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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건 두 개의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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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전영기
논설위원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사건을 만나기도 하고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나쁜 사건이라고 나쁜 결과를 낳는 건 아닙니다. 예기치 못한 만남이 교착된 삶을 돌파하고, 짧은 만남에서 말 한마디가 좋은 운명으로 이끌곤 합니다.

 압달라 다르(64·아래 인물 사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주 서울을 방문했는데 『가장 위대한 도전-생명을 구하는 과학, 연구소에서 마을로(The grandest challenge: taking life-saving science from lab to village)』의 저자입니다. 다르 박사는 아랍인의 피가 흐르는 탄자니아 출신의 외과의사로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간다·영국에서 공부한 콩팥이식 수술의 권위자였는데 어느 날 지구 인구의 90%를 위협하는, 고대(古代) 질병들과 싸우는 전사로 삶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압달라 다르

 다르 박사의 인생전환은 49세 때 있었던 사건 때문입니다. 선진국 의과대학 교수로 야심만만한 삶을 영위하던 중 탄자니아 시골 늪지 마을로 시집갔던 누나가 말라리아 모기에 물려 나흘 만에 죽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동부 아프리카의 후진적인 의료환경에서 말라리아 사망자는 한 해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다르는 “누나가 런던이나 뉴욕 혹은 토론토에 살았다면 70대 후반이나 80대까지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세계 인구의 90%가 사는 빈국 중 하나인 탄자니아 같은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에 50대에 죽은 것이다”라는 성찰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콩팥수술 의사를 청산하고 세계보건기구(WHO)에 들어가 빈국의 질병퇴치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문제의식이 선명했기 때문일까요. 1990년대 말부터 개발이 본격화된 생명과학·유전공학을 고대의 질병과 싸우는 무기로 쓰자는,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돈이 안 되는 일 아닌가? 상업적인 생명과학 업계는 말할 것도 없고 WHO 같은 공중보건의료계조차 ‘모기한테 무슨 유전공학이냐’는 부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삶의 교착은 예기치 못한 만남에서 풀립니다. 2002년 네이처지(誌)에 정성스럽게 쓴 그의 논문을 보고 빌게이츠-멀린다 재단이 찾아옵니다.

 재단은 다르에게 5000억원이 투입되는 ‘생명과학혁명을 이용한 질병퇴치 사업’의 프로그램을 짜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다르의 꿈은 빌 게이츠 부부의 조건 없는 돈과 만나면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세계의 모기 세력은 급속히 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모기의 식욕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조작해 말라리아균에 대한 식욕을 감퇴시켜 보자’와 같은 기발한 상상력을 풍부한 연구자금을 사용해 현실화한 겁니다. 제가 다르 박사에게 빌 게이츠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는 “빌 게이츠는 엔지니어식으로 사고한다. 문제풀이 방식으로 재단의 목적을 이뤄 나간다. 스티브 잡스는 비즈니스에서 빌 게이츠와 경쟁관계였지만 인간의 선행이란 측면에서 게이츠만 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라고 말하더군요. <10월 17일 인터뷰>

 다르 박사에겐 또 하나의 위대한 만남이 있었다고 합니다. 청소년 시절 국비장학금을 건네주던 탄자니아 교육부 장관이 예언처럼 자신을 이끌어갔다고 합니다.

 다르는 고등학교 졸업 뒤 의과대학이 있는 우간다로 유학가게 됐는데 ‘장학금 받고 귀국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걱정했다고 합니다. 장관은 웃으면서 “걱정 마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봐라. 설사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너는 탄자니아를 위해 살아갈 것이다”라고 답했다는군요. 다르 교수는 이 말이 평생 마음의 나침반이 되었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의 나침반은 남쪽 나라 탄자니아를 향해 있었다고 합니다. 인재에 대한 투자는 이처럼 믿고 맡겨야 되는 것 아닐까요.

 수십 년 고국에 가지 못한 안타까움은 말라리아 퇴치 프로그램으로 최근 몇 년 동안 1년에 다섯 번도 넘게 탄자니아를 찾는 걸로 해소됐다고 합니다. 다르 박사가 서울에 온 건 선진국 한국이 세계의 빈국 마을에 이전할 생명과학기술, 혹은 일반과학기술이 어떤 게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또 다른 전환적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