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6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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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와 내 친구들에 얽힌 갖가지 기상천외한 일화들이 많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진해에서 훈련받을 적에 그의 탈영이 생각나서 웃곤 했다. 송영에게 왜 탈영했느냐고 물으면 그는 넌지시 웃고는 대답했다.

- 뒷간에 갔다가, 달이 하도 밝아서.

그건 이해할 만하다. 진해 기지는 바로 진해만을 끼고 있어서 연병장 앞이 바다였다. 그 팔월 무더위에 단독무장을 하고 제식훈련을 받노라면 작업복이 땀으로 젖었다가 바닷바람에 이내 말라서 소금이 허옇게 끼곤 했다. 밤중에 신고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큰일을 보러 가는데 바로 바닷물이 들어온 곳에 시멘트로 발 디딤판을 만들어 세운 곳이 변소였다. 주위에는 갈대밭이 있었고 물결이 찰랑대는 소리가 발밑에서 들려왔다.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느긋하게 일을 보노라면 밤바람이 궁둥이를 서늘하게 식혀 주었다. 달이 뜨면 물결 위에 반사된 빛이 부서지고 왼쪽으로 철조망 너머에는 모래사장도 보였다. 그런 때에 송영이 아마도 철조망을 넘어갔을 것이다.

전후반기 훈련 마치고 병과를 정하는 날에 간부 훈련병과 3열 종대의 줄에서 앞에 서는 훈련병들을 먼저 가려놓고 그중에서 '골병 3대'를 뽑았다. 그것은 헌병대, 의장대, 군악대를 뽑는 순서였다. 몇 명씩 세워 놓고 제식교련을 시키면서 한두 명씩 가려내어 접견을 했다. 헌병대 의장대야 중키 이상 되고 얼굴이 어글어글 사내답게 생겨 먹고 시키는 대로 머리만 좀 돌아가면 되겠지만, 군악대를 음악의 소질 여부에 관계없이 이들과 같은 조건으로 가려 뽑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어느 선임자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팔은 누구나 불 수 있다구. 해병대 빠따로 안 되는 일이 있느냐? 맞아 봐라, 콩나물 대가리 읽을 줄 모르는 놈도 근사하게 불어제친다. 그러니 그럴 듯한 연주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피눈물이 나겠는가. 의장대 역시 총 한번 잘못 떨어트리면 전 소대가 한숨도 못 자고 온밤을 들볶이고 당사자는 순서대로 선임자들에게 기수 빠따를 맞고 그러다 보면 그야말로 총 돌리는 기계로 변한다는 얘기였다. 거리를 순찰 중이거나 네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헌병의 복장과 몸가짐을 보고 군인답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뒤에 얼마나 눈물겨운 내무생활이 있는 줄은 아무도 모를 거다. 이를테면 아침마다 이루어지는 복장검사 때에 구두코에 얼굴이 비치지 않으면 밑창을 핥아야 한다. 허리에 지르는 탄띠의 금빛 버클도 놋그릇 닦는 광택 약을 사다가 날마다 광을 내어 볼록거울처럼 둥그렇게 제 얼굴이 비쳐야 한다. 바지 주름을 잡기 위해서 두꺼운 사지 바지의 안쪽에 밥풀을 발라 다리미로 다려서 줄이 풀어지지 않게 만든다. 이 모든 일을 고참들은 하지 않는다. 내가 위탁교육까지 마치고 거의 일년을 교육으로만 보낸 뒤에 본대로 가니까 당연히 제일 졸병이었다. 바로 아래 신병이 올라오기 전까지는 선임들의 복장은 모두 내 책임이었다. 나는 새벽 네 시가 되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때부터 선임자들의 구두와 탄띠 닦기, 군복 다림질이 시작되었는데 그들이 아침에 일어나 구두를 신으려다가 광택이 신통치 않으면 가까이 오라고 하여 그 자리에서 구두창을 핥게 하고는 '꼬라박아'를 시켰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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