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시간탐험 (37) - 투수들이 갖는 중압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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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들에게 있어서 승부는 반드시 타자하고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흔히 말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상대 타자들과의 대결보다도 몇 배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특히 경험이 부족한 젊은 투수들에게 있어서 주위의 기대나 관심, 혹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부담감 등은 엄청난 무게로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중압감은 심지어 선수생명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생긴다.

1952년 5월 13일, 마이너리그 클래스 D (오늘날 루키리그) 애팔래치안 리그의 브리스톨 트윈스와 웰치 마이너스와의 경기에서는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통틀어 미국 프로야구 역사상 전대미문의 기록이 탄생하게 된다.

그 기록의 주인공인 바로 브리스톨 트윈스의 선발투수인 론 네카이(Ron Necciai). "넥타이(neckti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이 19세의 소년은 이 경기에서 웰치의 타자들을 상대로 단 한 타자도 내보내지 않고 퍼펙트게임을 거두게 된다.

여기까지만 얘기를 한다면 마이너리그에서 퍼펙트게임은 가끔씩 나오지 않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단지 타자를 출루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타자들을 모두 삼진으로 잡았다면? 네카이는 타석에 나온 웰치의 27명의 타자들을 모두 삼진으로 잡아냄으로써 미국 야구역사에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수립하게 되었다.

네카이는 무시무시한 강속구와 변화무쌍한 커브를 가진 투수였다. 그의 직구의 위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연습경기를 할 때면 종종 팀 동료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구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나칠 정도로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는 언제나 완벽한 투구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그런 완벽한 피칭의 굴레에 얽매였는지 19세의 나이에 벌써 악성 위궤양이 걸릴 정도였다.

그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냐하면 경기 도중 타임을 불러 배트보이에게 우유를 마운드로 가져오게 시켜서 그것을 들이키고는 다시 경기에 임해야 할 정도였다.

하위리그에서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등판하는 매경기마다 20개 이상의 삼진 행진을 계속하자 언론과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에 비례하여 그가 느끼는 부담감은 더욱 증폭되는 것이었다.

하루는 등판 경기에서 삼진을 불과(?) 14개 밖에 잡지 못하자 그는 팬들을 실망시켰다는 자책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말할 수 없는 위장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칭은 당장 빅리그에 올려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당시 피츠버그 파이러츠의 단장이자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된 브랜츠 리키는 네카이를 보고는 1930-40년대 최고 투수였던 디지 딘에 비견될 선수가 될 것이라고 치켜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피츠버그 파이러츠는 시즌 후반기에 네카이를 바로 클래스 D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불러 올리게 된다. 빅리그에서 "로케트 론(Rocket Ron)"으로 불리면서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네카이였지만 빅리그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의 위장은 계속해서 꼬이는 듯이 느껴졌다.

첫 등판에서 7실점을 허용하며 패전투수가 된 네카이는 결국 빅리그 데뷔 해에 1승 6패라는 기대에 못 미치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이듬해인 1953년 군대에 징집된 네카이였지만 그의 위궤양은 호전될 줄 몰랐다. 음식물이라고는 전혀 삼킬 수가 없었고, 체중은 무려 15kg나 빠졌다. 결국 네카이는 어쩔 수 없이 의가사제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제대를 하자마자 피츠버그의 팜에 돌아온 네카이였지만 더 이상 예전의 불 같은 피칭의 그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찾아온 어깨부상은 더 이상의 선수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는 은퇴를 한 뒤 사냥 및 낚시 도구를 파는 세일즈맨이 되었다. 재밌는 것은 그가 선수생활을 그만두자 마자 그를 그토록 지겹게 괴롭히던 위궤양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는 것.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난 재목이었으나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결국 아깝게 빛을 못 보고 사라져버린 론 네카이. 그가 만약 오늘날 우리의 김병현이 보여주는 느긋함과 두둑한 배짱을 가졌다면 메이저리그의 역사는 아마도 크게 달라졌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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