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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갈등 극복한 레바논 민주화 운동 '중동 평화'실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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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최근 레바논에는 백향목이 그려진 국기의 물결이 넘치고, 곳곳에서 국가가 수시로 연주되고 있다. 늘 보고 들어온 것이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와 느낌이 각별하다. 18개의 종교가 공존하는 다종교 사회인 레바논의 단합과 희망을 강렬하게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7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독립과 자유를 외치는 국민의 자주적인 민주화 운동, '백향목 혁명'이 진행 중이다.

레바논은 경기도 정도의 면적에 인구 400만의 작은 나라지만, 동서의 길목에 위치해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구가해 왔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사후 세계로 타고 갈 배를 만들기 위해, 또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은 성전을 짓기 위해 레바논의 백향목을 구하고자 했다. 개방적인 기질에 상술이 뛰어났던 조상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융성한 교역을 자랑했고 영어 알파벳의 모태가 된 페니키아 문자를 발명했다.

그러나 레바논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늘 국제정치의 희생이 되어 왔다. 근세에 들어와서만도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 프랑스의 신탁 통치를 거쳐 1943년 어렵게 독립했으나 완전한 의미의 국가 주권과 존엄을 지키기 어려웠다. 수차례의 중동 전쟁과 15년에 걸친 내전, 이스라엘의 침공과 시리아의 영향까지 레바논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레바논 인구가 400만인데 비해, 조국을 떠나 해외에 나간 레바논인이 1600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은 이 험난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2월 14일 발생한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에 대한 무자비한 폭탄 테러는 레바논인의 가슴속에 내재해 있던 자유와 국가 존엄에 대한 열망을 분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백향목이 그려진 국기는 레바논인의 단합을 상징하면서 레바논 전역에 물결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열망은 결국 레바논 정부의 사퇴와 아울러 지난 29년간 레바논에 주둔해 온 시리아 군의 철수 결정을 이끌어 내기에 이르렀다.

이제 레바논의 '백향목 혁명'은 중동 지역에서 과연 국민 스스로에 의한 민주화가 가능할 것인가 하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레바논의 '백향목 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제 막 시작한 상태이며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와 도전도 많다. 레바논의 대통령은 기독교 마로나이트,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에서 선출되며 각료와 국회의원은 기독교와 이슬람계에서 동수가 되어야 하는 등 정치체계도 복잡하다.

그러나 종교.문명 간 갈등과 충돌이 최대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작금의 국제정세를 감안할 때, 레바논의 '백향목 혁명'은 종교.지역.정치세력 간 이해 관계가 복잡한 사회가 어떻게 충돌을 피하면서 조화와 합의를 이뤄 나가느냐 하는 역사적 실험이기도 하다. 민주화 과정을 먼저 경험했으며 복잡한 주변 국제관계에서 국가 존엄과 번영을 이룩한 한국과 한국민이 새롭게 거듭나고자 하는 레바논에 보내는 뜨거운 성원은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김영선 레바논 주재 한국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