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미주 이민 100주년] 2. 하와이 초기 이민의 애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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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의 관광지 하와이의 햇살은 유리처럼 맑다. 청명한 하늘에서 깨끗한 공기를 타고 뻗어 내려온 햇살은 하와이 주민들에게는 사철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자연의 축복이기도 하다.

그러나 1백년 전 하와이의 햇살은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사탕수수 농장으로 들어온 한인 노동자들의 고단한 등짝을 태우던 땡볕이었다.

하와이의 이민 2세인 김성실(金誠實.84) 할머니가 태어나 자란 곳은 와히아와 사탕수수 농장이었다.

"내가 세살이 되자마자 어머니는 나를 들쳐 업고 밭에 나가 담요 위에 내려놓은 뒤 사탕수수를 베었다고 해."

성실 할머니의 아버지 고(故)김흥수옹은 1904년 25세의 나이로 이민선에 몸을 실은 이민 1세대였다. 17세때 가난에 찌든 집을 뛰쳐나와 의주의 한약상을 전전하던 그는 항구의 담벼락에 붙어 있던 하와이 농장 구인광고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흥수씨의 '하와이안 드림'은 말 그대로 꿈일 뿐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와히아와 농장에 투입된 흥수씨의 생활은 오전 5시 동트기 전에 일어나 오후 5시까지 12시간 가까이 뙤약볕에서 일하는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채찍을 쥔 '루나'(십장)들은 말을 타고 농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한인 노동자들을 감시했다. 키를 훨씬 넘겨 자란 사탕수수 줄기에 눈동자를 긁혀 앞이 안보여도 루나들이 무서워 밭에 들어가야 했다.

"치료는 생각도 못했어. 한달에 한번 간호사가 농장에 와서 약을 발라주는 게 전부였다우."성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아버지 흥수씨의 고생스러운 생활이다. 이런 중노동으로 흥수씨가 받은 품삯은 하루 70센트 안팎에 불과했다.

고된 농장 생활은 많은 한인 노동자를 좌절하게 했다. 1958년 작고한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이민호옹이 생전 가족들에게 했던 회고다.

"1904년 마오이 농장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한인은 80명 있었지. 하지만 이중 절반은 4년을 못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갔어. 나는 20년을 일하면 연금을 준다기에 버텼는데, 1923년에 농장이 파산해 월급도 못 받고 빈손으로 쫓겨났단다."

흥수씨는 1913년 사진 한장을 태평양을 건너 보냈다. 이어 23세의 앳된 부산 처녀의 사진이 흥수씨에게 돌아왔다. 당시 흥수씨 같은 한인 노총각들을 위해 고안된 '사진 결혼'이었다. 성실 할머니의 어머니인 박영진씨는 집을 떠나 서울에서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던 '신여성'이었다.

중국을 오가는 무역상이던 친정 아버지가 "여자도 신문물을 배워야 한다"며 허락해준 덕분이었다. 영진씨는 "하와이로 시집오면 미국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흥수씨의 편지에 가슴 설레며 그해 친정 어머니의 만류를 무시하고 하와이로 떠났다.

그러나 호놀룰루 항구에 마중나온 신랑은 사진 속의 말쑥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자신보다 11세나 많은 무일푼의 농장 머슴에 불과했다. 항구의 여관에서 며칠밤을 펑펑 울며 지샜지만 파혼은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영진씨는 남편과 함께 사탕수수 밭으로 들어갔다. 처녀땐 물을 묻혀 본 적이 없었던 영진씨의 손은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졌다. 성실 할머니 역시 12세때부터 두살 아래의 여동생 귀실(貴實)씨와 인근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파인애플 박스를 1백개 만들면 1달러였어. 1박스에 파인애플이 10개 정도 들어갔으니까 1달러를 벌려면 파인애플을 1천개 깎아야 했지. 손가락은 늘 부르텄고 손톱 밑에는 피멍이 가시지 않았지."

흥수씨 가족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 후였다. 공습 이후 하와이는 군인들로 북적거렸고 각종 군용 공사가 발주됐다.

당시 농장을 나와 호놀룰루에서 세탁소 종업원으로 전전하던 흥수씨 부부에게도 일감이 늘어났다. 흥수씨는 도로건설 인부, 영진씨는 군속들의 식사 준비.청소일에 나서면서 조금씩 돈을 모으게 됐다.

성실 할머니는 41년 동갑내기 한인 2세 이근화씨와 결혼했다. 미군 군속이던 남편 덕분에 집안은 급속도로 안정돼 갔고, 끼니 걱정이 줄면서 성실 할머니는 개방대학(community college)에 다닐 수 있었다.

지금 성실 할머니의 가족은 하와이에서 5대째 뿌리를 내려 증손자까지 모두 16명이다.

성실 할머니가 손자인 브랜든 리(29.하와이 주립대 3년)에게 고생하던 시절을 이야기해주면 손자는 "그때 태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며 웃는다.

이민 1세인 흥수씨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꼬깃꼬깃한 편지를 대신 읽어주며 배움의 꿈을 달랬지만 그의 손자.손녀들인 켄워드.존.로버트.수잔은 모두 대학을 졸업해 대기업 연구원.중학교 교사 등으로 정착했다.

손톱이 닳을 정도로 파인애플을 다듬던 12세의 소녀는 한인 노동자를 감시하던 사탕수수 농장 관리인이 살던 들판의 하얀 집의 주인이 됐다. 와히아와 켈로가(街)의 이 집과 5㎞ 떨어진 스코필드 미군기지 사이에는 60여년 전 소녀의 아버지가 불볕더위 속에서 닦아놓은 포장도로가 나 있다.

성실 할머니는 이제 한국어를 거의 못한다. 이름도 남편의 성을 따른 '레이철 리'가 됐다. 할머니는 "부모님이 흘렸던 땀과 눈물은 나와 우리 자녀들에게 축복이 됐다"며 지난 80여년을 회고했다.

찌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신교육을 받겠다는 일념으로 이역만리 하와이행을 택했던 1백년 전 김흥수씨 부부의 꿈은 당대가 아닌 그들의 후손에 의해 현실로 바뀌고 있었다.

특별취재팀=신중돈.변선구.채병건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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