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노트] '작가회의' 기왕에 북한에 갔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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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온다. 우산으로 가렸지만 온몸이 젖어 꾸끕하다. 예전 같으면 소나기가 온다는 것이 즐거운 놀이였다.

책보를 내던지고 고랑을 이루어 흐르는 물을 막고 호박잎을 따서 대궁으로 파이프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보는 재미도 있었고 온몸이 젖으면 옷을 벗으면 그만이었다.

문득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한 8.15공동행사에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대표단을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토론을 벌이던 순간을 떠올린다. 선정한 대표단 세 명과의 전화도 생각난다.

"정 선생님, 갔다 오시면 큰 시 하나 얻으실 것입니다. "

"김 선생님 백두산에도 큰 광주가 있을 것입니다. 백두산 천지가 놀라도록 멋지게 낭송하고 오십시오"

"도 선생, 거기도 좋은 학생들 있을 거야, 많이 사랑해주고 오라고"

이번 축전에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선정한 정희성.김준태.도종환 시인과의 마지막 전화 내용이다. 사실 대표단을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작가들만의 행사가 아닌 여러 행사에 묻어서 남북시낭송회를 갖는다는 것을 맘에 들지 않아 했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미 시행과정에서 실패를 경험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남북작가회담을 제의하고 아직 유효하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번 6.15 1주년에 맞추어 진행된 금강산 민족공동행사에 필자와 김형수 시인이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대표로 참여하면서 북쪽 작가동맹 부위원장인 김보행 대표에게 한 제의와, 이번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의한 백두산남북공동시낭송회가 채택된 것이라는 사실에 모두들 동의하고 이에 맞추어 정희성 시인은 작가회의의 대표자격으로 나머지 두 시인은 시낭송 요원으로 선정한 것이다.

그러나 방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동행사를 '3대헌장기념탑' 앞에서 열기를 고집하는 북측에 남측에서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소문제가 해결돼 가까스로 떠났지만 그 기념탑 앞에서의 개막식 참여 문제로 여전히 잡음이 들리고 있다.

시낭송회만이라도 남북 문인들의 약속대로 백두산에서 조촐하고 순수하게 치러졌으면 한다.

답답한 일이다. 반 백년 이상의 분단이 하루 아침에 극복되랴만 이런 때일수록 내리는 비를 짜증스러워하지말고 어린 시절처럼 그냥 젖어볼 수는 없는 것인지.

그리고 남북 모두가 이번 행사를 물웅덩이에 박혀 물을 뿜는 호박잎 파이프쯤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인지. 분단현실의 극복이란 남북 공히 서로 순수하게 몸을 나눈다는 각오가 되어있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일 아니던가.

강형철 (시인.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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