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억 가져갈 테니, 죽음도 두렵지않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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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완서

대가의 자취는 길었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마지막 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마음산책)을 펴며 든 생각이다.

 지난해 나온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가 그의 융숭한 마음을 만끽할 마지막 산문집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컴퓨터에 남긴 글과 책상 서랍에 보관해 둔 원고 묶음에서 추려낸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생전 “늙은이를 너무 부려먹는다니까”라던 작가의 볼멘소리가 귀에 와 닿는 듯하지만, 그의 새 글과 만나는 즐거움은 남다르다.

 신간에 실린 글은 ‘인간 박완서’의 일생을 비추는 거울이다. 손에 닿을 듯 가깝지만 갈 수 없는 고향에서 보낸 행복한 유년기, 꽃다웠어야 할 20대를 화약 냄새로 바꿔버린 한국 전쟁의 기억, 40대 주부로 문단에 입성한 극적인 등단,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었던 고통의 순간까지. 작가뿐만 아니라 아내와 어머니·할머니로 1인 다역에 능숙했던 ‘큰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다.

 예로 작가가 되고 싶다며 질문을 보내 온 초등학생에게 보낸 답변은 ‘어린이’도 하나의 인격체로 예우하듯 자못 진지하다. 게다가 솔직하기도 해서 거칠 것 없는 대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다가도 동네 고양이가 마당에 있는 금붕어를 모두 잡아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분에 못 이겨 먹이통을 치우고 몽둥이를 들고 쫓아나가는 광경에서는 귀여운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요샛말로 뚜껑이 열린다는 게 아마 이런 느낌이 아닐까”라며 씩씩댔을 작가의 표정이 선하다.

 세상을 돌아보는 고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보다 저 세상에 더 많구나, 그런 생각이 나를 한없이 쓸쓸하게 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들 역시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줬다고 생각하면 인생은 아름답고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힘으로 이룩한 업적이나 소유는 저 세상에 가져갈 수 없지만 사랑의 기억만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아진다.”

 작가 박완서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사랑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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