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중계무역 서류만 확인 이란 측 실물 오갔는지 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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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내 은행에 예치된 이란의 석유수출대금이 위장거래를 통해 1조900억원이나 해외로 빠져나간 정황이 밝혀지면서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이 돈이 있던 계좌는 한국과 이란의 교역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창구이기 때문이다.

 이 계좌가 만들어진 것은 2010년 10월이다. 미국은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이란과의 달러 결제를 전면적으로 막는 경제 제재를 시행했다. 한국도 미국의 요구를 외면하지 못하고 제재에 동참했다. 문제는 한국이 이란으로부터 해마다 80억 달러에 이르는 원유를 수입해야 하고, 거꾸로 한국 기업들도 상당한 물량을 수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러 결제가 안 되면 수입과 수출이 모두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난감해진 한국 정부는 이란의 석유수출 대금을 한국의 은행에 원화로 맡기고, 한국 기업이 수출한 돈을 이 계좌에서 받는 방안을 제안했다. 미국도 달러가 이란에 들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동의를 해줬다. 이렇게 해서 이란중앙은행(CBI) 명의의 계좌가 우리은행과 기업은행에 개설된 것이다.

 당초 정부는 국산 제품에 한해 이란 수출을 허용했다. 미국이 정해놓은 전략물자는 절대 수출할 수 없다. 기업들은 수출 품목이 금지품목 리스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지식경제부 산하 전략물자관리원과 한국은행의 확인을 받아야 수출이 가능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제3국에서 구매한 제품을 이란에 직접 파는 중계무역을 시도하는 업체가 생기기 시작했다.

 문제는 중계무역의 경우 실물 확인이 어렵다는 점이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은행은 서류만 확인하기 때문에 실물이 실제 움직였는지 확인할 수 없다”며 “상대국 은행과 해운회사가 짜고 배에 물건을 실었다는 선하증권을 위조할 경우 막을 길이 없다”고 말했다.

 A사도 이 같은 허점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일단 A사가 외국환관리법을 어긴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돈세탁을 시도한 것이라면 자금세탁방지법도 적용할 수 있다. 검찰은 특히 이란의 두 개 은행이 전신환(TT) 매입을 요청한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란은 이번 거래와 비슷한 위장거래를 해외 곳곳에서 시도해왔다. 이 때문에 미국은 위장거래를 찾아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적발되면 심각한 징계가 내려진다. 지난달 영국계 스탠더드차터드 은행은 이란과의 위장거래를 한 사실이 적발돼 뉴욕 지역 영업권이 박탈될 위기에 처했다가 3억4000만 달러의 벌금을 내는 것으로 합의를 보기도 했다.

 수사 결과에 따라 한국의 은행들도 곤란한 지경에 놓일 가능성이 있다. 미국 측에 이 거래를 고의로 돕거나 알고도 묵인한 게 아니라는 점을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수사 결과 은행 측이 위장거래라는 점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미국 측이 문제의 이 계좌를 문제 삼을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이란으로부터의 석유 수입이 막히고 한국 기업의 수출길도 막혀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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