번째 이유는 관성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부터 봄 학기제를 채택하는 바람에 거의 100년 동안 봄 학기제를 운용했다. 정부의 자격시험이나 기업의 채용시험 등도 모두 이에 맞추어 시행되어 왔다. 이처럼 오랫동안 시행되어왔던 제도를 바꾸는 데에는 심리적, 제도적 저항감이 있기 마련이다. 둘째는 봄 학기제에서 가을 학기제로 전환하는 데에는 큰 비용이 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물론 한꺼번에 학기를 6개월 바꾸면 교실이 2배 있어야 하는 등 큰 비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매년 1개월씩 학사일정을 줄여 6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학기 시작 시기를 바꾸면 큰 비용이 필요하지 않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특히 요즘은 학령인구가 줄고 있어서 이처럼 점진적으로 시행하면 시설비용은 거의 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학교의 입학 시기를 6개월 앞당기면 국가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는 학생들이 학업을 마치고 경제활동에 들어가는 시기가 세계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하여 늦는 편이다. 남성들은 군 복무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만일 봄 학기제를 가을 학기제로 바꾸고 초등학교 입학 시기를 6개월 앞당겨 5.5세에 입학하게 되면, 청년들의 경제활동 편입 시기가 그만큼 빨라져서 국가 경제적인 면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어린아이들이 의무교육에 조기 편입되면서 육아 휴직 부모들의 직장 복귀가 빨라지고 미취학 연령기의 사교육비 절감 효과도 기대된다. 이와 더불어 여름 방학 기간이 늘어나면 학생들의 대외활동이 활발해질 것이고, 학교는 새 학년 시작 전에 충분한 학사운영 준비 기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9월 학기제’로의 전환은 그동안 여러 차례 논의됐다. 가장 최근의 논의는 코로나 사태로 학교들이 ‘3월 개학’을 못하고 있었던 2020년 봄이다. 기왕 개학이 지연되고 있으니 이를 계기로 아예 학기를 반년 미루어 9월에 개학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당시 김기식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장 등이 제안하고,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과 일부 시도지사 등 유력인사들이 동조하면서 이슈화되었으나, 문재인 대통령이 “9월 학기제를 코로나바이러스와 관련해 논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언급하면서 결국은 없던 일이 되었다.   물론 학기제 개편 같은 중대한 문제를 코로나 사태로 인한 개학 연기와 같은 일시적인 문제를 계기로 급하게 처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일찍이 1997년과 2006년에도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회에서 9월 학기제로의 전환을 권고한 바 있다. 이처럼 ‘9월 학기제’로의 전환은 그동안 꾸준하게 논의되어 왔고 이에 따라 일반 국민의 인식도 많이 변화한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온라인 여론조사에 의하면 9월 학기제에 대한 선호도가 2004년 조사에서는 22.6%였지만, 2006년 조사에서는 48.8%로 증가하였다. 즉 국제적 통용성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지속해서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경제적 사회적으로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진국이 주도하는 소위 ‘국제 표준(글로벌 스탠더드)’에 발맞춘 덕이 크다. 그러나 ‘3월 학기제’는 이러한 국제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교육에서 소위 ‘갈라파고스 증후군’에 빠질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사실 봄 학기제의 원조인 일본에서조차 도쿄대를 중심으로 가을 학기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큰 비용 부담 없이 교육의 국제화를 촉진할 수 있는 ‘9월 학기제’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2024.03.01 00:41

  • [중앙시평] 삶의 마감도 기본권, 조력존엄사 공론화하자

    윤영호 서울대 기획부총장·의대 교수 얼마 전 93세 동갑의 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 부부가 동반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불법이다. 국민은 궁금해한다. “왜 우리는 안되는가?” 2022년 6월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이 조력존엄사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말기 환자로서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환자들의 경우에는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 담당 의사의 조력을 받아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  「 네덜란드 전 총리 부부는 안락사 한국, 법 발의에도 논의 지지부진 말기 환자 자발적 선택 존중해야 사회적 타살 막을 예방 장치 필요 」    이는 의사의 적극적 행위에 의해 삶을 중단하는 ‘안락사’와는 다르다. 안락사는 말기 환자에게 의사가 직접 치명적인 약물을 주입함으로써 환자의 생명을 단축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반면 조력존엄사(의사조력자살)는 의사가 환자에게 치명적인 약 또는 수단을 제공하여 환자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을 도와주는 행위를 말한다.    이 법안은 국회에 상정된 채 낮잠을 자고 있다. 천주교, 대한의사협회, 보건복지부는 사회적 합의가 되지 않았고 생명 경시가 우려되며, 호스피스 인프라 확충이 선행해야 한다는 이유로 입법에 반대했다. 필자 역시 처음엔 조력존엄사에 반대했다. 취약 계층 말기 환자에 대한 사회적 안전장치와 호스피스 인프라 확충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미 실효성을 잃었다.   2021년 서울대 의대와 2022년 한국리서치 등의 여론조사를 보면 조력존엄사에 대해 국민 10명 중 대략 8명이 찬성했다. 국민뿐 아니라, 국회의원, 의사도 찬성한다. 지난해 7월 KBS와 서울신문의 공동 조사에서 국회의원 300명 중 100명이 참여한 조사결과 87%가 찬성했다. 지난해 두 번의 의사 대상 조사에서도 의사 절반 혹은 약 80%가 찬성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반대 입장을 보였지만, 천주교 신자도 70% 이상 찬성한다. 판 아흐트 총리도 가톨릭 신자였다.   2022년 10월 필자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존엄사 관련 ‘입법 부작위(不作爲)’에 대한 위헌 의견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하라는 정책 제안을 했다. 현재 헌재에는 존엄사를 위한 법제화를 하지 않은 ‘입법 부작위’에 대한 헌법소원이 접수돼 심판 회부 결정이 나왔다. 인권위는 서둘러 존엄사에 대한 의견을 헌재에 제출할 책임이 있다. 에콰도르 헌재는 “안락사 처벌은 위헌”이라고 판결함으로써 루게릭병 환자의 손을 들어줬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콜롬비아 등 여러 국가에서도 위헌 결정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헌재 결정 결과가 주목되는 이유다.   물론 입법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입법을 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피해는 더 심각하다. 대책을 마련하지 못해 질병으로 인한 간병 살인과 극단적 선택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한 언론사의 취재에 따르면, 현재 한국인 300여 명이 스위스 의사조력자살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최소 한국인 10명이 의사조력자살을 선택했다. 항공료를 포함해 대략 1500만원이 든다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마저 꿈같은 이야기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마저 경제적 차이로 인한 불공정이 벌어지고 있다. 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임종을 지킬 수 없게 다른 나라에서 세상을 떠나야 할까.   조력존엄사 입법화는 다가올 미래다. 국가는 다가올 미래를 감당하기 어려운 쓰나미처럼 맞이할 게 아니라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적절한 대책을 마련할 책임이 있다. 엄격한 심사와 구제 제도를 통해 의학적, 사회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취약 계층의 사회적 타살을 예방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종교계나 의료계가 우려하는 극단 선택이나 간병 살인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유명 배우 알랭 드롱이 스위스에서 의사조력자살을 하기로 결정하고, 누벨바그 영화의 거장 장뤼크 고다르 감독이 의사조력자살로 타계하자, 프랑스의 공론화 기구인 시민의회는 정부에 안락사의 합법화를 권고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임종 선택 모델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말기 환자가 의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극심한 고통이 지속할 경우, 자발적이고 합리적이며 진정성 있는 조력 존엄사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 줘야 한다. 이는 종교·정치·양심의 자유를 허용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삶의 가치와 존엄함을 가진 국민의 마지막 권리로서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력존엄사 입법화는 국가가 국민의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명시한 헌법 제10조에 근거하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장은 입법화를 위한 사회적 공론화를 서둘러주시기 바란다. 죽음을 향한 존재인 인간이 존엄한 진정한 이유는 생명만이 아닌 삶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단지 자리 비움의 끝이 아니다. 삶의 완성으로서의 정신적 유산을 남길 수 있는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웰다잉 정책을 보완한 입법이 되어야 한다.   윤영호 서울대 기획부총장·의대 교수

    2024.02.29 0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