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승부사 정봉수 감독의 파란만장한 삶

중앙일보

입력

"은퇴라니. 이제 다시 시작인데..."

방콕아시안게임 남자마라톤이 열렸던 지난 98년 12월20일. 이봉주가 방콕 타마삿대학 육상트랙에 1위로 들어오는 순간 정봉수 감독의 첫마디는 차가움이 느껴질 정도로 무뚝뚝했다.

당시 지도자로서의 남은 인생 목표인 세계최고기록이 저만큼 멀리 있는데 아직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골인 후 품으로 달려오는 이봉주에게 건넨 말도 "잘했어" 단 한 마디 뿐이었다.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96년 애틀랜타올림픽, 98년 로테르담대회, 그리고 방콕아시아드. 90년대 한국마라톤이 40년간의 암흑기에서 벗어나 세계정상으로 재도약한 데에는 이러한 정 감독 특유의 오기와 집념, 열정이 어려있다.

세계기록을 향한 끝없는 야망, 식이요법으로 대표되는 과학적 지도방식, 번득이는 레이스 전술,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않는 지옥훈련 등도 그를 설명하는 데 충분치 않다.

운명과도 같은 마라톤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87년 3월이었다.

코오롱 육상부 설립의 뜻을 밝힌 이동찬 회장이 "마라톤팀을 만들려고 하는데 정 감독이 필요하오. 올림픽 금메달 한번 따봅시다"라며 감독직을 제의했고 그해 5월1일 무교동 코오롱빌딩에서 김완기와 이창우가 창단 멤버가 돼 팀이 출범했다.

이 회장과 정 감독이 손을 잡고 만든 코오롱마라톤팀은 출발은 초라해 보였지만 `독사' 정 감독의 스파르타훈련 속에 세계 제패를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육군 육상팀에서 청춘을 보낸 그 자신은 태극마크 한번 달아보지 못한 단거리선수 출신이었지만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기까지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식이요법과 함께 혹독한 도로훈련을 꾸준히 병행한 끝에 90년 3월 정봉수사단의첫 실험무대였던 동아마라톤에서 김완기가 첫 도전인데도 불구하고 2시간11분34초의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우승,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그후 90년 3월 `삼고초려' 끝에 입단시킨 황영조가 92년 2월 벳푸마라톤에서 2시간8분47초로 준우승, 꿈에 그리던 마의 10분벽 돌파에 성공한 뒤 내친 김에 그해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며 56년만에 손기정의 한을 풀어냈다.

이때부터 황영조에게는 `몬주익의 영웅', 정 감독에겐 `한국마라톤의 대부'란 칭호가 따라붙었다.

정 감독은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최고기록을 목표로 `스퍼트'를 계속했다.

황영조가 96년 은퇴해버렸지만 대신 이봉주가 96년 애틀랜타에서 은메달을 따고 건국대에 다니던 차세대 철각 김이용이 입단함으로써 제2의 전성기를 활짝 열어젖혔다.

하지만 올림픽 2회 연속 메달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96년 가을, 정감독은 승부사로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50대들면서부터 앓던 당뇨가 합병증으로 악화, 중풍으로 쓰러진 것. 황영조가 자신의 뜻을 저버리고 끝내 은퇴한 데 따른 심리적 충격이 컸지만 정감독은 `독종'답게 병상에서 투혼을 불살랐고 그 결과 이봉주는 98년 4월 당시 경이적이었던 2시간7분44초의 한국기록으로 4년전 보스턴에서 황영조가 세운 종전 기록(2시간8분9초)을 깨트렸다.

그러나 "세계최고기록을 세우리라"던 정 감독의 꿈은 뜻밖에 집안에서 터진 싸움 탓에 사실상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99년10월 코치 인선을 둘러싼 내부 잡음 끝에 이봉주와 권은주 등 선수전원이코치들과 보따리를 싸고 떠났기 때문. 한국마라톤을 한때 수렁으로 몰아넣은 `코오롱사태'를 계기로 정 감독의 건강은더욱 악화됐고 그는 병마의 고통보다 더한 인생의 덧없음을 곱씹으면서도 재기를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 사이 수제자 이봉주는 삼성에서 둥지를 마련해 보스턴마라톤을 제패했고 지난해 입단한 정 감독의 `유작(遺作)' 지영준은 국내대회 장거리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제2의 황영조로 자리매김했다.

정 감독은 영광과 좌절이 함께한 한국 현대사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지만그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으로 한국마라톤에 남아있다. (서울=연합뉴스) 김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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