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식의 똑똑 클래식] 작자 미상 시에서 영감 얻어 탄생한 ‘사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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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가 40세 전후였던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는 1725년경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출판된 지 4년 뒤 파리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프랑스의 황제 루이 14세는 1730년 11월 25일 귀족들이 참석한 궁정연주회에서 ‘봄’을 즉석에서 연주하라고 명한 적이 있었다고 하나 아쉽게도 이 기록만 남아있을 뿐 연주에 관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음악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들어야 본래의 감동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비발디의 사계와 같이 내용을 지닌 시에 영감을 얻어 작곡한 음악의 경우 최소한의 지식조차 없이 듣는다면 그 감동은 반감될 것이다. 이 음악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무작위로 들려주고 계절을 맞혀보라고 한다면 답을 맞힐 확률은 아마도 4분의 1이 될 것이다.

사계는 멜로디가 아름다워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외에도 중요한 몇 가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는 바로크 시대의 고유한 음악 형식인 ‘콘체르토 그로소’에서 탈피해 고전주의 시대에 그 정형을 확립하는 ‘독주 협주곡’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은 여러 개의 독주 악기가 참여하는 ‘콘체르토 그로소(대협주곡)’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반해 ‘사계’는 바이올린만을 독주악기로 사용하고 있어 이른바 독주악기를 위한 콘체르토의 장을 열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당시에 일반적이지 않았고 고전주의를 지나 낭만주의 시대에야 비로소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표제음악적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인데 사계는 협주곡으로서는 최초로 표제음악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겠다. 사계의 네 협주곡에는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각 악장의 악보 위에는 ‘소네트(시의 한 형식으로서 14행 시)’가 제시돼 있는데 이 네 협주곡은 작자 미상의 소네트를 기초로 이탈리아의 사계절에서 느낄 수 있는 인상이나 자연의 변화를 대단히 시각적, 묘사적으로 그리고 있다. 비발디가 계절의 변화가 불분명한 북유럽이나 러시아 출신이었다면 그의 명곡 ‘사계’는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봄과 가을에는 꽃과 낙엽으로, 여름에는 수영장으로,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영업하는 국내의 한 리조트의 이름이 ‘비발디’임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비발디라는 이름을 쓰는 것에 그의 자손들과 일종의 사용계약을 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비발디’라는 이름에 사용하려면 일 년에 한두 번쯤은 비발디의 음악을 연주하는 축제를 펼쳐야 하지 않을까. 이탈리아와 기후환경이 비슷한 반도국가인 한반도에서 뚜렷한 사계절의 변화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인물이 탄생하지 않았음이 못내 아쉽다.

김근식 고전음악감상실 더클래식 대표 (http://cafe.daum.net/theClas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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