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도 언어로 인정해 주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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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청각장애특수학교 졸업생들이 수화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수화도 언어로 인정해 주세요”라는 뜻이다. 왼쪽부터 김민경·김지혜씨는 “수화”, 한정아·유진훈씨는 “언어”, 윤지선·임서희·박소정·김지섭씨는 “인정”이라는 뜻의 수화를 각각 표현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으.에.젠.트. 으.에.젠.트.”

 지난 1일 오전 서울 A 특수학교 고3 영어 시간. 청각장애 학생 9명이 영어 발음을 힘겹게 따라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프레젠트(present)”라고 외쳤지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학생들은 한글로 적힌 발음을 보며 어렵사리 흉내만 내고 있었다. 박준섭(18·가명)군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에게 수화로 “문법 공부를 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말을 하라”며 준섭이에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50분간 수업에서 선생님은 한 번도 수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유연 한국농아청년회장이 수화로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다. [뉴시스]

 오후 4시30분쯤 학교 수업을 마친 준섭이는 공부방으로 달려갔다. 청각장애 학생들을 위해 별도로 수화 교육을 하는 곳이다. 공부방 선생님이 수화로 ‘present’의 뜻을 설명했다. 그제야 준섭이는 수화로 “생일 때 받는 선물이네요”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방 김주희 교사는 “시각장애인 학생들은 점자로 수업하는 게 당연한데 청각장애 학생들은 수화 수업이 없어 대부분 학습 속도가 느리다. 고3 학생이 중학교 저학년 수준일 정도로 학습 수준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말했다.

 특수학교에 다니는 청각장애 학생들조차 수화로 수업을 듣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에 따르면 서울지역 특수학교 교사 156명 가운데 수화통역사 자격증이 있는 교사는 8명(약 5%)에 불과하다.

사범대학 특수교육과에서도 수화는 필수 과목이 아니다. 김현철 한국농아인협회 과장은 “한국의 청각장애인 특수 교육은 ‘말하고 듣는 능력이 저해된다’는 이유로 수화를 배제하고 발음 치료 중심으로 진행돼 왔다”고 설명했다.

 수화에 능통한 교사가 없다 보니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수화 통역을 맡기도 한다. 청각장애 특수학교를 졸업한 한정아(21)씨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입 모양을 보고 친구들에게 수화로 통역을 해준 적이 많다”고 했다.

 최근 청각장애 학생들은 대다수가 일반 학교를 택한다. 특수학교에서 수화로 수업을 받지 못할 바에 일반 학교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2012년 기준으로 전체 청각장애 학생 3334명 중 일반학교 재학생은 약 70%(2351명)에 달한다. 청각장애 딸을 일반 학교에 보낸 한 어머니는 “집중교육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특수학교를 보냈더니 선생님이 수화를 못해 수업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미국·핀란드·독일 등에선 청각장애 학교의 수업을 100% 수화로 진행한다. 미국 갈로댓대를 졸업한 청각장애인 안정선(37)씨는 “미국에선 일반인과 청각장애 학생의 교육은 수화로 수업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특수학교에서 수화 대신 구화(입 모양을 보며 의사소통을 하는 것)를 강조한다. 그래서 작은 소리라도 듣기 위해 인공 달팽이관 수술을 받는 청각장애 학생들도 많다.

남부대학교 권미지(언어치료청각학) 교수는 "수화도 중요하지만 사회생활을 위해선 구화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 4월 “3년 안에 모든 청각장애학교 교사들이 수화통역사 자격증을 따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자격증만으론 근본 대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재활복지대학 허일 교수는 “특수학교만이라도 의무적으로 수화로 수업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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