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 지원 법원서 제동

중앙일보

입력

20일 대우 회사채에 대한 서울지법의 판결은 부실기업 처리의 원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있다.

대우뿐 아니라 현대 계열사 등 부실 대기업을 원칙대로 정리할 경우 금융시장 및 국가경제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 금융당국의 지시나 채권단 자율 결의 형식으로 지원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부실 기업 지원에 대한 책임을 해당 금융기관이 질 수 있게 됨에 따라 앞으로 투신권은 물론 은행 등 금융기관들이 몸을 사릴 전망이다.

정반대의 판결이 나온 적도 있어 법원의 최종 판단을 지켜봐야겠지만 부실 기업 지원을 해당 금융기관의 책임 아래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질 경우 파장은 클 것으로 보인다.

◇ 투자자 보호는 금융기관 책임=1999년 7월 대우그룹이 붕괴 위기를 겪을 때 채권단은 금융당국의 종용으로 4조원을 더 지원하기로 했다. 대우가 당장 부도를 내면 자신들까지 무너질 판이었으므로 금융기관들은 순순히 응했다.

투신권도 2조4천억원을 지원했다. 김우중(金宇中) 전 대우그룹 회장과 대우그룹은 6조원의 담보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 담보는 주식 등이 대부분이어서 훗날 원금까지 까먹었다. 고객들이 피해를 볼 상황에 이르자 정부와 채권금융기관들은 자체 부담으로 이 돈을 모두 물어줬다.

한국투신과 전기공사공제조합 사이의 다툼은 다른 펀드에 들어 있던 대우 채권을 사들인 것에서 출발한다.

멀쩡한 펀드에 왜 대우채를 집어넣었느냐는 것이다.

한국투신 관계자는 "대우는 신규 지원을 해 살리기로 했으므로 대우채는 부도 채권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정부 조치에 따라 만기가 닥친 대우채를 한도 여유가 있는 다른 펀드로 옮기면서 발생한 불가항력적인 일"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법원은 99년 7월에 이미 대우가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므로 고객 돈을 지켜야 하는 투신사는 대우채를 집어넣지 않아야 했다고 지적했다.

◇ 투신권, "부실 기업 지원 더 이상 못하겠다" =대우뿐 아니라 일부 현대 계열사, 워크아웃 기업 등에 대한 지원 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투신권의 참여 문제는 뜨거운 쟁점이었다. 고객 돈을 함부로 굴릴 수 없다는 것이 투신권의 일관된 주장이다.

이 때마다 은행권과 금융당국은 "지원하지 않으면 회사가 죽고, 그러면 한푼도 건질 수 없다" 며 투신권의 동참을 종용했고 이를 대부분 관철했다.

이번 판결은 되풀이되는 투신권과 다른 금융권 사이의 갈등에서 투신권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투신사들은 "소송에 휘말릴 수 있는 신규 지원은 더 이상 못하겠다" 고 목소리를 높인다. 투신권이 앞으로 부실 기업 지원을 거부할 명분을 만들어 준 셈이다.

◇ 은행권에도 파장=투신사가 부실 기업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은행권의 부담이 커진다. 기업들을 모두 부도낼 수 없는 상황에서 투신사 지원 몫을 은행이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투신권과 달리 부실 기업을 지원한 은행의 책임을 물으려 할 수도 있다.

시중 은행 관계자는 "투신사가 지원을 거부한다면 부도낼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투신사 고객은 더 큰 손해를 본다" 며 "고객 돈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살아날 가능성이 큰 기업에는 투신권도 돈을 보태야 한다" 고 말했다.

◇ 부실 기업 처리 지연 우려=금감위가 투신사의 대우 지원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도 고개를 들고 있다.

투신사들도 "금감위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우리만 손실을 물어내야 하느냐" 고 주장한다. 금감위는 그러나 전체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해 투신사가 요청한 환매 제한 조치를 승인한 것이며, 신규 자금 지원도 채권단이 결의한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앞으로 부실 기업 지원이 어려워지는 것도 문제다. 이번 판결을 내세워 투신사 등 금융기관들이 부실 기업 지원을 거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허귀식 기자 kslin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