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남동쪽 위미리 해안에는 꿈에 그린 듯한 집이 있다. 바다를 향해 커다란 창을 냈다. 지붕 위엔 푸른 잔디가 깔려 있고 밤이면 천창(天窓)으로 은하수가 쏟아진다.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2976번지의 이 집은 영화 ‘건축학개론’ 주인공 서연의 집이다. ‘건축학개론’은 멜로영화로는 이례적으로 개봉 두 달 만에 전국 관객 400만 명을 불러모았다.
영화에서 제주도 출신인 서연(한가인)은 건축가가 된 대학친구 승민(엄태웅) 앞에 15년 만에 나타난다. 그것도 ‘부티’ 나는 이혼녀가 되어서. 그리고는 다짜고짜 승민에게 제주도 고향집을 새로 지어달라고 의뢰한다. 그녀가 나고 자랐으나 어미를 여의고 오랫동안 버려둔 집. 이제 병들고 홀로 된 아비와 함께 새 삶을 시작할 집을 말이다.
집짓기는 순조롭지 않다. 집이란 원래 거기 사는 사람의 삶이 집약된 곳이다. 타인이 함께 집을 짓는다는 건, 끊임없이 서로를 이해해야 가능한 일이다. 하나 승민에게 서연은 못 견디게 아픈 첫사랑이었다. 속내 한번 시원스레 털어놓지 못했던. 그건 서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서연이 승민을 찾아간 건 어떤 약속 때문이다. 스무 살의 승민(이제훈)은 서연(수지)에게 약속을 했다. 언젠가 그녀를 위한 집을 짓겠노라고. 어쩌면 그건 이용주 감독 자신이 간직해온 약속이었는지도 모른다. 건축학과 출신인 그는 이미 10여 년 전 ‘건축학개론’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니까 서연의 집에 못다 한 마음을 담은 건 승민만이 아니었다. 이 감독에게도 그 집은 비로소 세상 밖에 꺼낸 첫사랑의 고백 같은 게 아니었을까.
지난 7월, 남원포구에서 쇠소깍으로 이어지는 올레 5코스를 걷다 서연의 집에 들렀다. 굳게 잠긴 집 앞뜰을 서성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수돗가 바닥을 들여다봤다. 영화에서 서연이 어릴 적 남긴 발자국이 앙증맞게 남아있었다. 이게 이 감독의 ‘집’이구나.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지난달 태풍으로 파손된 서연의 집은 오는 11월 다시 문을 연다. 영화제작사 명필름이 영화 속 모습에 가깝게 개축해 갤러리 카페를 운영할 예정이다. 제주도에 가면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야지. 어쩐지 누군가가 많이 생각날 것 같다.
나원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