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나는 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89호 38면

나는 시골에서 살다가 여섯 살 무렵 아버지가 계신 부산으로 왔다. 나는 촌놈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는 아버지가 과자 사먹으라고 돈을 주면 그걸 쓸 줄 몰라 퇴근한 아버지에게 인사할 때까지 호주머니에 그대로 갖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 어머니가 웃으시면서 추억하는 일 중 하나다. 그런 촌놈에게 부산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섭고 낯선 세계였다. 나는 동네 바깥으로 나가는 건 꿈도 꾸지 않았고 주로 종일 집 앞 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혼자 놀았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그러다 사귄 이웃집 또래 녀석이 하루는 시내에 있는 자기 아버지 회사에 갈 거라며 같이 가자고 꼬드겼다. 겁이 났지만 어찌나 또래 녀석이 씩씩하게 말하는지 나는 따라 나섰다. 역시 세계는 넓고 볼 것은 많았다. 잘 차려입은 멋쟁이들과 근사한 차, 높은 빌딩을 보느라 내 눈은 바빴다. 그러다 그만 동무를 잃었다. 한눈을 판 건 잠깐이었던 것 같은데 주위를 둘러보니 동무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길을 몰랐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세상이 무시무시해졌다.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촌놈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일밖에 없었다. 나는 바보처럼 서서 울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악착같이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어떤 여자가 다가와 내게 우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집 주소를 외우고 있었고, 그 여자의 친절 덕분에 간신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눈물겹다.

지금은 고인이 된 친구가 생전에 사무실로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친구는 미국에서 살면서 사업을 해 젊은 나이에 돈을 많이 벌었다. 너무 열심히 일한 탓일까 큰 병을 얻어 여러 번 쓰러졌고, 그때마다 꿋꿋하게 일어선 친구였다. 그 무렵은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었을 때였는데, 잠시 딸이랑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친구는 아침·저녁으로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일 말고는 딱히 하는 일 없이 친구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날은 내 차례였던 것이다.

한국에 와서 지내면서 동네 이웃들도 사귀고 새로 친구들도 사귀고 그랬느냐고 내가 묻자 친구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상득아,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 이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고 우정을 나누고 추억을 만들고 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아. 나는 그저 그동안 알았던 사람, 친구들을 한 명이라도 더 만나고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더 나누는 거, 그게 소원이란다.”

친구의 말을 듣자 나는 미국의 어느 고장에서 인디언 후손들이 만들어 팔고 있다는 목각 새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무로 만든 작은 새의 밑판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나는 새/ 뒤로 나는 새/ 어디로 가야 할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기보다는/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생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으니까요.”
물론 나는 과거보다 미래를 더 궁금해 한다. 옛 친구도 소중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더 많이 만나면서 산다. 그러나 추석이 오면 꽉 막힌 기나긴 막무가내의 행렬을 따라 나도 길 잃은 여섯 살 아이처럼, 뒤로 나는 새처럼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생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일 년에 한 번쯤은 확인하고 싶으니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