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상하이 계엄령 선포 뒤 공산당 소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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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호 29면

1927년 12월 1일, 상하이에서 열린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결혼식. 야인(野人) 장제스는 이 결혼식으로 다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사진 김명호]

1926년 말부터 장제스는 국민당에 입당한 공산당원의 숙청[淸黨]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1927년 4월 1일,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지배하던 우한(武漢)의 국민정부는 악수(惡手)를 뒀다. 중앙정치위원회 결의라며 장제스에게 국민혁명군(북벌군) 총사령관 직 해임을 통보했다. 그날 밤 장제스는 한 줄짜리 일기를 남겼다. “단순한 개인의 진퇴라면 개의치 않겠다. 이건 당과 국가의 문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95>

후일, 맑은 정신에 며칠을 밤새워 들어도 뭐가 뭔지, 이해하기 힘들 국면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파리·베를린·모스크바 외유에서 돌아온 우한정부 주석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와 합작을 시도했다. 상하이에서 담판을 벌였다. “우한에 가지 마라. 공산당부터 쓸어버리자.” 왕징웨이는 쑨원의 후계자다웠다. 정중히 거절했다. “나는 쑨원 선생의 유지를 받들겠다. 노동자와 농민 편에 서겠다.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은 나의 적”이라는 말을 남기고 우한으로 떠났다.

장제스는 상하이의 국민당 중앙집행위원과 감찰위원, 군 관계 인사, 비밀결사 두령들을 분주히 접촉했다. 다들 동조하자 4월 9일, 상하이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다음날 일기에 “공산당의 반역과 무자비함이 극에 달했다. 언제야 이들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적었다. 공산당과의 지루한 싸움을 예견한 듯한 내용이었다. 쑹메이링에겐 연락할 틈도 없었다.

우한으로 돌아와 정부 주석에 복직한 왕징웨이도 착잡한 심정을 일기에 남겼다. “공산당은 정책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공산당은 국민당을 이용할 뿐이다. 계속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동안만이라도 합작이 순조롭기를 희망한다. 내 책임이 막중하다.”

4월 12일, 상하이를 시발로 장제스의 무자비한 공산당 숙청이 시작됐다. 난징에 정부를 차린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우한정부와 결별했다. 북방의 장쭤린(張作霖·장작림)과 함께 천하삼분은 시간문제였다. 쑹메이링의 약혼자 류지원을 난징시장에 임명했다.

한숨을 돌린 장제스는 쑹메이링을 찾아갔다. “예전의 내가 아니다. 손에 너무 많은 사람의 피를 묻혔다”며 다시 청혼했다. 싱글벙글하며 큰언니 쑹아이링이 나타났다. “예비 신혼여행이라도 다녀와라. 남자 콧김 쐴 나이가 너무 지났다.” 장제스는 메이링의 눈치만 봤다. 그날 밤 류지원에게 절교 편지를 보낸 쑹메이링은 창장(長江) 한가운데 있는 초산(焦山)에서 장제스와 10일간 부부연습을 했다.

장제스는 협상에도 능했다. 우한정부의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펑위샹(馮玉祥·풍옥상)과의 제휴에 성공했다. 고립된 왕징웨이도 반공으로 선회, 공산당 숙청에 나섰다.

공산당이 지하로 잠복하자 국민당 좌파가 난리를 떨었다. “당의 군대다. 군이 당을 지배하고, 정부가 당을 도둑질했다.” 쑹메이링의 둘째 언니 쑹칭링이 좌파의 지도자였다. “쑨원의 국공합작을 파열시킨 장본인”이라며 장제스 매도에 열을 올렸다.

장제스는 물러설 줄을 알았다. 8월 13일, 역사에 남을 하야 성명서를 발표했다. “군인들 중 대다수가 당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당을 존중하지 않다 보니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이미 당에서 임명한 총사령관의 자격을 상실한 사람이다. 더 이상 무력의 괴뢰가 되기 싫다.”

당일로 귀향한 장제스는 마을 뒷산 설두사(雪竇寺)에 칩거하며 결혼 준비를 서둘렀다. 조강지처에게 이혼장을 받아내고, 상하이에 있던 부인이나 다름없는 여인은 미국 유학을 보냈다. 남은 건 장차 장모가 될 니꾸이전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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