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위험은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지 않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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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만난 피터 슈라이어 기아차 총괄 디자인 부사장. 어려서 파일럿이 되길 꿈꿨고, 1983년부터 경비행기를 몰았다는 그의 그림에는 비행기나 조종사가 많이 등장한다. 그는 “경주 왕릉과 도자기의 곡선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배짱 없이는 영광도 없다(No guts, no glory)’

 가로 세로 1m짜리 캔버스에 그린 비행기 옆구리에 이렇게 적었다. 기아차 총괄 디자인 부사장 피터 슈라이어(Peter Schreyer·59)의 생애 첫 개인전에 나온 작품 60여 점 중 하나다.

19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오래된 전투기에서 발견한 문구”라며 “그 조종사에게도 이 말이 중요했겠지만 오늘의 내게도 중요하다”고 운을 뗐다. “일하는 데 가장 큰 위험은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것이다. 의사결정에서도 그렇고 매 순간 작업할 때도 위험을 무릅쓰면서 새로운 시도를 해야 남보다 앞서가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는 22일부터 11월 2일까지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 전을 연다. 드로잉·회화·설치 등 미술가로서의 모습을 대중에게 처음 보여주는 전시다. 슈라이어 부사장의 ‘감성 디자인’, 그 원천이 드러난다. “현대의 디자인이 미래 지향적이라 해도 그 모든 근원은 과거에 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일요일마다 당신의 작은 작업실로 나를 데려가 나무로 장난감 자동차, 비행기 등을 손수 만들어 주셨다”고 했다. 전시에는 1957년, 네 살 꼬마인 슈라이어에게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나무 장난감 동물원과 거기서 영감을 얻은 그의 드로잉들이 함께 출품됐다. 이밖에 그가 흠모하는 재즈 뮤지션 마일스 데이비스, 결혼식 날 아내가 입었던 웨딩 드레스, 딸이 두 살 때 타자기를 두들기며 나열한 글자 등을 모티브로 한 그림들이 나왔다.

 독일 출신의 슈라이어 부사장은 영국 왕립예술학교(RCA)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전공했다. 아우디 디자인 총괄 책임자(1994∼2002), 폴크스바겐 디자인 총괄 책임자(2002∼2006) 등을 역임하며 20여 년 간 자동차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에선 기아차 쏘울, K5·K7·K9·K3 등 K시리즈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슈라이어는 “자동차 디자인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요구하지만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면도 필요하다”며 “순수예술은 내가 열린 사고를 갖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훈련과도 같다”고 설명했다. 한국 미술가 중에선 서도호와 전광영을 좋아한다는 그는 2009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 초청돼 ‘레스트(Rest)’라는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정원의 원형을 간직한 담양 소쇄원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 레드닷의 피터 제크 회장은 “슈라이어는 미술과 디자인이라는 두 영역을 혼돈하지 않으며 그 둘을 섞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미술은 그에게 자신을 더 명확하고 확실하게 알아가도록 도움을 준다”고 평한 바 있다.

 전시 입장료 무료. 매주 월요일과 추석 당일 휴관. 02-519-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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