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지원 끊긴 찌아찌아족 한글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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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주(州) 바우바우시(市) 소라올리오 지역의 한 도로에 한글로 병기된 도로표지판. 찌아찌아족이 밀집한 이 지역에는 한글로 된 도로표지판 10여 개가 있다(사진 위). 아래는 세종학당에서 한글을 가르쳤던 정덕영씨가 2010년 찌아찌아족 학생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바우바우=연합뉴스]

인도네시아 바우바우시 ‘세종학당’에서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에게 한글을 가르쳐온 유일한 한국인 교사 정덕영(51)씨. 그는 지난 8월 초 학당 운영기관인 경북대에서 보낸 공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학당 및 관련 교사들은 31일자로 철수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생했던 비자 문제도 해결돼 지난 7월부터 최대 5년간은 마음껏 현지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씨는 지난달 3일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그는 “현지 제자가 800명 정도 되는데 아이들에겐 비자 문제로 잠깐 한국에 갔다 온다고 이야기했다”며 “학당 건물이 폐쇄됐다는 말을 듣곤 정말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한글을 표기 문자로 도입해 화제를 모은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족. 이들이 사는 바우바우시에 세워진 한국어 교육기관 ‘세종학당’이 설립 7개월 만에 철수했다.

주된 이유는 재정 문제다. 세종학당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어세계화재단이 세계 각지에 설립하는 한국어 교육기관이다. 그러나 운영기관인 경북대가 재정난을 호소하며 철수를 결정했다. 경북대 측은 “세종학당 운영예산은 문화부 지원금 3400만원과 경북대 예산 3600만원 등 총 7000만원뿐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강사 인건비와 교재비, 기자재비 등에 최소 1억원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최소 수업시수만을 겨우 채워 강의 했다고 한다. 세종학당 운영을 총괄한 경북대 이예식(영어교육과) 교수는 “7월에 직접 문화부를 찾아가 재정·행정적 지원을 요청 했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문화부 관계자는 “경북대가 재정사정을 이유로 철수해 다른 대학을 물색하고 있다”며 “정해지는 대로 다시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번 사태는 예견된 일이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008년 8월 훈민정음학회는 찌아찌아족과 한글 사용 관련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은 앞다퉈 각종 지원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엔 이 같은 약속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09년부터 세종학당 설립을 추진한 문화부는 관련 사업자 선정 작업부터 지지부진했다. 지난해 8월에야 경북대를 운영자로 선정했다. 재정문제 때문에 개소는 올해 초 이뤄졌다.

 초창기 적극 참여 의사를 밝혔던 서울시도 지금은 ‘뒷짐’을 진 상태다. 2009년 12월 서울시는 바우바우시와 교류 의향서를 체결하며 ‘바우바우시 서울문화센터’ 설립 협조 의사를 비췄다. 그러나 이 사업들은 예산상 어려움으로 검토 단계에서 사실상 중단됐다. 지난해 말엔 경북대 측이 서울시에 세종학당 관련 예산 지원을 호소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이승재 훈민정음학회 회장은 “찌아찌아족의 한글 공식문자 채택이 언론의 주목을 받자 각 기관들이 관심을 보였으나 실제로는 지원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대 이호영(언어학) 교수는 “정부기관 등에서 한글 보급 활동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인 편”이라며 “한글 보급 운동이 ‘문화제국주의’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크게 경계하 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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