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운 그곳] ‘건축학개론’ 서연의 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서연의 집에서는 제주 앞바다가 훤히 내다보인다. 위 사진은 영화에서 승민이 거실의 접이식 창을 여는 모습.

제주도 남동쪽 위미리 해안에는 꿈에 그린 듯한 집이 있다. 바다를 향해 커다란 창을 냈다. 지붕 위엔 푸른 잔디가 깔려 있고 밤이면 천창(天窓)으로 은하수가 쏟아진다.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2976번지의 이 집은 영화 ‘건축학개론’ 주인공 서연의 집이다. ‘건축학개론’은 멜로영화로는 이례적으로 개봉 두 달 만에 전국 관객 400만 명을 불러모았다.

영화에서 제주도 출신인 서연(한가인)은 건축가가 된 대학친구 승민(엄태웅) 앞에 15년 만에 나타난다. 그것도 ‘부티’ 나는 이혼녀가 되어서. 그리고는 다짜고짜 승민에게 제주도 고향집을 새로 지어달라고 의뢰한다. 그녀가 나고 자랐으나 어미를 여의고 오랫동안 버려둔 집. 이제 병들고 홀로 된 아비와 함께 새 삶을 시작할 집을 말이다.

집짓기는 순조롭지 않다. 집이란 원래 거기 사는 사람의 삶이 집약된 곳이다. 타인이 함께 집을 짓는다는 건, 끊임없이 서로를 이해해야 가능한 일이다. 하나 승민에게 서연은 못 견디게 아픈 첫사랑이었다. 속내 한번 시원스레 털어놓지 못했던. 그건 서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서연이 승민을 찾아간 건 어떤 약속 때문이다. 스무 살의 승민(이제훈)은 서연(수지)에게 약속을 했다. 언젠가 그녀를 위한 집을 짓겠노라고. 어쩌면 그건 이용주 감독 자신이 간직해온 약속이었는지도 모른다. 건축학과 출신인 그는 이미 10여 년 전 ‘건축학개론’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니까 서연의 집에 못다 한 마음을 담은 건 승민만이 아니었다. 이 감독에게도 그 집은 비로소 세상 밖에 꺼낸 첫사랑의 고백 같은 게 아니었을까.

지난 7월, 남원포구에서 쇠소깍으로 이어지는 올레 5코스를 걷다 서연의 집에 들렀다. 굳게 잠긴 집 앞뜰을 서성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수돗가 바닥을 들여다봤다. 영화에서 서연이 어릴 적 남긴 발자국이 앙증맞게 남아있었다. 이게 이 감독의 ‘집’이구나.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지난달 태풍으로 파손된 서연의 집은 오는 11월 다시 문을 연다. 영화제작사 명필름이 영화 속 모습에 가깝게 개축해 갤러리 카페를 운영할 예정이다. 제주도에 가면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야지. 어쩐지 누군가가 많이 생각날 것 같다.

나원정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