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속박에서 벗어나 ‘지식인’으로 다시 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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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손석춘의 소설 《아름다운 집》(들녘)은 40여 년 전 최인훈이 《광장》(문학과지성사)에서 보여준 문제제기에 대한 뒤늦은 답변이라고 볼 수 있다. 《광장》의 이명준이 남쪽의 ‘밀실’과 북쪽의 ‘광장’ 모두에 반대해 제3국행이라는 비극적 전망을 택했다면, 《아름다운 집》의 이진선은 자신이 선택한 사회주의의 훼절에 절망해 자살하는, 역시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이 두 소설은 20세기 한국 지식인들의 회색지대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20세기 한국 지식인들의 비극적 전망

그렇다면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21세기 한반도에서 비판적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명준이나 이진선 등 지난 세대에게 이 함의가 남쪽이든 북쪽이든 체제와의 불화를 숙명으로 여기는 비판적 정신을 뜻한다면, ‘지금 여기’ 세대에게 이는 끝없이 자본과 국가와 생존과 본능에 의해 침해당하는 정신의 한 요소를 뜻한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김동춘 교수의 《독립된 지성은 존재하는가》(삼인)는 그 제목에서 짐작하듯 21세기 현재 이 ‘비판적 지성’이 얼마나 나약한 토대를 지녔는가 보여준다.

김교수가 ‘책머리에’에 쓴 바와 같이 1980년대에는 ‘대학생 사회에서 1970년대 식의 지식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후퇴하고, 이제 민중주의, 노동 계급 중심주의가 대학생들 사이에 득세하던 터라’ 지식인이라는 화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던 게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지식인론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역사가 후퇴한 것인가? 이 책은 이런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김교수는 자신도 경험했던 1980년대 학생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점검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김교수가 1980년대 학생운동에 주목하는 까닭은 그 중추세력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현실정치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됐기 때문이다.

들머리에 실린 글 〈정치를 지망하는 30대에게〉는 바로 이들에 대한 김교수의 전언이다. 이 글에서 김교수는 현실정치에 참여한 1980년대 학생운동가들이 ‘한 가닥 기대했던 민중들의 열망, 동료 운동가들의 열정, 사회 운동의 정당성 모두를 팔아 넘기게’ 됐다고 말하지만, 결국 이들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어 이 책은 1990년대라는 ‘괴물의 시대’를 전반적으로 탐색한다. 책에서도 “1990년대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엄혹했던 군사 독재 시절보다 한층 고통스럽고 슬픔에 가득 찬 것이었다”라는 한 운동가의 말을 인용했듯이 1990년대는 변화된 사회구조 앞에 개혁 세력들이 우왕좌왕한 시대였다.

이 책은 NGO, 경직화된 학생운동, 취업준비소가 된 대학, 모순을 드러내는 국가주의 등 1990년대의 특징적 상황들을 탐색한다. 이 탐색의 결과는 엄혹한 독재체제 하에서 각자에게 제기됐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문구는 똑같으나 그 내용은 전혀 다른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지금 필요하다는 결론을 유도한다.

‘괴물의 시대’에 다시 세우는 지식인의 삶

그에 따르면 자생적 이론이나 학문적 전통조차 갖추지 못한 한국 대학에 불어온 상업주의의 바람과 경쟁 논리, 제도적 민주주의도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강요되는 자본의 세계화, 신자유주의, 소비 문화, 체계적인 사상의 수립도 없이 사상의 시대는 가고 정보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떠들어대는 목소리 등이 지식사회 전반에 혼란을 야기한다. 이 책은 바로 이 혼란 때문에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명제가 새로운 빛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독립된 지성은 존재하는가》는 체계적인 이론서가 아니라 글쓴이가 여기저기 잡지에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따라서 낙선운동, 최장집 교수 사건, 신지식인 논쟁, 서울대 문제, 의약분업 등 1990년대 후반기 우리나라를 관통한 사회 문제들을 중심으로 지식인론을 전개했다. 일관성이 없다는 한계는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지식인에 대한 그의 믿음을 여러 글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진보, 생존의 논리에서 삶의 논리로〉는 ‘지금 여기’의 지식인과 노동자와 학생과 개혁세력의 문제가 무엇인지 밝혀주는 명쾌한 글이다. ‘생존할 때’ 지식인을 비롯한 이들 모두는 가족과 돈의 신화에 결박당하지만, ‘살아갈 때’ 그들은 이 속박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김연수/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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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춘 교수의 논문 등을 읽을 수 있는 홈페이지 '김동춘의 비판사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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