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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탈러런스, 톨레랑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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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호 31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관용(寬容)’이란 말을 즐겨 썼다. 숨지기 두 달 전에도 자신의 홈페이지에 “민주주의의 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용”이라며 “이는 상대주의의 귀결이기도 하고, 상대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통합의 원리”라고 정의했다. 또 적극적 의미의 관용, 즉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다름을 상호 수용하여 이를 공동체의 가치와 이해관계로 통합할 줄 아는 사고와 행동’이 민주주의에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허남진의 세상탐사

참 좋은 말이다. 국어사전에선 관용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용납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관용은 행위 주체자, 즉 베푸는 쪽의 자발적 선의(善意)가 전제돼야 이뤄진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 기간 동안 ‘다름을 상호 수용’하기 위해 과연 어떤 관용을 베풀었는가. 상대에게 얼마만큼 너그럽게 대했고, 그래서 어떠한 통합을 이뤄냈던가. 편가름과 갈등의 확대 재생산으로 집권 기간 내내 소란했던 그때를 되돌아보면 그의 관용론에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노 전 대통령이 말한 관용을 한국적 정서가 담긴 사전적 의미에다 대입하면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미국식 ‘탈러런스(tolerance)’에 가까워 보인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탈러런스에 ‘자기로서는 찬성하기 어려우나 남의 권리로서 인정하기’라는 설명을 붙여놨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기본 바탕 위에서 한 발씩 양보해 적절한 타협을 이뤄내는 것이 탈러런스요, 이는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다. 노 전 대통령이 언급한 관용론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5년을 두고 ‘타협’ ‘통합’ 등의 단어를 들먹이자니 낯이 간지러워 진다.

탈러런스가 프랑스로 건너가면 ‘톨레랑스’가 된다. 스펠링이 똑같지만 내용은 크게 다르다.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이성적 관용이란 의미까지는 같다. 그러나 톨레랑스는 개인 사생활보다는 공공선(公共善)과 사회 정의에 초점을 맞추고 타협보다는 격렬한 논쟁, 갈등 조정보다는 연대 투쟁을 강조한다. 톨레랑스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현 사회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부당한 사회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정의로운 약자들이 연대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며, 특히 기득권 세력과 맞서라고 요구한다. 상대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윽박지르는 모양새이며, 공존의 논리가 아닌 혁명의 논리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권력자와 피지배자, 강자와 약자 등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편가름하는 건 이들의 고전적 수법이다.

노 전 대통령도 강남과 서울대, 보수 언론을 대표적 기득권 세력으로 규정하고 거칠게 공세를 펼쳤다. 심지어 그는 권력의 최정상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신을 약자나 피해자 편으로 분류하며 대립을 부추겼다. 자연히 이념적·계층적 갈등의 골도 깊어졌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말로는 타협과 통합을 추구하는 미국식 탈러런스를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식 비타협적 톨레랑스에 좀 더 근접했다고 보는 게 맞지 싶다.

12월 대선에 나설 후보 세 사람이 모두 대통합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사회적 갈등과 대결 양상의 심각성을 감안할 때 퍽이나 다행스럽다고 여기면서도 이들이 어느 정도 진정성을 갖고 통합을 말하는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그렇다. ‘노무현의 그림자’로 불리는 그에게선 노무현 정부의 편가르기 정책이 어른거린다. 그걸 불식시키려면 배전의 노력이 필요할 텐데 오히려 그는 민주당 후보 확정 뒤 첫 행사에서 ‘전직 대통령 선별 참배’라는 배척과 분열의 행보를 선보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문 후보는 박근혜 후보가 (5·16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자발적 행동으로서의 통합 행보가 아니라 상대에게 통합을 강요하고 전제조건을 다는 톨레랑스 방식이다. “양보와 배려로 대통합을 이루겠다”는 그의 공약 역시 상대의 양보와 배려를 전제로 한 것은 아닌지, 대통합이 국민 전체의 통합이 아닌 자기 진영 사람들만의 ‘부분 통합’을 말하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이번 대선의 주요 화두 중 하나는 통합이다. 세 후보가 선보일 통합 행보나 공약도 표심에 큰 영향을 미칠 게 틀림없다. 그런 만큼 중간지대에 선 무당파 유권자들의 시각은 날카롭고 예민하다. 통합 행보 못지않게 진정성이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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