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남녀평등은 유언비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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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논설위원

오늘 내가 꺼내는 얘기는 남녀 모두에게 불편할지 모른다. 하지만 해야겠다. 민감하다는 이유로 외면한다면 허위의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요즘 남자들의 어깨가 처져 있다. 주요 공무원 시험에 여풍(女風)이 이어지는 가운데 숙명여대 ROTC가 올해 동·하계 군사훈련에서 남자들을 제치고 1등을 했다는 뉴스까지 나왔다. 남성들은 “대체 여자들이 못하는 게 뭐냐”고 푸념한다. 김성주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의 “나 영계 좋아하는데…” 발언을 두고 성(性) 권력의 이동을 말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성평등 수준이 세계 135개 국가 중 108위”라는 세계경제포럼(WEF)의 지난주 발표는 충격에 가까웠다. 우리가 성 차별 국가라고?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태홍 연구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WEF 통계는 잘못된 것 아닌가.

 “잘못된 게 아니다. WEF 통계는 남녀 간 격차를 위주로 본다. 예를 들어 어떤 후진국의 남녀 경제활동 참가율이 20%씩으로 비슷하다고 치자. 한국의 평균 경제 참가율이 높아도 남녀 격차가 크면 순위는 뒤처지는 것으로 나온다.”(2011년 남성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각각 73.1%, 49.7%였다.)

 -전체적인 수준은 빼고 격차만 보는 게 의미가 있나.

 “우리와 비슷한 수준에 있는 나라들 가운데 남녀 격차가 최하위권이란 뜻이다.”

 남성들이 말하는 ‘여성 상위 시대’는 착시 내지 엄살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미국의 비영리재단인 아시아소사이어티가 지난 4월 발표한 결과도 비슷했다. 한국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51%로 그 격차가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 기업 임원 중 여성 비율(1.9%)도 최저 수준이다. 공무원 사회와 법조계, 언론계 등에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진 건 다른 부문보다는 평등한 대우를 받을 것이란 기대 때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직장에 들어온 여성들은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대부분의 조직에서 여성은 남성 간부 밑에서 일한다. 간부들의 반응은 이렇다. “입사(임용) 성적은 뛰어나지만 업무 능력은 기대에 못 미친다.” “남자들의 실력이 중간쯤에 몰려 있다면 여자들은 편차가 크다.” 여기에서 ‘여성이여, 분발하라’는 결론을 뽑아낸다면 그 또한 실상을 왜곡하는 것이다. 좀 더 들어가 보자. 남녀가 함께 일하는 모습은 어떨까.

 “솔직히 업무 면에선 남자가 편합니다. 남자 직원들은 큰 소리로 야단을 쳐도 저녁에 술 한잔 하면 풀리거든요. 여자 직원들은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40대 남성 간부)

 “궂은 일도 시키면 해낼 각오가 돼 있는데 자꾸 여자니까 안 된다, 여자니까 야단도 함부로 못 치겠다는 건 난센스라고 봐요. 꼭 2차 가서 술을 마셔야 대화가 되는 건가요.”(30대 여성 회사원)

 소심한 간부들이 사용하는 카드가 이이제이(以夷制夷), 아니 이여제여(以女制女)다. 상사의 지적을 전하는 악역을 고참 여성 혹은 ‘왕언니’에게 맡기는 식이다. 그러나 보스(boss)의 육성이 직접 전달되지 않으면 잘못된 근무 자세는 고쳐지지 않는다. 잘나가던 ‘알파걸’이 생각 없는 ‘된장녀’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결혼하면 여건이 더 나빠진다. 열심히 일해도 아이가 잘 있는지 전화 한 통화를 하려면 눈치가 보인다. 일하는 엄마가 유리 천장을 뚫고 올라가려면 누군가 대신 희생해야 한다. 친정엄마든, 시어머니든, 아이든.

 세계 108위라는 한국의 성평등은 다시 위험한 변곡점에 서 있다. 한발 더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뒤틀린 구조에 막혀 후퇴할 것인가.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키우기 위해선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입이 계속돼야 한다. 그 전제조건은 여성들의 의지, 정당한 대우, 그리고 남녀의 시너지 효과를 높일 매뉴얼이다. 지금이라도 매뉴얼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고이 키운 우리 아이들이 차별 없이 역량을 발휘하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